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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의병의 발상지'임을 뽐내고 있는 경남 의령
 '호국 의병의 발상지'임을 뽐내고 있는 경남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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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의령군으로 들어서면 곳곳에서 '의병' 두 글자가 아로새겨진 입간판과 깃발을 보게 된다. 입간판과 깃발들은 "호국 의병의 발상지"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같은 자부심을 강력히 나타내려는 의령 사람들의 의지는 박물관도 '의령 박물관'이 아니라 '의병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전국 대부분의 군이 자기 군의 이름을 딴 '** 박물관'을 가지고 있는 데 견주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의령 의병 박물관은 2012년에 개관했다. 그 이전까지는 의령에도 다른 군들처럼 평범한 이름을 한 의령 박물관이 있었다. 의령 박물관은 군민 문화회관 건물 안에 있으면서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각종 유물 등을 전시했다. 그러던 중, 보물 671호인 '곽재우 유물 일괄' 등 의병 관련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던 충익사 기념관과 내용을 합치고 새 건물을 완공하면서 의병 박물관으로 발전적 통합을 이루었다. 바꿔 말하면, 의병 박물관의 대표 전시실은 본래 의령 박물관의 자랑이었던 '고고 역사실'과 충익사의 정체성이었던 '의병 유물 전시실'이다.

'박물관'은 없고 '의병 박물관'만 있는 경남 의령

의병 박물관은 현관에서부터 이름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 의병장이 백마를 탄 채 답사자를 맞이한다. 그래도 의령 박물관 시절의 소장품들은 '고고 역사실'에 잘 보관, 전시하고 있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현관에 곽재우 기마상을 설치함으로써 의병박물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현관에 곽재우 기마상을 설치함으로써 의병박물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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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원시


선사(先史)와 원시(原始)는 다르다. 원시 시대는 사유 재산과 계급이 생겨나지 않았던 석기 시대를, 선사 시대는 역사가 기록되기 전의 시대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역사는 기원전 91년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기록되었다.

고고 역사실에는 선사 시대 유물, 의령군 용덕면 운곡리와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 등 가야 시대 유물, 그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로 이어지는 각종 유물과 전적류 등이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의병 유물 전시실에는 보물 671호로 지정된 장검, 말안장, 팔각대접 등 '곽재우 유물 일괄'과 윤탁, 오운, 이운장, 강언룡, 안기종 등 모두 열여덟 명 장군과 관련되는 유물,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조선 관군 및 의병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국의 의병을 대표하는 박물관' 자부

의병 박물관은 스스로 '전국의 의병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자부한다. 누리집은 '의병 박물관은 의병의 역사와 기록들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경상우도 의령 지역의 곽재우 의병부대의 활약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면서 '단순히 유물 나열형의 보여주기 식 전시가 아닌 각종 관련 영상이나 모형, 디오라마 등을 통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박물관으로 거듭남으로써 많은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라고 소개한다. 

홍의 장군 기마상 오른쪽의 의병 유물 전시실로 들어서면 답사자를 위한 '관람 이동 동선'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우회전을 하지 말고 정면으로 나아가면서 관람하라는 화살표가 붙어 있다.

 1. 임진왜란 소개
 2. 18 장군 상징 조형물
 3. 임진왜란사, 의령 지역 의병 활동 영상
 4. 임진왜란 및 의병 관련 유물
 5. 복식 및 무기류
 6. 18장군 정보검색대
 7. 망우당 곽재우 ZONE
 8. 의를 부르는 붉은 북소리 영상
 9. 의령 지역 의병 관련 유물
10. 정암진 전투 모형
11. 경상우도 의병 배치도
12. 영산 전투 영상
13. 나라 지킴이 결의서 및 방명록

목록만 훑어보아도 의병 박물관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는지 잘 확인된다. <1. 임진왜란 소개>의 일부에 해당되는 '임진왜란 의병 기록'을 읽는다. 이 게시물은 옛날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임진왜란 관련 문장들을 골라서 보여준다.

