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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奈良)현 미야케(三宅)초에는 20년째 묵묵히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마쓰다 노부히로(松田暢裕, 46)씨는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가쓰라기(葛城) 산자락에 산다. 한국 대하소설 <지리산>을 일어로 번역했고, 학교에서는 교사로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위한 교육을 한다. '무지개'라는 한글 학교를 운영하며 한일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번에 '무지개' 학생들과 함께 서울을 찾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기자 말

본인의 성격이 소심하다고 한 그는 젊은 시절 900cc 오토바이를 즐겨 탔다. 살짝 높은 톤의 목소리는 작고 차분하다. 대화하면 꼭 한번은 농담을 던진다. 이번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 3일간 '무지개' 학생들과 서울을 방문했다.
▲ 유학했던 연세대를 방문한 마쓰다 본인의 성격이 소심하다고 한 그는 젊은 시절 900cc 오토바이를 즐겨 탔다. 살짝 높은 톤의 목소리는 작고 차분하다. 대화하면 꼭 한번은 농담을 던진다. 이번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 3일간 '무지개' 학생들과 서울을 방문했다.
ⓒ 마쓰다 노부히로(松田暢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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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일

마쓰다씨는 지바(千葉)현에서 자랐다. 1950년대 부흥하던 도쿄(東京) 근교다. 사람이 많이 몰렸다.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새집을 많이 세웠다. 그의 가족은 그 집들 사이에 비죽 자리 잡은 판잣집에 살았다(관련 기사 : 소녀상 찾은 일본인들 "역사 가까이서 보고 싶다").

그는 아주 뚱뚱한 아이였다. 학교 친구들은 집안 형편과 외모를 이유로 왕따를 시켰다. 학교 바닥에 교과서를 못으로 박아두기도 했다. 신발이 없어져 찾아봤더니 화장실 변기 안에 있었다. 중학생 때 당한 폭행으로 부러진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지금도 굽어 있다.

학창시절의 기억은 '이유 없는 괴롭힘'에 대한 분노를 남겼다.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교사가 되기로 한 것도 이때다. 그의 경험은 한일 문제 등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두게 했다. 자신이 당했던 것보다도 더 큰 괴롭힘을, 한 나라 전체가 당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피해자들의 말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나라(奈良) 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다양한 인연을 만났다. 한국인 유학생은 한국어를 재미있게 가르쳐줬다. 고 김학순 할머니와 야나기모토(柳本駅) 비행장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식민 지배의 참상을 들려줬다. 이후 한국어를 NHK 라디오 강좌 등으로 배웠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우리 말을 익혔다.

대학 시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역사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취직 후에는 주로 나라 현의 역사적 장소들을 현지 답사했다. 지금은 묵묵히 한일 민간 교류의 가교 구실을 하고 있다. 본업인 공립학교 수업시간엔 재일조선인 정체성에 관한 교육을 하고 있다. 한국 장편 대하소설 <지리산>을 번역했고, 한국어 교실 '무지개'에서 우리 말과 한일 역사를 알리고 있다.

가쓰라기 산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산 건너편에 백제인이 많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 마쓰다의 집에서 본 가쓰라기(葛城) 산자락 가쓰라기 산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산 건너편에 백제인이 많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 마쓰다 노부히로(松田暢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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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버리고 일본이 차별한 사람들

재일조선인을 부르는 여러 호칭들
일제 침략 이전 조선이란 통일국가가 있었으니 '재일조선인'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 북한과 조선총련을 지지해 같은 호칭을 쓰는 사람이 있다. 한국을지지하는 사람은 '재일한국인'이라는 호칭을 쓴다. 일본 언론은 '재일한국조선인'을사용해왔고, 최근 들어 당사자와 일본 언론은 '재일코리안'이란 용어를 많이 쓴다. 기사에서는 침략 이전 조선의 이름을 중시하는 마쓰다씨의 용법을 따라 '재일조선인' 호칭을 사용했다.
마쓰다씨는 대학 시절 '파친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사장은 가끔 그를 집에 초대해 비빔밥을 대접했다. 그는 '요시다'라는 일본 이름을 쓰는 재일조선인 2세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사장의 말을 듣게 됐다. 사장은 "일본인 교사는 믿을 수가 없다. 대놓고 차별을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약자니까 진심도 아니면서 일부러 티 나게 특별 대우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그런 교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한일 관계에 대한 관심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교직 생활 22년 중,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알고 가르친 학생은 둘 뿐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언제나 '여기에 한국 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을 대한다. 학생들 앞에서 "우리 일본인들은" 같은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가대표 축구 시합에서 한국을 응원하기도 한다. 혹시 있을지 모를 재일조선인 학생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교 조회에서 "오늘은 축구 한일전이 있다. 모두 일본을 응원하자"고 말한 교사와 싸운 적도 있다.

