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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살고 싶은 나라, 내가 꿈꾸는 국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대선 기획 '100인의 편지'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차기 정권에 하고 싶은 말, 바라는 바에 대해 적어 기사로 보내주세요.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넘어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여러분과 함께 열어나가겠습니다. [편집자말]

저는 직업환경의학 의사이자 노동안전보건단체 활동가입니다.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를 만나 돕기도 하고,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함께 벌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 나름대로 애쓰는 중입니다.

3년 전 만났던 특성화고 남학생 두 명은 화과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한 달째 '현장실습' 중이었습니다. 식품학과인 두 학생은 학교에서도 제빵 실습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학교랑 회사가 뭐가 다른지 물어봤습니다. 한 학생은 "학교는 일 하나를 하고 나면 짬 나는 시간이 1~2시간 돼요. 그렇게 쉬엄쉬엄하잖아요. 근데 회사는 컨베이어 벨트가 계속 돌아가니까 계속 일하는 거죠"라며 실습 한 달 만에 벌써 어깨와 허리가 아프고,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은 "근데 빠르면 일주일, 길면 2주만 지나면 힘든 것도 적응되고 그 후부터는 그냥 일상생활처럼 당연해진다"라며 제법 의젓하게 거들었습니다. 20kg 이상 되는 밀가루 포대는 둘이 같이 들어야 안 다친다고 '의사' 같은 소리를 했더니, "다들 각자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 와서 같이 들어주나요?"라고 저를 가르칩니다.

기계에 맞춰 돌아가는 사람들

세계노동기구의 '산업보건서비스의 5가지 원칙'에 따르면 회사는 노동자가 어깨나 허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컨베이어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컨베이어 속도에 맞추느라 질병을 얻는다.
 세계노동기구의 '산업보건서비스의 5가지 원칙'에 따르면 회사는 노동자가 어깨나 허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컨베이어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컨베이어 속도에 맞추느라 질병을 얻는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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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기구(ILO)에서 얘기하는 산업보건서비스의 5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적응의 원칙'입니다. 사람을 일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을 사람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컨베이어 벨트에 맞춰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는 대신, 노동자가 어깨나 허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컨베이어 속도를 조절하는 것. 허리에 부담이 될 정도로 무거운 물건은 둘이 들도록 배치하거나, 가벼운 무게로 나누는 것이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할 산업보건서비스의 기본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건강한 노동자가 되기 위한 이런 원칙들을 배우고 실천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현장실습'은 '기계에 맞춰' 돌아가는 작업장 시계에 익숙해지는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원래 하던 전공을 살려,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빵을 만들고 있으니 처지가 나은 것이었습니다. 2016년 봄, 인터넷 쇼핑몰을 전공하고 한 외식업체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이 괴롭힘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17년에는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애완동물학과를 다닌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 전북 LG 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일하던 중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 학생은 실적을 못 채워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보다 빵 생산과 콜 실적을 우선하는 세상에서, 청소년/고졸/특성화고 실습 노동자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소모품일 뿐입니다.

자살 부르는 일터의 압박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노동자들.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노동자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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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청소년 노동자만의 일은 아닙니다. 7년 전 상담했던 자살 사건에서 사망자는 20대 남성이었습니다. 원래 토목 엔지니어로 일하다 사무직으로 옮겨 처음에는 의욕이 넘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사 사정으로 대리인 그가 원래 부장이 하던 수준의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익숙하지 않은 공사 계약 일이었습니다. 계약상 실수로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힐 수도 있게 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잡힌 출장날 아침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사정을 전해들은 한 사무직 노동자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부서 이동과 함께 예상치 못했던 승진으로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새로운 일에 시달리게 됐다고 합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그는 1년 내내 8시에 출근해 밤 9시 퇴근했다고 하네요. 그런데도 입사 후 처음으로 인사고과를 나쁘게 받은 그는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역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2015년 1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1만 3513명이 자살로 사망했습니다. 하루 37명꼴입니다. 20대부터 50대 사이에서는 심장질환이나 뇌혈관질환보다도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 많은 비극 중, 일터에서의 압박과 스트레스, 과로를 줄이면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은 얼마나 될지 생각해봅니다.

