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 영국 신문을 뒤지다가 특이한 뉴스를 보았다. 한 아시아의 식당에서 주방장이 뱀에 물려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그가 일하던 곳은 뱀 수프로 잘 알려진 '맛집'이라고 했다.

뱀은 꽤 여러 나라에서 요리의 재료로 쓰고 있는 만큼, '뱀 요리' 자체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에도 방울뱀 고기가 든 소시지를 넣어주는 핫도그 집이 있다).
뱀 요리가 특기인 식당에서 주방장이 뱀에 물리는 사태 역시 불행하기는 할망정, 놀라운 일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몸통 없는 '머리'가 요리사를 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잘린 지 20여 분이 지난 뱀 머리가 사람을 문 것이다. 

기사를 읽고 퍼뜩 떠오른 생각은, 미국 남부를 여행하다가 본 경고문이었다. 차를 몰다가 휴게소에 차를 세웠는데, 공원 앞에 '방울뱀을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붙어있었다.

표지판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죽은 뱀도 건드리지 말라'는 글귀였다. 죽은 듯 보이는 뱀도 살아있을 수 있으며, 죽은 뱀조차도 반사신경이 살아 있어서 사람을 물 수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기이하게도 한국 정부가 떠올랐다. 대통령 탄핵으로 '머리'는 잘려나갔으되, 여전히 신경은 살아 '박근혜 정치'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 합의 폐기 거부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강행이 그렇다.
지난 3월 6일 사드 시스템 일부가 기습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진은 수송기에서 사드 발사대 두 기가 막 내려진 모습.
 지난 3월 6일 사드 시스템 일부가 기습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진은 수송기에서 사드 발사대 두 기가 막 내려진 모습.
ⓒ DVIDS 공개자료

관련사진보기


재주 부리고 욕까지 얻어먹는 한국

시민들은 위안부 합의와 사드 배치를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당연하지 않느냐'고 묻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합의는 '외교 문제'인 반면, 사드 배치는 '안보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위안부 합의와 사드 배치는 한 덩어리로, 모두 안보 문제인 동시에 외교 문제이지만, 당사자는 한국이 아닌 미국과 일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할은 무엇일까? 일본과 미국의 안보·외교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욕을 대신 먹는 일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세계 경제 대국 1, 2위를 다투는 두 나라로부터 경제보복 조치와 더불어 조롱이라는 '보너스'까지 받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만이 아니다. 새 대통령이 들어서자마자 미국이 한국에 처한 첫 조치는 '환율조작국 지정' 협박과 반덤핑 예비관세 부과 판정이었다.

한국이 중국과 사드 배치 문제를 놓고 홍역을 치르고 있는 지금, <조선일보>에 재미있는 보도가 실렸다. 미국 특파원이 쓴 "워싱턴에서 보이지 않는 한국"이라는 27일 기사다. 기자는 "한반도에 사드 포대가 전격 전개되고 중국의 보복 협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브리핑에 참석했다고 했다.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을 어떻게 생각하나" 묻자 스파이서 대변인은 "뭐에 대한 보복?"이라고 되물었다. 기자가 다시 "사드 배치"라고 하자 그는 "사드 배치에 (보복을)?"라고 다시 확인했다. 기자들이 집요하게 중국의 보복 조치에 대해 질문했지만 "우리는 이(중국 보복)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피해 나갔다."

해당 특파원은 백악관 대변인이 사드 보복 논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을 자극하는 발언은 한사코 피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백미는 그 뒤에 등장한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이날 북한을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말했지만, 한국은 '사우스 아프리카(South Africa)'라고 했다가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로 정정하기도 했다."

백악관 대변인 숀 스파이서가 3월 27일 브리핑을 한 뒤,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백악관 대변인 숀 스파이서가 3월 27일 브리핑을 한 뒤, 기자의 질문을 듣고 있다.
ⓒ 백악관

관련사진보기


중국에는 분개, 미국에는 만세?

한국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부른 것은 단순한 실수로,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으로 시작하는 나라를 말해보라고 할 때,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남한'보다 '남아공'을 먼저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입에 익숙한 대로 '남' 다음에 '아프리카'를 말한 것뿐이다.

그나마 백악관 대변인쯤 되니 '북한'을 제대로 말했지, 미국인들 가운데는 '북한'과 '남한'을 구분 못 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부통령 후보였던 새라 페일린이 "우리는 북한 편에 굳건히 서야 한다"고 말해 큰 웃음을 안겼지만, 그를 비웃던 미국인 중에서도 속으로 뜨끔했던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무지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 아마도 많은 한국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이들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인들이 대체로 외국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덧붙여 두자. 대개의 미국인들이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유럽 대여섯 나라와 아시아 네댓 나라 정도다.

아시아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일본이고, (비록 이유는 다르지만) 북한이 그다음일 것이다. 비록 최근 들어 중국이 두 나라를 위협할만한 새로운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말이다. 미국인들 다수는 중국에 대해 일본에 대한 호의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섞은 듯한 복합적 감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 말에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비단 시위 때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 관심이 없는 미국이 왜 군대를 보내서 땅을 지켜 줬느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침략에서 한국을 지키려던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사회주의화 된) 러시아·중국이 일본의 자본주의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막는 '완충지대(buffer zone)'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자동차 차체라면, 한국을 '범퍼' 정도로 간주한 것이다.

신냉전 시대의 '완충 지대' 역할 자청한 한국

물론, 미국 행정부가 일본과 한국에 대한 차등적 인식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외교적 수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끔은 외교수사도 피해가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최근 <인디펜던트 저널리뷰>와 인터뷰를 했다. 여기서 그는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 중요한 파트너"라고 말한 뒤, 곧바로 이렇게 덧붙였다. "당연히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국가 관계는 미국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한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일본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드 배치 역시 미국의 라이벌이 된 중국으로부터 미국과 일본의 안보·외교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주둔비용을 더 받아내기 위해 '미군철수'까지 거론하곤 했다. 이런 미국이 그 비싼 무기를 한국을 위해 '거저', 그것도 반대를 무릅쓰고 이 땅에 배치해 준다고 믿는단 말인가?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현실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 안 그러면 내주고, 욕먹고, 살길까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상황이 그렇듯 말이다. 경제보복을 당하고 외교 관계가 거덜나도, 최소한 안전해지기는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피겠지만, 사드 배치는 오히려 한반도의 전쟁위협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미국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더라도, 제 나라의 이익이 뭔지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를 위해 대미 관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어느 경우든 답이 '예스'라면, 그건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 주권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태그:#사드, #위안부합의, #박근혜 , #경제보복, #북한
댓글4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