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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추첨 민주주의 강의>(이지문 지음)를 '민주주의 여신과의 가상 대화'로 꾸민 것이다. 이 글이 민주주의 담론의 대중화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가꾸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기자말

지난 5개월 동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 항쟁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박근혜 없는 봄'이 된 지금은 비록 광화문 광장에 모이지 않더라도, 촛불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과 함께 외쳤던 정치 개혁, 재벌 개혁, 언론 개혁, 검찰 개혁의 목소리가 여전히 뜨겁다.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 분출된 시민 주권 강화의 요구도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많은 시민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촛불 항쟁이 '지금도 진행 중'이며 '장기전'이라고 여기고 있다.

촛불 항쟁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촛불 항쟁의 고갱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갱신과 쇄신의 요구라고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의 한계는 무엇이고 그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지 돌아보는 것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를 더욱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마치 민주주의 여신에게 간곡하게 신탁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는 심정으로, <추첨 민주주의 강의>라는 책을 보며 우리의 상황을 돌아본다. 아래는 <추첨 민주주의 강의>의 핵심 내용으로, '민주주의 여신'과 '참된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시민'의 대화를 통해 현재 우리 상황을 살펴보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을 찾고자 한다.

[관련기사 : 촛불 항쟁의 요구, 투표함 속으로 봉인?]

대한민국 대표자는 50대 이상 전문직 남성?

이지문 지음 <추첨민주주의 강의>
 이지문 지음 <추첨민주주의 강의>
ⓒ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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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여신이여, 지난주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로 대화를 나눈 이후 다시 뵙습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의제를 핵심으로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의 시스템은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한국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죠.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다들 겪고 느끼다시피,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과 국회가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해 짜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상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선거라는 제도 자체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39쪽)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선거 자체에 대해서 찬찬히 따져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기술과 자원을 동원하는 데는 사회경제적으로 특정 계층에 속한 사람이 유리합니다. 쉽게 말해, 선거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하죠. 그러니 당선자는 사회의 주류인 상위 계층, 남성, 장년층 위주로 편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대표자가 특정 사람들 위주로 구성되니, 전체 국민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이어질 수밖에 없죠.(58쪽)

고대 그리스에서도 선거로 선출했던 관직은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귀족에게 주로 돌아갔습니다. 현실을 돌아보면, 출마의 자유를 통한 공직을 맡을 수 있는 평등의 보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 수 있죠."

- 선거는 사회 주류 세력에게 유리해서 대표성의 왜곡을 일으켜 문제이기도 하지만, 치자와 피치자의 유사성을 해쳐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죠.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의회는 사회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의회는 국민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국민의 정확한 초상화,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회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반영하는 대표성을 갖춰야 마땅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죠. 대한민국 국회를 봅시다. 300명 의원 중 여성 국회의원은 약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2015년 기준) 연령 구성을 보자면, 300명 의원 중 30대는 약 3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학력 면에서 보면, 서울대가 절반 가까이 차지합니다. 직업으로 보면, 직업 정치인과 법조인이 많습니다. 이렇듯 국회는 성별, 연령별, 학력별, 직업별 대표성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대표성이 불균형해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 및 계층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심각합니다.(59쪽) 국회는 전체 국민을 위해 작동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국민의 대표기관이라기보다는, 힘 있는 소수집단의 이해나 자신과 소속 정당의 이익에만 더 매몰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죠.(62쪽)

나아가 이는 공공선 추구의 기반 자체를 해칩니다.(59쪽) 특정 집단 위주로 구성되어 힘 있는 소수의 목소리만 대변되니, 되려 사회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라는 비판까지 나오죠."

