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심청가 공연중인 민은경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심청가 공연중인 민은경 ⓒ 노승환


설화 <심청전>이 사람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는 것은 그 속에 '원형(archetype)'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원형'은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의 용어다. DNA가 우리 유전자 속에 담겨있는 신체정보라면, 원형은 우리 유전자 속에 담겨있는 심리정보다.

우리 몸 안에는 수십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사바나 초원에서 살 때부터 겪었던 온갖 경험과 기억과 정서가 각인돼 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설명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는다.

단순히 어머니 원형, 아버지 원형은 물론이고,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무기력한 아버지, 착한 딸, 주인공을 돕는 왕자님과의 결혼 등 동서고금의 설화 속에 산재되어있는 이런 원형적인 스토리텔링 요소들이 우리에게 더욱 강한 울림을 주는 요소들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심청전,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등에도 이런 원형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완창' 내공 없이는 불가능한 도전

이야기만 들어도 그런데 음악까지 곁들이면 감동은 배가된다. 설화 <심청전>을 편집하여 판소리용의 가사로 만든 것을 사설(辭說)이라고 부른다.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의 사설은 글자 수로만 따지면 3만 자가 넘고, 2백자 원고지로 190장이 족히 되고도 남을 방대한 분량이다.

이런 연유로 대개 소리꾼들은 판소리 사설에서 몇몇 대목만을 떼어내어 부르거나, 혹은 적절하게 발췌 요약하여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정통 판소리 '완창(完唱)'은 이 방대한 분량의 가사를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모조리 한 자리에서 내리 부른다는 소리다.

어지간한 내공이 없이는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일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심청가는 희노애락 감정의 낙차가 크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집중적으로 몰입해야하는 소리꾼의 부담은 더할 수밖에 없다.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심청가 공연중인 민은경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심청가 공연중인 민은경 ⓒ 노승환


소리꾼 민은경이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에서 주관하는 올해 완창 판소리 무대 첫 번째 주인공으로 강산제 <심청가>를 완창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하였다. 그 내공을 모르는 바 아니다. 허나 이제 막 30대 중반 젊은 여자 소리꾼이 완창에 도전하는 당찬 모습이 놀라웠고, 민은경이 만들어낼 소리판이 얼마나 멋질 것인가 하는 기대가 나를 설레게 했다.

국립창극단 단원.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 이 두 가지 이력만으로 소리꾼이자 배우 민은경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굵직굵직한 국내 유수의 판소리 대회에서 몇 차례 장원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에도 세계적인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에서 주연인 춘향을 맡아 열연하는 등 수많은 공연에서 소리꾼이자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민은경의 생애 첫 완창 무대 매진되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3월 25일(토)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열린 민은경의 완창무대는 보기 드물게 400석이 넘는 좌석이 '전석 매진'되는 기염을 토하며 시작됐다. 민은경은 생애 첫 완창 무대를, 중간에 휴식시간을 빼더라도 4시간 반이 넘는 긴 시간을, 시종 흐트러짐 없이 좌중을 들었다 놨다하며 자신만의 멋진 소리판으로 만들어냈다.

민은경을 아는 사람들이 흔히 형용하는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분명한 성음과 강인한 통성'은 이날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정말 저 자그마한 몸매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뽑아내는지 신통할 뿐이다.

심청의 모친 곽씨 부인이 죽고 심봉사가 통곡할 때, 심봉사가 딸 심청의 묘비 앞에 엎드려져 울 때, 심청이 남경선인들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질 때, 심봉사가 황후가 된 딸 심청을 다시 만나 눈을 떴을 때….

 관객들은 민은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대목 대목마다 그를 따라 웃고 울었다

관객들은 민은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대목 대목마다 그를 따라 웃고 울었다 ⓒ 노승환


관객들은 민은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대목 대목마다 그를 따라 웃고 울었다. 민은경의 소리를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관객들의 호응이 얼마나 좋았던지, 민은경 자신이 "객석 중간 중간에 마치 제가 사람들을 심어 놓은 것 같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었을 정도다.

판소리는 1인 창극(唱劇)이요, 1인 오페라다. 고수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소리꾼 한사람이 주연, 조연에 엑스트라 역할까지 오롯이 감당해야만 한다. 창극이란 단어도 사실은 노래를 하되(唱) 극적인 요소를 갖추어서(劇)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민은경의 진면목이 더욱 돋보였다. 연극, 뮤지컬, 창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재기발랄한 소리꾼이자 배우로서 탄탄한 기반을 닦았던 민은경이 자신의 기량을 1인 완창 무대에 잘 녹여낸 것이다.

알다시피 판소리에서는 '발림'이라 하여 소리를 하면서 부채를 포함한 몸짓이 같이 소리를 따라가면서 극적인 분위기를 돋운다. 그런데 탁월한 명창도 소리는 뛰어날지 몰라도 상황맥락에 따른 극적인 연기가 따라주지 않아 단순 발림에 그치면서 아쉬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마치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서 가난한 시인 로돌프가 사랑하는 미미를 위하여 부르는 아리아가 더욱 극적이기 위해서는 로돌포 역을 맡은 배우는 노래만이 아닌 연기가 따라줘야 하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거구의 테너에게서 가난한 시인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아 오페라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도 사실 아닌가.)

이번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의 완창무대는 소리꾼이자 배우인 민은경 개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의미 깊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는 스승인 성우향 명창에게서 배운 강산제 심청가의 소리를 한 대목도 빼놓지 않고 불렀다.

이번 무대에서 민은경은 결코 젊은 소리꾼의 패기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력과 이에 덧붙여 격조 있는 연기까지 선사했다. 민은경은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무대의 예술적 품격에 부응하는 한편, 자신의 대중적 친화도와 브랜드 파워까지 확인하는 수확을 올렸다.

 민은경과 고수 이태백이 공연을 마치고 함께 인사하고 있다.

민은경과 고수 이태백이 공연을 마치고 함께 인사하고 있다. ⓒ 노승환


차세대 소리꾼? 이미 그는 '최고 소리꾼'

사람들은 그를 '차세대 소리꾼'이라 한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당대의 최고 소리꾼이자 배우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이번 무대는 그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나 같은 아마추어 판소리 애호가들도 좋았지만, 판소리 전문가들과 강호에 숨은 많은 귀명창들도 민은경의 완창 무대를 절찬하는 소리가 들리니 더욱 기분이 좋다.

민은경이 더욱 깊고 더욱 성숙한 소리꾼으로 당대 최고의 명창이요, 국창(國唱)이 되기를 축원하며 나는 국립극장 KB하늘극장을 나섰다. 오후 2시 반경에 들어왔는데, 시간은 벌써 저녁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시민기자의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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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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