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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현대는 늘 세기말이거나 말세의 모습
자비가 전혀 없는 정부의 방침과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공권력의 방법만 유상분배될 뿐
헌법의 요지는, 정부 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믿지말라는 것
부디 까불거나 대들지 말라는 것
억울하고 외롭게 죽고 싶지 않다면

평소, 국가와 정부를 무서워하던 삐딱한 사람들은
목숨만 겨우 챙겨 먼지처럼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승이 아닌듯한 머나먼 외계의 마을로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하다못해 벌레처럼 기어가거나 풀씨처럼 묻어간 경우도 있었다
거기 마을에서, 단 하나 뿐인, 단 한번 뿐인 한 평생을
풀이나 나무나 흙이나 질소처럼 살았다

삶의 겉모습은 마치 죽음의 완성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숨을 다 죽이고 살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평화로웠다는 말이다
일상의 소일거리는 주로 하늘에 떠 계신 하느님, 아니면 하나님이나
땅 속을 깊게 파고 누운 조상님을 믿는 짓
선생이나 선배, 그리고 군인과 공무원은 가급적 믿지 않았다
사실은 땅 위의 서로가, 땅위의 스스로를 믿었을 뿐

세월은 냇물처럼 흐르고 시간은 쏜 화살 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세월과 시간이 역사만큼 쌓이자 마을에 사고가 발생했다
완력과 욕심이 센 운동선수가 인상을 쓰고 주먹을 휘두르며
어서 마을을 국가와 정부로 재생하자고 선동하고 겁박했다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을사람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는 국민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나만 죽고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국가란 무엇인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완장의 신을 섬기는 정치인을 섬기는 유권자들은 상식이 있는지
돈의 신을 모시는 경제인을 모시는 봉급쟁이들은 염치가 있는지
학위의 신을 따르는 교수단을 따르는 학생들은 지성이 있는지
말의 신을 믿는 성직자를 믿는 신도들은 대체 제 정신인지
그런 것들을 내내 구세주로 알고 사는 국민들은 이성이 있는지
이따위 천민자본주의 간빙기의 애국적 사피엔스들은 과연 사랑이나 하고 사는지

아니, 도대체 왜 마을에서 그냥 마을사람으로 살면 안 되는지
왜 국가에서 국민으로 살아가려 그토록 기를 쓰는지
국가의 진실은 정말 무엇이고, 마을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 거의 미치거나 실신할 지경이다

24인의 마을주의자들은 하고 싶은 만큼 공동으로 생산해, 필요한만큼 분배받고 싶다.
▲ 마을주의자 24인의 마을주의자들은 하고 싶은 만큼 공동으로 생산해, 필요한만큼 분배받고 싶다.
ⓒ 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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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의자'는 어느 쪽인가, 누구 편인가

졸시 '국가나 마을이란 무엇인가' 전문이다. 마흔에 마을로 하방한 이후, 국민 이전에 마을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심정을 끼적거린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에서 이타적인 공동체주의자로 진보하려는 갈망을 담은 것이다. 마을에서는 때로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정치적, 사회적 각성이 시작된 청소년기부터 국가나 정부, 그리고 학교 같은 공권력과 제도권과는 친하지 않았다. 특히 국가나 정부를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국가와 정부의 특별한 지원이나 보호도 굳이 기대하지 않는다. "너는 대체 어느 쪽이며 누구 편인가" 묻는 폭력적인 말들에 대해서도 일체의 관심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답을 강요한다면 좀머씨처럼 "제발 나를 좀 가만 내버려두라"고 대답할 뿐이다. 

그렇다고 직업적인 무정부주의자나 반체제 운동가는 아니다. 굳이 성향을 분류하자면 청년기에는 회색분자이거나 자유주의자이거나 아웃사이더 쪽에 가까웠다. 조직적으로 앞장 서 나서거나 떼로 몰려다니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니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나 계획도 없다. 그러니 국가와 다투기 보다 아예 국가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처럼 지난하고 고단했던 40여년의 특별시 난민 생활을 접고 농촌마을로 하방하면서 '주의자'가 되기로 비로소 결심했다. 자유주의자도, 공동체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그저 '마을주의자'가 되기로.

