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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등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신문배달 일을 하고, 출판사 영업부에 들어가서 책을 팔고, 이러다가 <보리 국어사전> 짓는 편집장 노릇을 하고, 돌아가신 이오덕님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고, 이러는 동안에 저한테 '책'은 늘 남이 쓴 글로 이루어진 종이꾸러미였습니다. 2004년에 제 첫 책을 내놓으면서 '책'은 내 글로 이루어진 종이꾸러미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제 모습이 콱 박힌 잡지입니다.
 제 모습이 콱 박힌 잡지입니다.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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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배달 일을 하며 '우리말 소식지'를 낼 적에 더러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찾아와 만나보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른바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수많은 기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을 뿐이었어요. 작은 자리에서 작게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머릿기사로 쓸 일은 없었으리라 느껴요.

2017년 3월에 나온 <월간 퀘스천>이라는 잡지에서 뜻밖에 '표지 이야기'로 제 얼굴이 실렸습니다.

잡지를 받아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집에는 거울이 없고, 제가 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일도 없어서, 막상 잡지 겉그림에 나온 제 모습을 보면서도 이이가 나인지 남인지 한동안 헷갈렸습니다.

"검정 고무신 신고 새롭게 살려낸 한국말사전"

잡지 <월간 퀘스천> 7호(2017.3.)는 이렇게 이름을 뽑습니다. 지난 2016년 여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냈는데, 이 작은 사전이 발판이 되어 인터뷰를 했습니다. 작은 사전을 내고서 두 번째로 한 인터뷰이자 종이매체로는 처음 한 인터뷰였어요.

처음에는 '학회나 단체나 출판사나 대학교나 대학원이나 연구소가 아닌 한 사람'이 어떻게 사전을 낼 수 있느냐고 여쭙는 자리로 여겼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사전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사전 가운데에서도 한국말사전을 어떻게 엮거나 짓는지 궁금할 수 있어요. 으레 사전을 '여러 사람'이 짓는다고 여길 수 있는데, 막상 어느 나라에서든 사전은 '한 사람'이 짓습니다.

잡지 표지 이야기
 잡지 표지 이야기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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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한가 하면, 사공이 여럿이면 배가 앞으로 못 가요. 사공은 오직 하나여야 합니다. 사공은 하나이되, 곁에서 사공을 이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공을 돕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요. 이러면서 사공이 배에 태울 손님이 있어야 할 테지요.

사전을 짓는 사람이 여럿이면 말풀이가 뒤섞이고 말아요. 사전은 한 사람이 짓되, 이를 여러 사람이 되읽고 되살피면서 가다듬습니다. 교정·교열은 여러 사람이 하지요.

QUESTION : 학교는 안 보내고요?

최종규 : 학교를 안 보내는 게 아니라 우리 집 학교를 다니지요. 여기가 우리 집 학교고, 저희가 도서관을 하니까 도서관 학교고, 또 여기를 숲으로 가꿀 생각이니 숲 학교도 되는 거지요 … 저희는 일반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어서요. 졸업장 따는 학교는 보낼 생각이 없어요. 여긴 졸업장이 없는 학교이지만, 여기가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요. 다른 분들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어떤 직업, 회사원이나 공무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졸업장 따는 학교에 보내 교과서 맞춰서 배우는 거고요.

잡지 속그림. 인터뷰를 하러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려고 두 아이가 바삐 움직여 준 모습이 찍혔다.
 잡지 속그림. 인터뷰를 하러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려고 두 아이가 바삐 움직여 준 모습이 찍혔다.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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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하나 써냈고, 새로운 사전을 하나 더 쓰고, 앞으로도 새로운 사전을 꾸준히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며 아이들하고 함께 배우고 도서관학교를 꾸리면서 사전을 쓸 수 있는 힘이라면, 아무래도 '졸업장을 안 땄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대학교 졸업장을 땄다면 그 졸업장에 얽매인 길을 갔으리라 생각해요. 졸업장이 아닌 삶·살림·사랑을 찾고픈 마음이었기에, 온갖 굽이진 길을 돌고 거쳐서 새로운 한국말사전을 바라보는 자리에 왔구나 싶어요.

제 이야기가 '표지 이야기'로 나온 잡지를 더듬더듬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인터뷰 하나로 그동안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오늘 걸어갈 길을 되짚은 뒤, 앞으로 나아갈 꿈을 새삼스레 추스를 만하구나 싶어요.

잡지 속그림. 여러 가지 우리말 이야기하고 사전을 쓴 보람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잡지 속그림. 여러 가지 우리말 이야기하고 사전을 쓴 보람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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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 사전 짓는 일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종규 : 저는 시 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하고 지내면서 말과 글을 가르치다 보니까 저절로 시를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짤막하게 요만한 엽서 종이에다가 이야기를 하나 엮어서 써주는 거예요. 여러 가지 말을 골고루 섞어서. 섞으면 여러 글씨로 보지만 그거를 이제 이리저리 말을 바꿔서 훈련시키는 셈이지요 … 같은 토박이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사전에 있는 죽은 말을 쓰고, 어떤 사람은 몸으로 느끼는 늘 살아가는 말을 쓰는 거고, 요즘 문인들은 살림이 없이 그냥 머리로 외운 말을 탁탁 끼워 맞추는 거예요. 컴퓨터로 쉽게 조합을 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잡지 편집부에서 '알아서 알맞게' 자를 말은 자르면서 기사로 싣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웬걸, 제가 들려준 이야기를 거의 모두 잡지에 담아 주셨습니다. 편집부 입맛으로 거른 이야기가 아닌, 제가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통째로 살린 이야기가 실렸어요.

