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난세는 난세인가보다. 최근 TV 여기저기서 이른바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캐릭터들의 등장이 줄을 잇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지난 30일 종영한 KBS <김과장>은 경리과장 김성룡(남궁민)을 통해 정의 구현을 말하는 한편 MBC <역적>은 대표적인 한국 영웅 홍길동(윤균상)을 2017년으로 가져온다. 한편, JTBC에서는 <힘쎈여자 도봉순>(아래 <도봉순>)의 어마어마하게 힘이 센 주인공 도봉순(박보영)으로 '여성 영웅'을 선보이는 중이다. 

 <힘쎈여자 도봉순> 속 박보영

<힘쎈여자 도봉순> 속 '여성영웅' 도봉순(박보영)은 어마어마하게 힘이 세다. ⓒ JTBC


배우 박보영이 연기하는 도봉순은 살아가기 쉽지 않은 한국 사회 속 여성들의 판타지를 정확하게 실현시켜준다. 극 중에서 봉순은 힘이 세다는 걸 제외하고는 한국의 보통 여성들과 비슷한 삶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는 힘이 세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 겪었던 유괴 사건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다. 족히 자신보다 키나 몸집이 두 배는 더 커보이는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가볍게 날려버리거나, 여성이라고 무시하고 '보복운전'을 하는 김원효를 차량과 함께 그대로 돌려버리는 장면은 어마어마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박보영의 신체와 극명하게 대비돼 더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아마 모두 한 번쯤 이런 꿈을 꿀 것이다. 자신의 신체를 넘어선 '괴력'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도봉순을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과 쾌감. 최근 잇달아 벌어지는 여성혐오 범죄를 두고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여성들에게 도봉순은 존재 자체로 위안이자 여성들의 대리 욕망을 실현하는 창구다. 그런 점에서 도봉순을 진정한 여성 영웅으로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도봉순>의 성공 비결은 오늘날 여성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잡은 것에 있다.

그리고 제작진도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듯 보인다. <도봉순>이 당초 3% 시청률 공약으로 걸었던 '안심 귀가 서비스'는 이 드라마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짚는다. <도봉순>은 JTBC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이라는 10%를 기록했다. 지난 14일 실제로 배우 박형식과 지수는 컴컴한 귀갓길에 두려움을 느끼는 여자 고등학생들을 만나 '안심 귀가 서비스' 공약을 이행했고 이들과 동행하며 여성 귀갓길 안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도봉순>은 드라마 속에서 발생하는 연쇄 실종 사건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혐오 범죄'로 분명히 명명한다. 이는 드라마 <도봉순>이 획득한 또 다른 성취다. 지난해 일어났던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몇몇 미디어에서조차 조현병에 의한 살인일뿐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정의내린 것과는 대조적인 결정이다. <도봉순>은 비록 드라마 속에서지만 "범죄 전문 프로파일러들은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로 본다"는 뉴스 속 리포트에 이어지는 박보영의 내레이션("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힘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여전하다")으로 어떤 선언을 해냈다.

통쾌함 뒤에 남은 씁쓸함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오로지 힘이 센 것을 제외하고 경제적 혹은 학력에서 도봉순이 안민혁(박형식)에 크게 뒤진다는 사실은 찜찜함을 남긴다. 또 그가 힘을 쓸 때마다 감탄하는 안민혁의 눈빛을 클로즈업해 정성껏 잡아낸 연출은 어떨까. 제아무리 '영웅'이라 할지라도 남성의 시선 아래서 비춰지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점은 홀로 우뚝 선 도봉순을 그려내기에 다소 궁핍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더 문제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도봉순>의 몇몇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는 더없이 무신경하고 더 나아가 악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힘쎈여자 도봉순>

JTBC <힘쎈여자 도봉순> 포스터. ⓒ JTBC


먼저 드라마 속에서 '웃음코드'로 소비되는 설정이 혐오와 편견을 기반에 두고 있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게임회사 아인소프트의 대표 안민혁은 드라마 속에서 계속 게이로 오인 받는데 이는 도봉순의 지속적인 '아웃팅'을 통해 널리 퍼진다. 도봉순은 드라마 초반 주변 인물들에 안민혁 대표가 게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하나의 해프닝일 뿐 단 한 순간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재밌는 '웃음 코드'처럼 소비된다.

현실에 있는 성소수자들이 아웃팅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드라마 속에서 정정되지 않은 잘못된 소문때문에 안민혁 대표는 잠시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그저 가벼운 에피소드의 일부다. "원래 잘생기고 옷 잘 입고 여자관계 깨끗하면 100% (게이)다"는 친구의 말이나 남녀 간의 연애만이 "정상적인 연애 패턴"이라고 치부되는 대사는 단순한 회화화를 넘어선 편견과 혐오를 기반에 둔다.

한편, 도봉순은 친구인 임국두와 안민혁과의 관계를 상상하면서 고개를 내젓고 안민혁은 최종적으로 본인을 "여자를 좋아하는 건강한 남자"라고 공언함으로써 졸지에 남자를 좋아하는 남성들을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로 만들어버린다. 안민혁 대표가 게이로 오해받는 설정은 드라마의 중심 서사 구조가 아니며 중요하게 쓰이지 않는다. '게이 설정'은 그저 웃음거리로 쓰이거나 도봉순과의 러브라인을 잠시 지연시키는 효과를 낼 뿐 불필요하다.

 <힘쎈여자 도봉순>

JTBC <힘쎈여자 도봉순> 속 한 장면. ⓒ JTBC


하지만 게이에 대한 편견 강화는 이보다 지난 25일 방송된 <도봉순> 10화에서 더욱 심각해진다. <도봉순> 홈페이지에만 등장하던 게이 캐릭터 '오돌뼈'가 10화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다. 김원해가 용역 깡패와 함께 1인 2역을 맡아 연기하는 이 '오돌뼈'라는 캐릭터는 아인소프트의 직원으로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진짜 게이"로 나온다. 모든 캐릭터를 소화하는 김원해의 미친 연기력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 캐릭터는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신경하다. 도봉순을 보자마자 "왜 안민혁 대표에 끼를 부리느냐"고 카랑카랑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오돌뼈. 그는 짙은 화장을 하고 안민혁 대표 앞에서 시종일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시청자들은 아마 홈페이지 속 오돌뼈를 설정을 보지 않더라도 그가 게이로 설정됐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오돌뼈는 그간 미디어에서 다뤄진 게이에 대한 편견을 악의적으로 반복한다. 단순히 드라마 속에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할까. 아니 이 오돌뼈라는 캐릭터는 2010년 SBS에서 방송됐던 김수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나 같은 방송사에서 방송됐던 JTBC <선암여고 탐정단>(2013)보다도 훨씬 퇴보했다.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성소수자 캐릭터를 우리는 언제까지 감내해야 할까.

매회마다 성정체성을 회화화하는 설정이 등장하는 <도봉순>, 이는 이 드라마가 가진 어떤 예민함을 단숨에 무화시켜버리고 만다. 단순히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소수자성을 담보했다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시청률 10를 바라보는 JTBC 최고 시청률 드라마 <도봉순>.

ⓒ JTBC



힘쎈여자 도봉순 박보영 여성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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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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