여기서 '마을주의자'란 귀농인 또는 마을주민이 '마을시민'의 단계를 넘어 2차로 진화한 상태를 의미한다. 1차로 진화한 '마을시민'이란, '왜, 귀농했는지' 이제는 스스로 자각하고 자족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한다. 아울러 '뭘 해서 먹고 살지'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마을의 주민으로 먹고 살 자신감과 사회적 책무를 깨달은 상태이다.

'마을주의자'는 "왜 도시를 벗어나 귀농을 해야하는지" 남에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충분히 설명, 설득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만 챙기지않고, 남과 더불어 협동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이타적인 몸과 공익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마을공동체사업의 계획이 준비된 성숙한 귀농인 또는 마을주민을 말한다.

결국 '마을주의자(Commune-ist)'란 국가와 정부. 자본주의와 정치경제학의 구조악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다. 마을 속으로 뛰어 들어가,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부대끼며 생활하며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을 앞장 서 세우고 꾸린다. 사람 사는 대안마을을 일구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게 꿈이다.

머리는 도덕적이고 진보적이며 마음은 정의롭고 양심적이다. 말과 글은 용기있고 지혜로우며 슬기로우면서 행동은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이다. 곧 세상을 좀 더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꾸려는 사회혁신적인 인간이다. 이런 인간형을 기존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로 충분히 표현할 길이 없으니 '마을주의'라는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된 마을을 만들고 싶었던 ‘마을주의자’ 정기용건축가가 설계한 무주 진도리 흙토담마을회관
▲ 진도리 마을회관 자연과 사람이 조화된 마을을 만들고 싶었던 ‘마을주의자’ 정기용건축가가 설계한 무주 진도리 흙토담마을회관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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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정의(Justice)를 믿는 마을주의자

'마을주의자'들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 '공동체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을(Commune)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따르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믿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공유된 가치'와 '공동선'을 무시하거나 훼손하는 일체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반대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태와 보유한 가치가 그를 둘러싼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 조차 미처 자각하지 못한다. 자유주의자들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존재라고 공동체주의자들은 비판한다.

공동체주의는 마땅히 이기주의를 경계하고 배격하는 정치사상이다. 20세기 후반, 미덕, 덕성(virtue)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중심적 이론으로 제기됐다. 결코 이기주의가 미덕일 수 없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를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을 절충한 중도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공동제주의자들은 근대 개인주의의 보편화에 따른 윤리적 토대 상실을 고발한다. 고도 산업사회화에 따른 도덕적 공동체 와해도 경고한다. 나아가 이기적 개인주의 팽배에 의한 원자화, 사회적 인간의 몰락을 개탄한다.

공동체주의는 이같은 사회병리적 현상에 대한 불만이 이론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정치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를 지은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이 이런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이 책에서는 정의를 판단하는 세가지 기준으로 행복, 자유, 미덕을 들고 있다. 정의가 사회 구성원의 행복, 사회 구성원의 자유로움,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고찰함으로써 공동체주의를 정의와 연결한다. 공동체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정치학 교수 퍼트넘은 1995년 「홀로 볼링하기: 쇠퇴하는 미국의 사회자본」 논문을 통해 공동체의 몰락을 경고했다.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이 미국 민주주의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한 시민사회의 역동성이 붕괴했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볼링 리그, 일요일 피크닉 횟수, 학부모회 참석 비율, 투표율, 교사·학부모회의, 여성유권자연합의 조직구성원 수가 감소한 것 등의 현상을 공동체 몰락과 사회적 자본 감소의 물증으로 들었다.