- 선거에 대한 비판이야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민주 시민 교육이라는 역할을 선거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민들은 선거 때가 되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과연 선거는 시민 의식을 기르는 데 적합할까요? 존 스튜어트 밀은 일찍이 '시민이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 정치적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습관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몇 년에 한 번씩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은 국민들의 지적 도덕적 수준을 결코 향상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회학자 슘페터 또한 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역할은 마치 시장에서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정치 시장에서 자신을 잘 홍보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 대중은 정책 결정의 적극적 참여자이자 능동적인 주체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선거판의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렇게 단지 소비자로 전락함으로써 시민 덕성을 함양할 기회도 사라져 버리지요.(76쪽)

지금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정치, 말꼬리 잡는 시비, 네거티브 전략, 지지율 경마 중계식 보도 등 부정적인 모습들이 잔뜩 뉴스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선거가 오히려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누적시키고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낳는 거죠.

그래서 선거가 반복될수록 투표 참여조차 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투표율이 계속 떨어지는 일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그것은 바로 선거 자체가 가져온 문제입니다. 선거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드는 요소라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유럽에서도 선거를 넘어서는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대표제의 불완전성은 '국민 주권의 불완전성'으로 이어져

- 만약 선거 자체가 그토록 문제라면, 그것은 국민 주권마저 심각하게 문제 삼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맞습니다. 루소의 유명한 말도 있지요. '국민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며 대의제를 신랄하게 비판했지요. 이렇듯 대의제에서 과연 국민 주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한국의 철학자 고병권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대의제는 '신비로 가득 찬 제도'라고 조롱하며, 그것은 '국민 주권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 그 얘기는 지난 번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두고 대화할 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표성의 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좋지 않을까요?
"물론 소선거구제보다 비례대표제가 훨씬 더 바람직하죠. 선거 제도 개혁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소선거구제를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같은 방식으로 개혁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엘리트 중심의, 정당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6쪽)

비례대표제를 도입해도 다양한 사회 경제 계층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대표하지 못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81쪽) 대의되지 않는 존재, 대의될 수 없는 존재들이 여전히 체제 밖에 남게 되죠.

근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표를 어떻게 선출할지 되짚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85~86쪽)"

- 그렇지만 선거를 대신할 대안이 있습니까?
"본래 민주주의의 주된 방식이었지만 한동안 잊힌 방식인 '추첨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민주주의=선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추첨 또한 유용한 공직자 선출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추첨 민주주의? 그게 뭡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민들 중에서 추첨(제비뽑기)으로 선출하여 공적 영역에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추첨 민주주의입니다.(19쪽) 이는 시민 누구나 돌아가면서 공직을 맡게 하는 방식이죠. 사회 구성원 누구나 골고루 돌아가면서 공직을 맡기 때문에, 추첨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가 하지 못하는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보장합니다.

또한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고 있는 정치권력을 모든 계층에 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바로 추첨 민주주의입니다.(86쪽) 따라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더 잘 보장할 수 있게 됩니다."

- 추첨으로 대표를 선출하자는 주장이 당황스럽습니다. 추첨 민주주의의 사례를 소개해 주면 좀더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 어떤 실제 사례가 있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선거'라는 공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합니다. 민주주의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알고 있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거의 모든 공직자를 뽑는 데 추첨을 사용했습니다.(16쪽)

아테네의 국가 기구인 시민평의회, 시민법정, 행정관의 구성원을 선택하는 데 추첨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들 기구는 오늘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해당하는 아테네의 최고 권력 기구였는데, 이들 구성원을 모두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추첨 민주주의는 본래 민주주의의 원형이라고 부르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요체였던 것입니다.(7쪽)

고대 그리스 민주정만이 아닙니다. 중세 도시국가에서도 의회 의원 선출에 있어 추첨을 널리 사용했습니다. 일찍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선거는 귀족적, 추첨은 민주적'이라고 말한 바 있죠. '민주주의=선거'라는 근대의 상식은 어쩌면 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의 편견' 또는 '근대의 왜곡'일 수 있습니다."