초등학생들은 6학년 때 식민지배 역사를 배우기 전까지 한국에 대해 거의 교육 받지 않는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해선 '불쌍한 나라', '약한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다.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져야 재일조선인 학생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저학년 수업에선 소고춤을 가르치고, 파전을 만들어 먹는 등, 한국 문화에 관한 수업을 진행한다. 재미있게 수업을 들은 일본 아이들은 "어제 슈퍼에서 신라면 사 먹었다"는 자랑도 한다.

교토에서 정육점을 경영하는 최주재 씨는 마쓰다의 친구로, 지난 1월 수업에서 '나는 이름이 2개 있다'는 주제로 강연했다.
▲ 재일조선인 최주재(43) 씨가 일본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화 수업을 하고 있다. 교토에서 정육점을 경영하는 최주재 씨는 마쓰다의 친구로, 지난 1월 수업에서 '나는 이름이 2개 있다'는 주제로 강연했다.
ⓒ 마쓰다 노부히로 (松田暢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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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학년 담임을 맡으며 만난 재일조선인 학생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학생이 재일조선인임을 것을 알게 된 것은, 졸업 시기 부모간담회 때 학생의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학생의 형 이야기를 하며 걱정스러워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어 내가 이런 고통을 받는다"라며, 한국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생님을 좋아하니, '네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밝혀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의 걱정을 들은 마쓰다씨는 겨울방학 때, 보충수업을 핑계로 학생을 불렀다. 그 날 학생과 재일조선인 가수 아라이 에이이치(新井英一, 67)의 공연을 보러 갔다. 아라이씨에겐 미리 '이런 아이를 데려간다'고 일러뒀다. 콘서트장에서 "오늘은 아주 어린 손님이 있다"고 소개한 아라이씨는 사용하던 하모니카를 학생에게 선물했다. 하모니카는 지금도 그의 방에 있다. 학생은 중학교 졸업 때 마쓰다의 학교로 인사를 왔다. 경찰관을 꿈꾼다는 그는 재작년 <지리산> 번역 기념 공연에도 형과 함께 방문했다.

연세대 어학당 시절에도 재일조선인과 인연이 깊었다. 어학당에는 김미화자라는 이름의 재일조선인 친구가 있었다. 재일조선인 중에는 일본 이름으로 병용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어학당이 아닌 곳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이름을 소개할 때였다. 이름이 이상하다고 곧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선 김미화라는 이름을 썼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한국인들이 재일조선인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이다. 김미화자. 일본에선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만든 이름이었고, 한국에선 이상하다고 놀림 받는 이름이었다.

마쓰다씨는 재일조선인이 '한국 정부가 버렸고, 일본 정부가 차별해 온 사람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에게 가해지는 행정적 차별은 많이 개선됐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과 관련한 문제가 많다. 한일 관계가 나빠질수록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사람 중 하나가 재일조선인들이다. 특히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혐오가 심각하다. 북한에서 미사일 실험을 하는 날은 조선학교 학생들이 폭행을 당하곤 한다. 교통카드에 적힌 학교 이름을 스티커로 가리는 학생들도 많다.

그는 재일조선인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인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 재일조선인들이 모국에 대한 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환경, 재일조선인들의 진로, 취직보장, 행정적 차별의 완전 해소"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7년에 걸친 <지리산> 번역

2015년, 마쓰다씨는 이병주의 장편 소설 <지리산>을 번역, 출판했다. 5000쪽가량 되는 원작을 7년 반에 걸쳐 옮겼다. 그는 연세대 한국어학당 유학 시절, 홈스테이하던 한국인 친구의 방에서 <지리산>을 처음 읽었다. 그 친구가 소설을 일본에 소개하면 좋겠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경제불황 속에 출판이 취소되는 일을 겪으면서도, 자금을 모으는 등 노력 끝에 출판에 성공했다. 2015년에는 일본에서 출판된 외국 문학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을 뽑는 일본번역대상에서 최종 15작 안에 들어갔다.

 마쓰다가 번역한 이병주 작가의 장편 소설 <지리산>이 2015년 출간됐다. 가수 아라이 에이이치(新井英一, 67)가 출판 기념 축하 공연을 하고, 시인 김시종(88)이 출판기념 강연회를 했다.
▲ 일역판 <지리산> 출판기념회 팸플릿 마쓰다가 번역한 이병주 작가의 장편 소설 <지리산>이 2015년 출간됐다. 가수 아라이 에이이치(新井英一, 67)가 출판 기념 축하 공연을 하고, 시인 김시종(88)이 출판기념 강연회를 했다.
ⓒ 권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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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이 미래세대를 향한 것이었다면, 번역은 기성세대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어른들이 가진 생각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봤다. 어른들의 생각을 바꿀 방법으로 찾은 것이 번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일을 알 수 있는 책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었다. 문제는 독자가 일본인이라는 점이었다.

