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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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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역사 선생님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스타강사 설민석씨의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발언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논란이 되자 설씨는 자신의 SNS에 자신의 표현이 과한 점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24일 공개 질의서를 통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손병희 선생 후손 측은 지난 22일 설씨를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고소했다. 의암 손병희 기념사업회는 고소장에서 설씨가 방송과 인터넷 강의 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이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다'거나 '손병희가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 마담 주옥경과 사귀었다'는 등의 표현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해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의암 손병희 기념사업회와 설씨의 법적 분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사실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난 22일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 연구위원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스타 역사 강사 설민석씨의 민족 대표 33인 태화관 룸살롱 발언이 논란입니다. 설씨의 사과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손병희 선생의 후손은 설씨를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는데, 어떻게 보세요?
"그랬죠. 저는 법률가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사자 명예훼손의 경우에는 허위사실로 사자 명예를 훼손했을 때 해당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볼 때 내용상으로 설씨가 한 말 가운데 사실이 아닌 경우가 여럿 있거든요. 그래서 법률적으로 다소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표현의 자유 더 나아가 학문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죠. 설씨가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분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건드리는 문제라서 미묘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 관련 서적 또 대중적으로 영향이 큰 서적에 대해서 명예훼손으로 법원에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설씨가 일정 부분 잘못한 부분이 있어서 진솔하게 사과를 하고 이 문제를 잘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 표현의 자유라고 하셨는데 후손 측은 왜곡이라고 주장하거든요. 왜곡과 표현의 자유는 다르잖아요.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엔 한계가 있고 명백히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죠. 그런 전제하에서 보면 설씨가 동영상 강의나 책에서 쓴 표현 가운데 문제가 있는 부분은 사실과 다른 점이 보입니다. 그 부분을 설씨가 진솔하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유족 측은 그걸 받아드려서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가는 건 피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 그럼 17일 즈음 설씨가 SNS 올린 글은 사과로 인정을 안 하시나요?
"SNS에 올린 내용을 봤지만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가 된 동영상이나 책은 회수한다든지 하는 좀 더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이 빠져서 아쉬웠고 말로만 하는 사과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 설씨가 학원 강사 출신이잖아요, 재밌게 표현하려다 보니 나온 발언 같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보세요?
"강의를 재밌게 하고 책을 재밌게 써서 대중이 역사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점에 대해 설씨 문제의식에 동의해요. 하지만 재밌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죠. 재밌게 하려고 욕을 하면 안 되잖아요. 이 경우 욕은 아니지만,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입에 담으면 안 되는 표현을 몇 번 썼거든요. 거기에 33인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에 대한 평가와 이에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에 표현을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역사를 공부해서 가르치지만 어떤 땐 학생들 앞에서 막된 표현을 쓰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그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통쾌하고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재밌게 하는 것과 동시에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설씨의 경우는 재밌게 바라보는 문제에만 집착했지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문제는 다소 소홀히 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어요."

- 설씨가 표현이 지나쳤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만 태화관부터 짚어보죠. 태화관은 설씨의 주장과 달리 고급 음식점이죠. 그러나 구한말이면 거기에는 기생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러면 우리가 아는 룸살롱과 차이는 뭐죠?
"기본적으로 다르죠. 태화관은 요릿집으로 알려졌는데 고급 요릿집입니다. 태화관을 만든 사람은 안순환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궁중에서 왕이 먹던 음식을 책임지던 사람이에요. 궁중에서 나오면서 대령숙수라는 궁중의 남자 요리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만든 요릿집이 명월관이라는 요리집입니다. 태화관은 명월관 분관으로 만든 요릿집입니다. 태화관도 마찬가지로 고급요릿집이죠. 즉 일반인은 평소 먹을 수 없었던 궁중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비싼 가격에 제공하는 요릿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룸살롱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에요.

그리고 고급요릿집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사람의 수발을 들고 흥을 돋우는 여성들이 있었죠. 기생들이 그런 역할을 했는데 이때 기생은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니라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시도 써요, 요즘 기준으로 하면 연예인이죠. 당시 기생 등급 분류에 비추어 보면 태화관에 나가는 기생은 몸 파는 창기가 아니라 가무를 하는 기생이죠. 그렇기 때문에 태화관은 룸살롱이고 거기에서 시중을 드는 기생이 마치 룸살롱 호스티스인것처럼 묘사한 건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사실 설씨 책에서 문제라고 제가 생각한 건 기생에 대한 편견입니다. 창기의 경우 몸을 파니 부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지만, 기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기생 가운데 독립운동 한 분도 많이 나왔습니다. 3.1운동 당시 기생들의 만세시위는 꽤 유명합니다. 광주학생운동 때도 평양 기생이 만세시위를 했고 기생들 가운데는 자기가 번 돈을 독립운동하는 데 후원한 경우도 있고 의열단을 후원한 기생도 있습니다. 기생 집단은 만만히 볼 집단이 아닌데도 기생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어요. 기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거죠."