잡지에서 표지 이야기 주인공으로 실리면 이럴 만할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잡지를 엮는 분들은 어떤 잣대나 틀로 가르기보다는, 살아가는 한 사람이 품은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뜻으로 이렇게 할 수 있을 테고요.

잡지 속그림. 1999년-2000년에 ㅎ신문 광고모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잡지 속그림. 1999년-2000년에 ㅎ신문 광고모델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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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표지 이야기 주인공이 된 잡지를 읽으며 두 가지를 놓고 잔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나는 '졸업장 안 따는 학교'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둘은 '사전이란 시를 쓰듯이 엮는 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말을 담은 그릇인 사전은, 기호나 수식이나 도표가 깃든 책이 아니라고 느껴요. 죽은 말이 아닌 산 말을 담는 그릇인 사전이라고 느껴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는 말을 그냥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과 살림과 사랑을 곱게 여미도록 북돋우는 말을 가리거나 살려서 담는 그릇이라고 느껴요. 사전 한 권이란 '말로 이룬 엄청나게 아름다운 시'가 모인 책일 때에 뜻있고 값있다고 느껴요.

그렇다고 어렵게 꼬거나 알쏭달쏭하게 뒤튼 시일 수는 없어요. 손수 짓는 살림을 수수하면서 투박한 손길로 상냥하게 담아낸 시일 때에 비로소 사전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듯 말을 받아먹을 수 있게끔 짓는 사전이리라 생각해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듯 말을 갈무리하기에 사전이 된다고 생각해요.

잡지 속그림.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사전이 발판이 되어 이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잡지 속그림.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사전이 발판이 되어 이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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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속그림.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이던 무렵 윤구병 님하고 일본으로 자료수집을 하러 가던 무렵 사진, 그 뒤 이오덕 님 유고를 정리핟던 무렵 사진.
 잡지 속그림.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이던 무렵 윤구병 님하고 일본으로 자료수집을 하러 가던 무렵 사진, 그 뒤 이오덕 님 유고를 정리핟던 무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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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 애들이 만화라든가 그런 걸 통해서 내성이 생기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그냥 경험 아닐까요?

최종규 :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 줘요. 저 사람들이 왜 저런 말을 쓰는가, 저 사람들은 저런 말로 책을 읽어 왔고, 저 사람들은 학교를 다녀서 저런 말을 써, 그건 저 사람들이 쓰는 말이야, 네가 읽은 책에서 나온 말들이, 그게 다 옳거나 좋은 말이 아닌 줄 알아야 해, 그건 그 사람이 쓴 그 사람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는 말이야, 너는 그 말을 모르지, 모르면 그걸 따라하지 말고, 네가 네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을 써, 네가 모르면 아버지 어머니한테 물어, 그럼 너한테 그 말을 풀어서 얘기해 주잖아, 풀어서 얘기해 주는 말을 쓰면 돼, 그리고 네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놀아도 돼, 네가 읽고 싶은 거 있으면 스스로 쓰면 되고.

인터뷰 끝자락에 '대학 졸업장 없어도 즐겁게 한국말사전 엮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처럼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으로도 얼마든지 책을 쓰거나 사전을 지을 수 있다는 모습을 이웃님한테 알려주고 싶어요. 대학입시로 고달픈 아이들한테도 '너희가 굳이 대학교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알려주고 싶기도 해요.

잡지 속그림. 인천에서 아직 살던 무렵 큰아이를 낳고 돌보던 어느 날.
 잡지 속그림. 인천에서 아직 살던 무렵 큰아이를 낳고 돌보던 어느 날.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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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속그림. 두 아이하고 고흥 시골마을에서 짓는 '도서관학교'에서 셋이 함께.
 잡지 속그림. 두 아이하고 고흥 시골마을에서 짓는 '도서관학교'에서 셋이 함께.
ⓒ 월간 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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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가야 길이 열리지 않아요. 길을 스스로 찾아야 길이 열려요. 이루려는 꿈을 품어야 이 꿈대로 길을 열어요. 스스로 지어서 이웃하고 나누려는 사랑을 그려야 이 사랑에 맞추어 길을 내고요.

작은 손길로 작은 시골에서 작은 사전을 지은 마흔 몇 해 걸음걸이가 잡지 표지 이야기로 나왔어요. 우리 삶터 골골샅샅에 작은 눈길로 작은 보금자리를 아끼며 작은 일을 사랑스레 하는 이웃님이 많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이 아름다운 이웃님 이야기도 잡지를 고이 빛내는 표지 이야기로 나올 테지요? 작은 씨앗 한 톨이 들려주는 작은 목소리가 흐르는 작은 마을에서 오늘 하루도 작게 꿈을 꾸면서 살림을 짓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태그:#퀘스천, #월간 퀘스천, #최종규, #숲노래,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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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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