이같은 퍼트넘의 "미국인들은 외롭게 볼링을 친다"는 걱정스럽고 우울한 주장은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의 연두교서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은 <마을이 있어야 한다(It Takes a Village)>는 책을 써서 안정된 작은 마을에서 나타나는 인간관계를 예찬하기도 했다. '정의와 사회적 자본'의 힘을 신뢰하는 공동체주의자는, 마을주의자와 사고하는 영역과 활동하는 동선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나 홀로 볼링’을 치는 소외된 개인들은 사회적 인간의 몰락과 공동체 해체의 단면
▲ 나 홀로 볼링 ‘나 홀로 볼링’을 치는 소외된 개인들은 사회적 인간의 몰락과 공동체 해체의 단면
ⓒ 페이퍼로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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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Anarchism)을 계승하는 마을주의자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 무정부주의자의 사전적 정의다.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은 "국가나 정부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국가나 정부가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무정부주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세력이 미치는 규모와 범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을주의'가 지향하는 세계관, 미래전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정부주의의 어원은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an archos)에서 연유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사회의 범죄는 사유재산과 권력의 산물로 규정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역설한다, "만약 인간이 법과 사회체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상호부조의 원리를 실천하게 된다면, 사회성과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마을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국가와 정부가 일방적으로 설계하고 지배하는 도시를 벗어나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일단 무정부주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이상사회에 있어서 집단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사적 소유를 긍정할 것인가,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등 3가지 관점의 차이로 종류가 나뉜다. 프루동, 톨스토이 등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 바쿠닌 등의 집산주의적 무정부주의,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 등으로 대별된다. 여기에  공상적 무정부주의와 과학적 무정부주의, 이론에 치중하는 철학적 무정부주의와 정치·사회적 실천방법까지 구상하는 혁명적 무정부주의로 더 갈래를 치기도 한다. 노동조합의 직접행동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19세기말의 혁명적 생디칼리즘(Syndicalisme)도 무정부주의의 일종이다.

특히 19세기에 최초로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의 이론과 주장은 마을주의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는 생산에 필요한 토지와 도구를 지배하는 '소유권'를 자유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다. 그가 그리는 이상사회(마을)에서는 자영농민과 독립적인 장인들로 구성되고 노동자연합체가 공장과 공공시설을 운영한다. '마을기업'을 연상시킨다.

이 사회는 인민은행의 상호신용체계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경제공동체이다. 마을시민가 마을기업을 지원하는 '지역공유 사회적자산은행'의 취지에 부합한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대신해 계약과 이해관계를 맺는 자치적 지역사회이자 산업연합체들의 연방이다. 바로 '대안마을'의 모습이다. 특히 바쿠닌의 혁명적 폭력론을 거부하며 개인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옹호했다. 사사로운 폭력으로는 혁명은 커녕 최소한의 발전도 불가능하다는 게 내 소신이다.

20세기에 톨스토이는 평화적 급진주의와 이성적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국가와 모든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고 도덕적 재생을 위한 생활의 단순화를 주장하고 실천했다. 재산의 사유 대신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옹호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톨스토이아 '월든'의 소로에서 이어받았다.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한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영향으로 자치적 촌락인 코뮌(Commune)을 기본단위로 하는 스와라지(Swaraji) 지방분권자치를 제안했다.

불의한 정부에 대해 시민 불복종과 마을자치(스와라지)를 주장한 마하트마 간디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불의한 정부에 대해 시민 불복종과 마을자치(스와라지)를 주장한 마하트마 간디
ⓒ 녹색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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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Communism)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마을주의자 

공산주의(Communism)의 어원은 '타인과의 나눔과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 '콤무네(commune)'에서 비롯되었다. 한마디로 공동체의 재산이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제도를 지칭한다. 이는 곧 재산의 사유에 따른 도덕성의 흠결을 방지하려는 공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한다. 원형은 국가설계 이데올로기라기 보다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공동체를 일구려는 소박한 이상에 다름이 아니다. 가령 19세기 초반 '사회주의' 개념이 등장할 때까지 공산주의는 고대로부터 전승된 재산공유제 원칙을 가리켰다.