서행


보통 서행은 서(西)쪽으로 갔다(行)는 뜻이다. 본문의 서행(西幸)도 서쪽으로 갔다(幸)는 뜻이다. 행의 한자가 다른 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임금이 갔기 때문이다. 행(幸)에는 '임금의 움직임'이라는 뜻이 있다.

사례로는 <선조실록> 1595년 1월 10일자에 '이산해가 서행(西幸)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1596년 1월 21일자에 '임진년에 임금의 수레가 서행(西幸)한 이후'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서행은 선조가 관서(關西) 지역으로 피란 간 일을 말한다.

관서는 서울을 지키기 위해 철령에 설치한 철령관의 서쪽 지역으로, 평안도 일대를 가리킨다. 관북은 함경도, 관동은 강원도이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백광홍의 <관서별곡>같은 제목은 글이 어느 지역을 다룬 기행문인지 알게 해준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서행하여(관서 지역으로 가서)  나라 안이 텅 비고 적군으로 가득 찼다. 조정의 명령이 전해지지 않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한 달이 넘었다. 영남의 곽재우·김면, 호남의 김천일·고경명, 호서(충청도)의 조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원근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격문을 전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생겼다. 각 고을의 선비 가문들이 곳곳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니 의병장이라 칭하는 자가 무려 몇 백에 이르렀다. 이로써 왜적을 무찔러 나라를 회복하였으니 곧 의병의 힘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 중에서'

이수광은 "일본군이 나라를 거의 점령하면서 조정의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격문을 배부하니 백성들에게 나라를 위해 싸움터로 가려는 마음이 생겼다. 몇 백 명에 이르는 의병장들이 왜적을 무찔러 나라를 회복했으니 이는 곧 의병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대의  임금 선조의 무덤. 경기도 구리에 있다.
 임진왜란 시대의 임금 선조의 무덤. 경기도 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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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조수정실록> 1593년 6월 1일자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수정실록은 '명망 있는 선비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의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들이 격동하여 인근에서 이에 응모하였다'라고 말한다. 의병장들이 스스로 창의를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명을 받고 일어섰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모든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일어난 것 같이 기술하고 있으나 관군도 조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장이나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기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의병이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자발적인 의병의 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의병 창의는 임금이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다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나라의 보살핌을 받은 지 200년이나 되었지만(1392년 조선 건국) 나라가 위급한 상황인데도  모두가 자신을 보전할 계책만 세우고 나라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제 나(곽재우)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 나라 300 고을에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모양이 되니,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 조경남 <난중잡록> 중에서'

의병을 일으킬 당시 곽재우의 마음을 전해주는 기록이다. 곽재우는 "모두들 자기 한 몸만 살피고 나라의 위기는 외면하고 있으니 줄곧 가만히 있다가는 앞으로 영원히 역사의 비난을 들으리라……." 하고 말한다.

경북 안동의 '학봉(김성일) 기념관.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사이에 빚어진 갈등을 잘 조정했고, 조정이 곽재우를 의심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경북 안동의 '학봉(김성일) 기념관.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의병장 곽재우 사이에 빚어진 갈등을 잘 조정했고, 조정이 곽재우를 의심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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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의 창의에 대해서는 1592년 6월 28일자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장계가 특히 볼 만하다. 초유사는 전쟁이나 반란 등 위기 상황 때 임금의 특명에 따라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이다.

김성일은 선조에게 보고한다.

'본도(경상우도)가 함락된 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도망치거나 패전한 병졸들만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높고 낮은 이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의병에)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근래 고령에 사는 전 좌랑 김면, 합천에 사는 전 장령 정인홍이 그의 동지인 현풍에 사는 전 군수 곽율, 전 좌랑 박성, 유학 권양 등과 더불어 향병(의병)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굉필을 주벽으로 모시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에는 곽율, 곽승화(곽재우의 고조부), 배신 등을 모시는 별사가 있었다.
 김굉필을 주벽으로 모시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에는 곽율, 곽승화(곽재우의 고조부), 배신 등을 모시는 별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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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은 정예병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고을의 가장(假將) 손인갑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우고 있고, 삼가에 사는 훈련 봉사 윤탁, 전 봉사 노흠도 의병을 일으켜 서로 응원하려 합니다.'

