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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살던 집엔 마당이 넓었다. 시골집 마당이 그렇듯, 우리 집에도 나무가 많았다. 담벼락 옆에는 꽃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꽃은 벚꽃보다는 크고 철쭉보다는 작았다. 흰색부터 분홍 계열의 짙고 옅은 꽃송이가 가지마다 가득 피어나 화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꽃이 특히 기억나는 이유는 꽃의 암술 때문이다. 암술머리는 마치 풀을 바른 듯 끈적끈적해 어디든 잘 붙었다. 친구들과 나는 암술을 코끝에 붙이고 '피노키오가 되었다'며 장난을 쳤다. 우리는 그 나무를 '피노키오 나무'라고 불렀다.

중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옛날 집 마당에 있던 나무들의 이름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피노키오 나무'만큼은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본 일이 없었다. 당연히 이름도 알 턱이 없었다. 가끔 기억 속의 꽃나무가 떠올랐다. 나이가 들수록, 꽃나무는 환상 속에서 점점 아름답고 화려해졌다. 대체 어떤 나무인지, 궁금증도 커졌다.

<한국의 나무> 돌베개
 <한국의 나무> 돌베개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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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 맘먹고 도서관에 들러 도감 종류가 꽂힌 서가로 향했다. 여러 도감들 사이에서 얼마 간 헤매던 끝에 <한국의 나무>(김진석, 김태영 지음, 돌베개 펴냄)에서 눈길이 멎었다.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느낌이 남달랐다. 겉표지에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의 모든 것'이라 적힌 것도 맘에 들었다. '모든 것'이라니!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30년 전 기억 속의 꽃나무를 찾고 또 찾았다.

책은 무려 680쪽에 달했다. 650여 종의 나무를 소개하느라 찍은 사진만 해도 5000여 장이다. 나뭇가지와 잎, 열매 등 그 나무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전체 모습을 찍은 사진과 잎, 꽃과 열매의 단면, 마른 씨앗, 나무껍질, 꽃눈, 그리고 비슷한 종류의 나뭇잎을 모아 구분해놓은 사진까지, 이전에 본 그 어느 도감보다 사진이 정확하고 풍부했다.

나무에 대한 사전식 정보 이외에 '유럽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흔히 이용하는 나무(독일가문비나무)'라거나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의 실체가 바로 생강나무'라는 의외의 설명을 적어 놓은 세심함도 이 책의 큰 매력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수는 바로 6쪽에 달하는 저자들의 서문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 눈물 없이는 이 글을 읽을 수 없다.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연중 150일 이상 남북으로는 제주도에서 백두산, 동서로는 가거도와 울릉도, 심지어는 식물지리학적으로 한반도와 연관이 있는 일본 쓰시마섬에 이르기까지 방방곡곡을 직접 돌아다니며 나무들을 관찰, 조사해왔다.' (5쪽)

필자들이 이렇게 우리나라 전체를 누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생지 촬영'에 대한 고집 때문이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에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무들이 100% 심어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위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란 아무래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는 느낌이 다소 다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중략) 정확한 책을 만들고자 했던 필자들로서는 별 수 없이 고달픈 자생지 촬영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7쪽)

'자생지 촬영을 고수하자니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심신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국내 개화기 정보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어떤 나무는 머나먼 남쪽 섬을 3년에 걸쳐 반복해서 찾아가기를 무려 열 번째 만에 비로소 꽃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눈보라가 몰아친 어느 해 겨울날에는 달랑 겨울눈 사진 한 장을 얻겠노라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작은 나무를 찾아 무릎까지 빠지는 숫눈을 헤치며 강원도의 황량한 산속을 뒤지고 다닌 적도 있었다. 나무 하나를 찾아 밤을 새워 먼 길을 달려갔다가 현지의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하릴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다.' (7쪽)

이렇게 자생지 촬영에 집착하다시피 한 이유는, 도감을 찾는 독자들 때문이다.

'무릇 식물도감에 사용할 사진이라면 마땅히 독자들이 야외에서 해당 식물을 찾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명확한 특징은 고사하고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모호한 사진들을 사용한 식물도감 탓에 식물 식별에 갑갑함을 느껴본 독자라면 필자들의 이런 생각에 공감해주리라 믿는다.'

그렇다. 격하게 공감한다. 바로 내가 찾던 도감이 바로 이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기대에 차 처음부터 끝까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하지만 그 꽃나무는 찾지 못했다. 혹시 못 보고 그냥 지나쳤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샅샅이 살폈다. 역시나 명확히 '이거다!' 싶은 것은 없었다.

'만일 독자들이 야외에서 모르는 나무를 만났을 때 이 책을 참고해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면, 그 나무는 필경 지금껏 북한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식물이거나, 또는 분류학적으로 종의 실체에 대해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식물, 아니면 주변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낯선 외래종이거나 원예품종일 가능성이 크다.'(5쪽)

아무래도 그 꽃나무는 '낯선 외래종'일 것 같았다. 하긴, 어린 시절 집 마당 이외의 곳에서 단 한 번도 그 꽃을 만난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도서관을 나오는데, 한참 손에 들고 있던 탓인지 묵직한 책의 무게가 손에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책 속 나무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산이나 공원, 길가에서 무수히 마주쳤던, 그저 '나무'일 뿐이었던 것들이, 책 속에서 제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있었다.

손 때가 묻은 책
 손 때가 묻은 책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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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나무들에게 미안했고, <한국의 나무> 필자들의 노동과 열정에도 뭔가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오는 길, 도서관 근처 대형서점에 들러 그 책을 사고야 말았다. 찾던 꽃나무가 없으면 어떤가. 그 이상의 의미를 주기에 이미 충분했다.

얼마 후, 책을 다시 뒤지고 또 뒤져 비슷한 꽃 사진을 발견했다. '병꽃나무'였다. 이 사진이 어떤 실마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억속의 꽃나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세상에, 정말 그 나무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바로 '일본병꽃나무'였다. 그리고 일본병꽃나무가 경주 안압지에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꽃이 피는 시기를 기다려 이듬해 5월 나는 경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기저기 소담스레 피어 있는 그 꽃을 마주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암술을 뜯어 코끝에 붙여 보았다. 코끝이 찡해졌다. 나무와 내가,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 책의 필자들과 내가, 교감을 나누는 듯했다. 3년 전,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한곳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조용한 나무들이 실은 나름 분명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생존전략을 구사해가면서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나무들 역시 인간들과 함께 이 지구에서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반자가 아니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지혜로운 이들과 더불어 나무 공부의 소박한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10쪽)

산이나 공원에서 인상적인 나무를 만나면 일단 사진을 찍는 습관이 생겼다. 집에 돌아와선 이 책을 펼친다. 그러는 사이 나는 꽤 많은 나무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아직 보고는 있으되 알지 못하는 나무가 곳곳에 너무 많다. 겨울을 지낸 나무들이 지금 한창 새 잎과 꽃을 피워내고 있다. 이번 봄에는 또 어떤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린다.


한국의 나무 -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의 모든 것

김진석.김태영 지음, 돌베개(2011)


태그:#한국의 나무, #나무도감, #식물도감, #돌베개, #김진석 김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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