상사의 인격 모독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정규직 전환을 바라보며 상사의 성추행까지 견뎠지만 결국 해고되어,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실적이 나오지 않아 다음 날 눈 뜨는 게 두려울 정도로 전전긍긍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같은 만성적인 업무 스트레스는 우울 증상이나 수면장애 같은 건강 위험을 높이고, 직장 내 폭력과 같은 일시적이고 강한 충격은 어떤 이유로든 취약했던 사람에게 방아쇠 같은 효과를 냅니다.

한국의 자살률(25.8)은 OECD 평균(12.0)의 2배가 넘고, 2위인 일본의 자살률(18.7)도 훌쩍 뛰어 넘습니다. 우리 사회의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은 시급한 과제입니다. 그런데도 성과주의를 전 사회로 확대하고, 더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하고, 비정규직을 더 흔한 일자리로 만들겠다는 정치는 우리의 목숨을 어찌 여기는 것일까요.

'전 국민 안식년' '칼퇴근법'도 좋지만...

얼마 전,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다발성 경화증으로 처음 산재 인정 판결을 받은 김미선님을 처음 만난 것이 5년쯤 전인가 봅니다. 만 17세부터 3년간 LCD 공정에서 일했던 미선 씨는 그때 이미 병 때문에 시력이 많이 나빠지고, 치료의 부작용으로 관절 수술도 받아 일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비 걱정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는 미선씨 얘기를 들으며, 산재 여부를 떠나 질병과 빈곤, 장애의 현실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미선씨는 산재 신청한 지 3년이 넘어서, 2017년 2월에 재판을 통해 겨우 산재 승인을 받았습니다. 치료비 걱정이나 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2월 말 항소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미선씨에게 절망을 안겼듯이, 유성기업은 최근 고 한광호님의 유족에게 분노를 선사했습니다. 고 한광호님은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회사로부터 11차례 고소당하고, 8번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징계를 앞두고 있던 2016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일터 괴롭힘에 따른 자살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현대차 하청업체 유성기업의 직장폐쇄 및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사망한 한광호씨.
 현대차 하청업체 유성기업의 직장폐쇄 및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사망한 한광호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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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업 동료 노동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노숙 농성을 하고, 수많은 사회단체가 연대한 끝에 자살 후 200일이 지나서야 겨우 산업재해로 승인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이 사건의 산재 승인을 취소하는 소송을 제기했다는 겁니다.

원래 산재 보험은 근로복지공단이 급여를 지급하니, 승인 여부는 공단과 노동자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사업주가 끼어든 것입니다. 산재가 승인되면 산재율이 높아져 보험료율이 오릅니다. 이 크지 않은 '손해'를 이유로, 이 죽음의 업무 관련성을 다시 따지라고 억지를 부리고, 유족과 노동조합을 괴롭히는 겁니다.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입니다. 민간 보험과 달리, 사회 보장 제도 중 하나입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들이 빠르게 치료받고 회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동안에도 생산성이나 회사의 이익에 밀려 몸과 마음을 다친 노동자들은 병을 얻고, 심지어 사망한 뒤에도 공단의 수익성에 밀려, 회사의 작은 이익에 밀려 모욕당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생애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에서부터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 일이 없어질까요? 일터에서 압박에 못 이겨 자살을 택하기 전에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일하다 아프게 된 사람들은 치료비 걱정을 안 하고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를 위해 일하게 될까요? 기업들은 일터에서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를 보며, 고맙고 미안해할 수 있을까요? 정권이 바뀐다고 저절로 이런 세상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 국민 안식년'이니 '칼퇴근법'이니,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듯 보이는 정책들이 벌써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그보다 이윤, 생산성이 아닌 일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입장'과 '방향'이 서야 우리의 고된 삶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최민 기자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이며 직업환경의학전문의입니다.



태그:#대선기획, #100인의 편지, #노동안전,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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