'김면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병사들을 모집했는데, 적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왜적들이 패전하여 달아나므로 10여 리를 추격하여 거의 대첩을 거두려는 찰나에 적의 복병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놀라 퇴각하였습니다.'

'순찰사(경삼감사 김수를 가리킴)가 전 현령 조종도를 소모관(의병을 모집하는 관리)으로 삼으니 제법 많은 인민을 불러 모아 여러 일들을 수습하였습니다. 또 의령에 사는 고(세상을 떠난) 목사 곽월의 아들인 유생(벼슬이 없었다는 뜻)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왜란 발발 소식을 듣고는 재산을 다 쏟아 부어 의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最先起軍)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무기와 군량을 챙겼습니다.'

의령군이 제작한 홍의장군 마스코트
 의령군이 제작한 홍의장군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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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합천에는 정대성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 합천군수 전현룡은 곽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급히 보고한다. 감사와 병사는 군사를 보내 정대성을 잡아 참수한다. 그 여파로 곽재우의 의병들도 흩어진다.

관찰사의 감사 담당관 격인 도사 김영남이 '곽재우는 도적이 아니다'라고 김수에게 말한다. 김수는 김성일에게 곽재우를 '타일러(招諭)' 줄 것을 요청한다. 김성일이 공문을 보내자 곽재우는 단성현(경남 산청 단성면)으로 온다. 김성일은 곽재우를 돌격장으로 임명하여 왜적들을 공격하게 한다.

경상감사와 곽재우의 갈등을 해결하는 김성일

김성일은 선조에게 '그렇게 하였더니 곽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상의와 하의를 따로 만들어 허리에서 연결시킨 옷)을 입고서 의령현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누비며 왜적들을 공격하니 적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고 피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고 전했습니다'라면서 '의령 한 고을이 곽재우에 힘입어 편안해졌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김성일의 장계 뒤에 자신의 의견을 붙여두었다. 사관은 '곽재우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最先起兵者). 왜적들이 (의령) 정암진을 건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킬 때 김수가 싸우지 않고 퇴각한 것에 분노하여 격문을 보내 김수의 죄를 일일이 따지면서 그를 죽이겠다고 했다(김수가 김성일에게 곽재우를 '타일러 달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사관은 김수의 터무니없는 행동을 조롱한다. 사관은 김수가 곽재우를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곽재우의 창의를 마치 역적 행위처럼 말했다고 본다. 그 결과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일을 결정한 최고 기관인 비변사에서도 재우의 본마음을 모르는 채 그를 의심하였다.

사관은 '김성일이 곽재우를 저지하지 않았으면 김수는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김수가 산음현(경남 산청)에 있다가 곽재우의 선봉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가면서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경상도 사람들은 "김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곽재우에게 겁먹었다"라며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경남 의령 의병 박물관
 경남 의령 의병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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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는 앞의 두 예문 외에도 곽재우와 관련되는 옛날 문헌의 기록들을 담은 게시물이 다섯 개 더 걸려 있다. <기재사초>, <망우당 문집>, <광해군 일기>,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이 그 출처들이다. 하나씩 차례대로 읽어본다.

'곽재우가 "적들이 이미 육박해 오고 있으니, 이대로 있으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는 적의 포로가 될 것이오. 고을 안에 싸울 수 있는 젊은이가 수백 명이나 있소. 만약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정암진에서 저들을 막는다면 우리 마을은 지킬 수가 있을 것이오. 어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린단 말이오?" 하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 박동량 <기재사초>, 정암진 전투를 앞둔 곽재우 장군의 심정'

'곽재우는 임진왜란 초에 필부(벼슬이 없었다는 뜻)로서 군대를 일으켜 정진을 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하였는데, 여러 차례 적의 기세를 꺾어 정진 건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적은 위대합니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휘하가 적에게 몰리면 반드시 힘을 다해 구출한 다음 자신이 그 뒤를 엄호하여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졸들이 모두 그의 쓰임이 되기를 좋아하며 그를 믿어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산성을 지킬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군졸들이 그를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였습니다. 곤수(병사, 수사)가 되어서는 번(군대 복무)을 교대하는 모든 군졸들을 어버이같이 사랑하여 병사들이 "번을 서도 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고생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명장은 곽재우 한 사람뿐입니다. - <광해군 일기> 1608년 8월 13일 윤근수의 보고 중'

