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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 글쓰기가 너무 좋아 기자가 하고팠던 철부지 삼십 대는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기자 아카데미를 다니며 매일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서른 중반, 글쓰기가 너무 좋아 기자가 하고팠던 철부지 삼십 대는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기자 아카데미를 다니며 매일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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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 글쓰기가 너무 좋아 기자가 하고팠던 철부지 삼십 대는 낮에는 직장생활, 밤에는 기자 아카데미를 다니며 매일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그 시간조차 여유롭지 않아 빵을 입에 문 채 강의실까지 달려가기 바빴다.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 어려울 거라고 했다. 하지만 4개월 후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기자가 됐다. 언론대학원에도 입학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나는 이제 백수다. 기자생활 4년 차에 접어든 서른아홉, 이직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삼성전자 서초동 사옥 현장을 취재하고 오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후인 지난 2월 21일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그룹총수의 부재상태인 기업의 모습을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현장 취재를 너무나 좋아한 나는 모처럼의 르포 취재에 가슴이 뛰었다. 삼성의 민낯을 제대로 보고 오리라 맘먹었다.

삼성 출입기자가 아닌 탓에 취재원은 한 명도 없었다. 회사는 취재원을 소개시켜주지 않았다. 홍보 담당자 연락처도 받지 못했다. 소개해 줄 만한 취재원이 없는 건가 싶었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회사의 사정을 일일이 알 수는 없었다. '맨땅에 헤딩' 같단 생각도 했다. 그래도 현장 취재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오전 11시 서초동에 도착했다. 어디서부터 취재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삼성전자 사옥은 지하 1, 2층에 식당 등 매장이 입점해 있다. 삼성맨을 대상으로 직원할인을 적용하는 곳도 꽤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취재해야 했다.

우선 직원식당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 그곳은 12시가 넘어서자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외부인은 이용할 수 없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식당 입구에 표시된 메뉴를 보며 무얼 먹을까 고심하는 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늘은 엿볼 수 없었다. 기자는 일반 식당으로 옮겨 20~30대로 보이는 삼성 직원 다수가 식사하고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그들은 여행, 연인 등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다들 즐겁고 유쾌해 보였다. 계산하며 나오는 길에 식당 점원에게 분위기를 물었으나 "변화 없다"는 외마디뿐이었다.

"희한하죠. (매출이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부회장 구속 전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저희 매장 단골 대부분이 삼성 직원들이에요. 그런데 불안하거나 걱정하는 눈치가 전혀 안 보여서 놀랐어요. 처음엔 저도 이상해서 그들의 대화를 신경 써서 들었는데, 모든 게 평소랑 다를 게 없더라고요."

"(부회장 구속 이후에도) 매출은 그전과 같아요."  

몇 시간 동안 입점 업체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결과 알아낸 반응은 한결같았다.

단 한 곳, 삼성 직원만 이용할 수 있는 와인 매장만이 내방객이 줄었다는 답을 건넸다. 관계자는 "선물이 아닌 본인이 직접 즐기기 위해 구입하는 고객이 대부분인데, 내방객 70% 정도가 감소했어요"라고 밝혔다. 삼성 등 대기업 관계자와 오랜 기간 소통한 한 지인은 "그룹에 문제가 생기거나 분위기가 안 좋을 때 직원들이 몸을 사리는 방법 중 하나지만 괘씸죄에 걸리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산한 오후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됐다. 지하에 있는 직원식당 근처에 있으니 야근을 위해 식사하러 오는 직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메뉴를 고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신원을 밝히고 조심스레 분위기를 물었지만 언짢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흰 그런 거 몰라요. 묻지 마세요."

또 다른 이는 "죄송합니다"라며 자리를 떴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했다. 어쨌든 더 이상의 취재는 힘들어 보였다. 데스크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다짜고짜 삼성직원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워하느냐고 물었다.

전체적으로 평온하다고 하자 "지금 삼성은 비상체제로 밤샘과 야근도 불사하고 있을 것이니 사옥에 불이 다 꺼질 때까지 밤새워 지켜보라"는 말을 남겼다.

삼성 정도의 그룹은 직원이 모두 퇴근하더라도 불을 전부 끄지 않는다. 또 직원 대부분은 평온하더라도 해체된 미래전략실 등은 비상체제에 돌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지켜본다 한들 그들의 동태를 제대로 살필 수 없다. 취재원도 한 명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사옥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지켜보라는 지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불이 다 꺼질 일은 없을 거라고 하니 "자정까지 확인하고 가면 안 되느냐", "일단 퇴근했다가 밤에 다시 서초동에 가면 안 되느냐"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지시였다. 그럴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건 소설이지 기사가 아닙니다"

삼성전자 사옥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 모습.
▲ 지난 2월 21일 삼성전자 사옥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 모습.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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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는 밤늦도록 비상체제에 돌입한 삼성의 모습을 담고 싶은 눈치였다. 내키진 않았지만 외면하긴 힘들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이 깜깜해진 저녁 8시 즈음 불 켜진 사옥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퇴근했다. 저녁 8시를 비상근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비슷한 모습이라도 남겨야 했다. 

다음날인 22일 오전 7시 30분. 사옥 직출(현장으로 바로 출근함)을 전화로 보고하고 삼성 직원들이 방앗간처럼 들르는 카페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삼성맨들은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원두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거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들. 활기찬 오전 풍경에서 총수의 부재를 염려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기사의 방향을 정하고 데스크에게 취재를 마무리하겠다고 전했다. 그 순간 '불안과 혼돈, 당혹스러움에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삼성의 모습을 기사에 담으라'는 지시가 나왔다. 당혹스러운 건 나였다. 사실과 거리가 있는 정도가 아닌 완전히 반대로 기사를 쓰라는 건 보도윤리와 취재기자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소설이지 기사가 아닙니다."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음에도 강경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데스크는 로봇처럼 "불안과 혼돈의 모습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강경하기는 데스크도 못지않았다.

상사와 마찰을 이어 가봤자 좋을 게 없다 싶어 최대한 기사의 톤을 낮추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는 데스크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틀간 관찰한 모습, 팩트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싫었다.

다음날, 1면에 실린 르포 기사를 보고 기자가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쓰지도 않은 내용이 포함된 전혀 다른 기사가 떡하니 내 이름을 달고 있었다. 출근 모습을 전한 부분에는 '삼성은 국내 1위 기업의 위상을 다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다소 민망한 표현마저 보였다.

뒤늦게 언론계에 뛰어든 후 힘들 때마다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순진하고도 미련한 일념 하나로 버텨왔지만 그 기사는 치욕스러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기사를 쓰게 될까. 두려웠다.

데스크에게 말했다.

"삼성을 아예 찬양하셨네요?"

그리고 결심했다. 영혼 없는 기자는 되지 않기로. 


태그:#기사는소설이아니다, #언론사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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