해방 이후 세대의 한국 작가들이 묘사한 일본인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직접 만나보지 않고, '나쁜 일본 사람'이라는 이미지로만 일본인을 그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병주는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에는 조선인 학생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교사도 나오지만, 반대로 반일 감정을 가진 학생을 돕다 파면된 교사도 있다. 마쓰다씨는 <지리산>이 '인물들의 얼굴이 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역사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애착이 가는 책이었다.

약자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  

마쓰다씨는 '무지개'에 관해 물을 때마다, "그렇게 크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모임"이라며 손사래 친다. 부락해방운동을 하며 알게 된 친구들이 만든 작은 모임일 뿐이다. 모임을 시작한 경위를 설명할 때도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들의 힘이 컸다"고 말한다. 그는 '무지개'도, 이번 서울 방문도, '사소한' 것이라 여긴다.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 역사를 가깝게 느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런 사소함이 변화를 만들었다. 마쓰다씨는 그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알려줬고, 서울까지 데려왔다. 관광 목적이라면 지루할 수 있을 법한 역사유적들만 골라 방문했다. 그렇게 '무지개' 학생들은 한일 관계에 대한 관심을 넓혔다. 드라마를 좋아하던 학생들은, 이제 "한국어와 역사를 더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무지개만큼이나 '사소'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해온 한일관계 및 한일 역사 공부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묻자 "나의 위안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지메를 모르는 척하면 언젠가 너희가 당한다. 그러니 용서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차별이 있는 사회를 그냥 놔두면, 언젠가 그 차별이 자기에게 향할 수 있다. 약자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 그곳이 바로 그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는 김학순 할머니와 야나기모토 피해 할아버지 두 분이 하신 말씀을 언제나 가슴에 새긴다.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니다.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그런 마음 하나로 일본에 왔다." 보상하라는 말보다 '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가슴 아팠다. 가해자 국민으로서 한없이 미안했다. 피해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도 제쳐놓고 미래의 인권을 말하고 있었다. 고작 '약자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당연한 말을 할 뿐인데, 일본은 그것마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인보(人寶)라는 말이 있다. 아니, '그런 말이 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지리산>을 소개했던 친구 최호진 군이 지어낸 괴상한 말이니까. 별게 아니라, 사람(人)과 보물(寶)을 합친 말이다."

어찌 보면 진부한 말이지만, 마쓰다씨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 발음이 정겹다. "인연이라고 할까? 많은 한국 분들이나, 그런 활동 하는 일본 분들을 만나는 게 '인보'라고 생각한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저를 인도해 주는 것 같다. 나라 교대 시절 만났던 한인 유학생 최호진 군, 고 김학순 할머니, 한국어 교실 '무지개' 학생들처럼 직접적 만남도 있고, <지리산>의 이병주 작가처럼 간접적인 인연도 있다." 마쓰다는 이런 인연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장구 20개와 야나기모토 비행장

그는 일본 내 한일관계와 식민지 역사, 인권 교육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인들은 식민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전혀 없다. '한일합방'이라는 용어는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지 못한다. 교사조차도 모른다. 토지조사사업, 창씨개명, 강제연행, 강제노동, 징병, 위안부 등 한국인이 잘 아는 문제들을 일본인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좀 더 사실을 지각하고, 인정해야만 한일관계가 호전할 수 있다. 앞으로 일제 강점기 가해 당사자들은 반성하고 처벌받아야 하며, 당시의 일반 시민들과 그 후손들은 그런 침략을 지지한 것, 그런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마쓰다씨는 다음 학기엔 나라 현의 다른 학교로 전근한다. 일본으로 돌아가면,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한국 문화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장구 20여 개를 옮겨야 한다. 그는 한국인 강제노동이 있었던 야나기모토 비행장 진상규명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이 있는 텐리(天理)시가, 기존에 있던 '강제노역' 안내판을 없앴다. 이를 재설치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이미 텐리시와 자매도시인 한국 서산시에서는 시청 소녀상 옆에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했다. 텐리시에선 여전히 안내판 설치를 위한 운동이 진행 중이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출판 기념 팸플릿 사진 저작권자 권세진씨 이메일 주소는 aller26@naver.com 입니다.



태그:#마쓰다 노부히로, #한일관계,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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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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