추첨 민주주의는 대표성의 왜곡 바로잡고 창의적 지혜 발현

-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공직 선발 방식이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었다니, 이는 마치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다가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커다란 충격입니다. 왜 공직 선발에 있어 추첨을 널리 사용했습니까?
"평등한 정치 참여를 통한 시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란 다스리는 것과 다스림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라며 민주정의 기본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공직을 맡을 기회를 실질적으로 동등하게 가져야 하는데, 추첨이 이것을 보장하지요.

또한 추첨은 대표성의 왜곡을 바로잡고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보장합니다. 추첨으로 뽑으면 특정 집단만 대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골고루 대표가 되지요. 대의되지 않는 자,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 목소리가 없는 자를 체제 안으로 받아들여 사회 통합과 공공선 추구에도 효과적입니다.

나아가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는 시민의 덕성을 기르고, 정치 효능감을 증진시킵니다. 게다가 막대한 선거 비용이 들지 않아 매우 경제적이기까지 하죠."

- 추첨이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추첨으로 구성된 집단이 뛰어난 결정이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한 집단이 뛰어난 결정을 내리려면 무엇보다 '구성원의 다양성'이 중요합니다. 제임스 서로위키는 <대중의 지혜>에서 다양한 구성원으로 집단을 만들면 대체로 문제 해결 능력이 자동으로 높아진다는 실험을 소개합니다. 이른바 '집단 지성'입니다.(90쪽)

창의성에 관한 현대 심리학 이론도 참고할 만합니다. 창의성 이론의 대가인 키스 소여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창의성은 그룹 속에서 협력을 통해 탄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러니까 창의성은 개인적인 산물이 아니고,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 창조적 힘을 자극하여 강력한 통찰력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죠. 그는 창의성의 핵심 조건이 바로 '구성원의 다양성'이라고 밝힙니다.(<그룹 지니어스> 키스 소여)

결론적으로, 50대 전문직 남성이라는 한정된 계층으로 구성된 의회보다는 연령, 성, 직업, 소득 수준, 이념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의회가 휠씬 더 뛰어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정치학>에서 "일부는 하나의 가치를 알고, 어떤 이는 또 다른 것을 알고, 모두는 함께 모든 것의 가치를 안다"며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 추첨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복권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아갈수록 매력이 있군요. 추첨 민주주의가 본래 민주주의의 요체였다면, 오늘날에도 추첨 민주주의가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추첨 민주주의 요소로 대표적인 사례가 사법 배심제와 참심제입니다. 시민을 무작위 추첨으로 선출하여 판결을 내리고 법률 엘리트의 사법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사라진 추첨 민주주의가 사법부에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국민 참여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배심제 성격의 제도가 실행되고 있지요.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주민 참여 예산제도 추첨으로 주민위원을 선출하고요. 진보 정당인 녹색당은 대의원을 추첨으로 뽑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 알고 보니, 추첨 민주주의가 오늘날에도 일부 살아남아 있군요. 그렇지만 모든 공직을 추첨으로 선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네, 맞습니다. 선거가 아주 필요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규모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추첨이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문적 기술과 경험이 요구되는 군사 지도자와 공공자금 담당관, 재정 감사관은 민회에서 선거로 선출했습니다. 그렇지만 선거라는 방식은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는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직접 민주주의와 숙의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려면?

- 그렇다면 오늘날 현실에서 추첨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식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서 대표는 선거로 뽑되 대의원은 추첨으로 선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노동조합에서 일반 조합원과의 괴리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 될 뿐만 아니라, 노조 집행부를 그저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며 구경꾼 역할만 하는 조합원들에게 참여를 통해 주인의식도 키워주지요.

처음부터 대의원 전체를 추첨으로 뽑는 것이 어렵다면, 시작 단계에서는 대의원의 절반은 선거로 뽑고 나머지 절반은 추첨으로 뽑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이때 대부분의 조합원이 돌아가면서 한번쯤은 대의원을 맡을 수 있게 설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 방식을 시민단체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활동가와 회원의 거리를 좁히고 회원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좋은 방식이기도 합니다."