<망우당 문집>의 국역본 <국역 망우 선생 문집>(1996, 경충재 발간)의 표지
 <망우당 문집>의 국역본 <국역 망우 선생 문집>(1996, 경충재 발간)의 표지
ⓒ 경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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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는 일개 서생(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을 때 죽기로 맹세하고 힘을 다하였는데, 임진년 이후 정암진을 지켰고, 정유재란 때에도 화왕산성을 지켰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곽재우를 장수들 중 으뜸이라 합니다. - <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2월 16일 비변사 건의문 중'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려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도 맞출 수 없었다. 충의롭고 곧고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여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경상도 남쪽)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1681년(숙종 7)에 편찬된 곽재우(1552∼1617)의 문집 <망우당 문집> 중 '진시폐소'의 한 대목도 소개되어 있다.

'아! 백성이 편안한 다음에 나라가 부강하며, 나라가 부강한 다음에라야 군사가 강해지며, 군사가 강해진 다음에라야 적군을 방어할 수 있으며, 적군을 방어할 수 있는 다음에라야 나라가 중흥될 수 있습니다.'

'진시폐소(陳時弊疏)'는 계속 관직을 권유하는 광해군에게 곽재우가 사양의 뜻을 나타내면서 현(時) 정치의 잘못(弊)된 점에 대한 자신의 다섯 가지 생각을 펼친(陳) 의견서(疏)이다.

첫째, 건축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하는 일을 중지할 것.
둘째, 은(화폐)을 함부로 다루지 말 것.
셋째, 충신들의 의견을 잘 들을 것.
넷째, 명나라 사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 것.
다섯째,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받는 등) 은혜를 베풀 것.

곽재우가 기거했던 경남 창녕 도천면 우강리 931 망우정(사진의 비각 뒤편에 지붕이 보이는 건물, 복원) 터에는 곽재우 유허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진은 망우정과 유허비가 홍의장군의 전쟁터 중 일부인 낙동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풍경.
 곽재우가 기거했던 경남 창녕 도천면 우강리 931 망우정(사진의 비각 뒤편에 지붕이 보이는 건물, 복원) 터에는 곽재우 유허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진은 망우정과 유허비가 홍의장군의 전쟁터 중 일부인 낙동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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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폐소'에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곽재우는 "신은 곡식을 먹지 아니한 지 여러 해 되었사온지라 고요히 산속에 살면서 배고프면 솔잎을 따먹고 목마르면 샘물을 마시며, 밝은 달을 벗하고 맑은 바람을 짝 삼아 연기와 노을 속에서 소요하면서 속세의 일에는 뜻이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유소명(有召命, 임금의 부르심이 있어)'이라는 시로도 나타내었다.

九載休糧絶鼎煙 9년 동안 밥 짓는 연기 피우지 않았는데
如何恩命降從天 어찌하여 어명이 하늘에서 내려왔을고
安身恐負君臣義 몸 편하려니 군신 의리 저버릴까 두렵고
濟世難爲羽化仙 나라 위해 일하려니 신선 되기 어렵네

곽재우는 51세인 1602년 이래 대구 비슬산에 들어가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 세상에 나왔을 때에도 창녕 망우정(忘憂亭) 정자에서 거처했고, 타계하는 1617년까지 거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非賢非智又非禪 현인도 지인도 아니고 선승도 아닌데
栖息江間絶火烟 강가에 살면서 익힌 음식 먹지 않네
後人若問成何事 '무엇을 했느냐'고 뒷사람이 묻거든
鎭日無憂便是仙 진종일 근심 없었으니 '신선이었다' 하라 (계속)

덧붙이는 글 | 기사가 길어서 나누어 씁니다.



태그:#의병박물관, #곽재우, #홍의장군, #정암진,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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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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