- 그것도 친일의 잔재가 아닌가 합니다. 보통 기생은 몸 파는 거로 알잖아요.
"역사학에서는 식민지 공창제라고 하는 데요.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들여왔죠. 몸 파는 기생을 창기라고 부르는데 마치 기생이 몸을 파는 존재인 것처럼 일반화된 거죠. 잘못된 겁니다. 그리고 기생 가운데 몸 파는 기생이 나온 것도 식민지 영향이죠. 그런 점에서 기생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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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희 선생의 셋째 부인인 주옥경 씨에 대한 부분도 있는데 주씨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평안도 출신입니다. 당시 평양에 기생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모양입니다. 명월관에 출입하며 손병희 선생과 만나 그의 셋째 부인이 되면서 기적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손병희 선생의 부인이 된 뒤에는 더 이상 기생이 아닌 거죠.

손병희 선생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이 1919년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어 감옥에 있을 때 뒷바라지를 했고 감옥에서 병을 얻어 거의 죽은 몸으로 풀려나오니까 옆에서 죽을 때까지 수발을 들었어요. 또 죽은 다음에는 수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기생 출신이라고 단순하게 볼 수 없는 게 천도교 안에서도 손병희 선생 부인으로 인정해서 내 수단이라는 천도교의 여성단체를 주도적으로 만듭니다. 천도교 안에서 가장 높은 명예직이 종법사라는 건데 주씨는 종법사 지위까지 오릅니다. 쉽게 말해 설씨가 룸살롱 마담이라고 한 건 과도한 거죠."

- 설씨는 민족 대표 33인 중 대부분이 변절했다고 해요.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은 3명뿐이라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변절한 것으로 아는데 왜 그럴까요?
"33인 가운데 변절한 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천도교의 최린, 기독교의 정춘수, 박희도 등 3명입니다. 변절의 사전적인 의미는 지조를 꺾었다는 건데 그런 의미로 본다면 독립운동을 포기한 사람들도 변절했다고 볼 수 있겠죠. 실제로 33인 중 천도교나 기독교 쪽 일부 인사들은 출옥 후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순수한 종교운동을 벌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런 분들조차도 변절했다고 보면 변절자가 늘어나지만 그분들은 변절했다기보다는 민족운동에서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간 거죠. 변절했다는 건 친일했다는 것인데, 그건 3명입니다. 3명을 가지고 33인이 변절했다고 하는 건 과도하죠.

예전에 그런 얘기가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3.1운동을 이해할 때 33인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거든요.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엔 3.1운동을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쉽게 말해 33인은 진짜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은 목숨을 바쳐가며 만세시위를 부른 사람들이라는 거죠. 기록에 의하면 6-7천 명이상이 만세 시위를 부르다 죽었다고 해요. 당시 즐겨 쓰던 용어로 민중이죠. 민중이야말로 3.1운동의 주역이라서 33인 대신에 민중을 3.1운동의 주역으로 보자는 얘기가 많았어요.

그리고 33인을 비판적으로 보는 얘기가 나와요, 뭐냐면 '33인 가운데 변절한 사람도 나오고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간 사람도 있으니 33인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늘 칭찬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33인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졌죠. 그 과정에서 변절 얘기가 나오고 그게 확대되어 마치 33인이 대체로 변절한 것처럼 잘못 인식되었는데 그건 아닙니다. 끝까지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은 일찍 사망했지만, 한용운 선생이나 이승훈 선생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거든요. 일부는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갔고 극히 일부는 변절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과 맞습니다."

- 설씨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더 저항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총감부에게 연락을 해서 투옥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어요. 또한, 설씨는 해명 글을 통해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역사라는 학문의 특성상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며 "민족대표에 대한 비판적 견해 역시 존재 한다"고 주장하던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1980년대 중반 이후에 3.1운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33인이 민중과 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태화관에 가서 따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잘못이란 거죠. 당대엔 어떨지 모르지만, 후대 역사 연구자 판단으로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해요. 더군다나 경찰에 전화해 '우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니 어떻게 하시오'라고 한 건 잘못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죠, 그건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서술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설씨 얘기가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갖는데 그렇다고 33인이 투항한 것처럼 쓰는 건 과도하다는 거죠.

지금 3.1운동을 설명할 때 상당수 사람이 동의하는 건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33인은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도화선 역할을 했고 그 도화선을 이어받아 실제로 폭발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운동에 참여한 민중이라는 겁니다. 즉 33인과 민중의 역할은 달랐고 양쪽 모두 각각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하는 거죠. 덧붙이자면 33인 가운데 여럿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우리가 독립선언을 했지만, 실제 독립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거든요. 이것도 얼마든지 비판의 여지가 있죠. 33인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러나 비판을 하더라도 사실에 근거해서 비판해야 한다는 거죠. 설씨가 비판하려는 건 본인의 자유인데 비판의 강도나 방법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 33인을 민족대표라고 부르는 데 대표성이 있냐는 지적도 있어요.
"물론 대표성에 대해 논란을 일으킬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민족 모두가 모여 대표를 선출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 천도교, 불교 대표 몇 명이 모여 스스로 민족 대표를 자처했기 때문에 시비를 걸 수 있어요.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종교계가 먼저 치고 나선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을 유일하게 갖춘 게 교회와 학교였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단체 활동도 무단 통치 하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나마 종교와 학교는 조직이 있었죠. 그러니 교회와 학교 중심으로 3.1운동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계가 나서서 한 거죠. 3.1운동에 앞서서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데 그것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겁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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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너뷰'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