공산주의 사상의 기원을 보면 플라톤의 〈국가(The Republic)〉, 고대 유대인들의 초대교회의 교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하여, 특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 최후의 단계로서 민중들의 계급이 소멸하고 생산력이 극도로 확대된 이상사회에서 의욕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다. 

그런데 현대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급진적 형태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가리키는 정치적 수사가 되었다. 1848년〈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를 공동 저술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인류역사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설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것이다.

이같은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에 만연된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 인간의 해방을 성취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 스탈린 등에 계승되어 혁명적 성향이 짙은 사상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조차 처음부터 유물론, 무신론에 사상의 뿌리를 둔 것은 아니었다. 인류사를 관류하는 공산주의적 공동체는 성서의 영감을 받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다만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여파로 정치적․사회적인 변혁기의 산물로 현대 공산주의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변형, 변용된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 마르크스나 레닌이 구상하고 설파했던 공산주의가 실현된 적은 사실상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공산주의 정부의 붕괴가 곧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는 집권층에 의하여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변질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따라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공동체의 생활철학으로서 공산주의의 원형과 이상은 작은 마을에서부터라도 다시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타인과의 나눔과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 '콤무네(commune)'에서 비롯된 정의로운 생활공동체의 소박한 이상을 '마을주의자'들은 다시, 새로 품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1848년, 공산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집필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강령적 문헌
▲ 공산당선언 1848년, 공산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집필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강령적 문헌
ⓒ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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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socialism)의 전망을 재생하려는 마을주의자

그러나 여전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개념과 사용법, 그리고 전망은 혼란스럽다. 당초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불평등·피해,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주요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토대로 경제생활을 국가의 계획적 통제 아래 두려는 이념 내지 사회체제로 정의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간주한다.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 등 기초생활권과 생존권을 보장해야 하고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부차이도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을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따로 또 같이' 재해석하고 적절히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애초 사회주의는 노동운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존 체제를 사회적 통제를 통해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사회 재조직의 이론이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원리였던 자유경쟁과 개인주의에 대항해 대안적 전망과 실천적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투쟁적인 노동운동의 세계와 실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사적 소유제의 철폐, 소유권의 공유를 주장하는 사회적 교리를 운동으로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즉, 공산주의가 실천적·강령적 성격이라면 사회주의는 분석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이론을 통해 미래 사회의 전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양한 '마을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보은 기대래 선애빌 생태공동체마을
▲ 보은 선애빌 다양한 '마을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보은 기대래 선애빌 생태공동체마을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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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사회주의는 부정과 저항의 표명을 넘어 적극적인 현실적 대안으로, 공산주의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를 거치고 먼 미래의 궁극에 도달할 수 지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쯤에서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한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 actually existing socialism)'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 체제와는 다른 의미의 사회주의 개념들이 과거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토대로 삼은 소련 공산주의 등 구좌파(Old Left)를 지칭하는 특정한 국가사회주의적 형태에 국한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미래의 대안적 이념으로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웨일스의 직물업자로서 공장개혁가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사례는 그런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언은 산업에 대한 공동협동통제와 '통일과 협동 마을'의 창설을 주장했다. 이 마을에서 주민은 수확고를 증가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같은 오언식 공동체는 인디애나 뉴하모니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의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운동도 실패했다. 그러나 경쟁체제에 대한 비난, 협동과 교육에 대한 강조, '불건전한 환경이 일으킨 어리석은 결과를 없애면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회주의 운동의 교훈과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있다. 가령 농촌지역에서 마을주의자들이 함께 벌이고 꾸리는 작고 낮고 느린 '공산.공유 사회경제적 생활공동체마을'의 모습으로.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사회 체제를 통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는 '마을'에서 가능하다.
▲ 행복사회 유럽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사회 체제를 통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는 '마을'에서 가능하다.
ⓒ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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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마을학개론(an introduction to Communology/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태그:#마을학개론 , #마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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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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