-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역시 대의제의 한계를 마주하고 있으니, 좋은 방식으로 보이네요. 그럼, 추첨 민주주의는 국가 기구 운영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습니까?
"초보적인 방식으로는, '시민 자문위원회'를 제안할 수 있겠습니다. 무작위 추첨으로 수백 명의 시민을 뽑아 시민 자문위원회를 구성해서 서울시장이나 성북구청장 등 지자체의 장을 보조하는 것이지요. 이는 현대 정치학의 거장인 로버트 달이 제안했던 방식입니다.(98쪽)

더욱 정교한 제안으로는 '시민의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에서 교착 상태에 이른 법안, 국민의 반발이 심한 국가 정책 등이 있을 때 시민의회를 소집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입니다.

운영 방식을 간단하게 말하면, 무작위 추첨으로 수백 명의 대표단을 구성해 국민의 축소판을 만들어서 세미나와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합의는 의회의 심의를 거쳐 법률로 제정되거나 시행되지요. 이는 직접 민주주의와 숙의 민주주의를 모두 실현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습니다.

실제로 유럽권에서 활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 주에서 시민의회를 통해 선거법 개혁을 이루어낸 일이 유명하고, 아일랜드는 시민의회를 통해 헌법 개정을 이루었습니다. 선거법 개혁과 헌법 개정은 기존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일들인데, 시민의회를 통해 해결한 것이지요. 시민의회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미지의 민주주의>(김상준 지음)를 보시기 바랍니다."

촛불 항쟁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대안, 추첨 민주주의

- 얘기를 듣다 보니, 추첨 민주주의가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국민 주권을 훨씬 더 보장할 수 있어 보입니다. 추첨 민주주의를 국가 기구 전반으로 구현하는 논의도 있나요?
"관련해서, 양원제의 한 원은 선거로 뽑아 구성하고 나머지 한 원은 추첨으로 뽑아 구성하자는 제안에 관심을 둘 만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 시민을 추첨으로 뽑아 국민의 축소판으로 구성한 민회는 법률안 제안권과 거부권을 갖고, 정치인들을 선거로 뽑아 구성한 국회는 법률안을 통과시킬 권한을 갖는 거죠.

현재 국회 권력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장치가 없어서 문제인데, 그렇게 입법부의 권력을 둘로 나누어 놓으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현실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물론 지방 의회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만약 풀뿌리 조직인 주민자치위원회부터 각 지자체의 의회, 입법부까지 추첨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면, 국민의 참여 폭이 상당히 커지고 국가 기구에 대한 시민의 일상적인 견제와 감시가 작동하게 될 겁니다.

입법부만이 아닌 행정부에서도 정책 배심원단을 활용할 수 있고, 지자체의 장도 지역 현안을 다루는 시민 배심원단을 구성할 수도 있겠지요. 이는 모두 국민 주권을 실현하는 방식이 되고,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어 사회 통합에도 좋습니다.

또한 이는 촛불 집회로 대표되는 사회운동을 제도 정치로 가져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사회운동과 제도 정치 간의 소모적인 갈등을 줄여 사회운동의 지향점을 제도 정치 안으로 수렴하면서도 사회운동의 의미는 더욱 커질 수 있는 현실적인 답이 될 수 있죠.(159쪽)"

- 오늘 얘기를 들으니, "민주주의의 본질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민주 제도의 주기적 쇄신이 불가피하다."(<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38쪽)는 말이 떠오르네요. 애초 민주주의는 자신을 '다시 고침'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함'을 본질로 하지요.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답답한 정치 현실에 활로를 찾기 원한다면, 추첨 민주주의라는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추첨민주주의 강의

이지문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15)


태그:#추첨민주주의, #이지문, #촛불집회, #시민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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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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