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면서기의 말에 홀려 아버지는 세탁소를 걷어치웠다

그 놈의 대서방(=대서소)한다고 헛바람만 안 들었어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엄마의 고생담이 시작되는 곳. 점촌에서 세탁소만 얌전히 하고 살았어도 그 고생은 안 했을 거라며, 원래 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허황되고 귀가 얇다고.

필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면서기의 말에 아버지는 세탁소를 걷어치웠다. 하지만 대서방은 필체로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불 한 채, 숟가락 세 벌만 지닌 채 서울로 왔다.

처음 셋방을 얻었던 돈암동 산동네는 산꼭대기 공동 우물 하나에 매달려 살아가는, 점촌보다 더 촌 같았다.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물동이를 지어 날랐고, 하루종일 양말에 전구를 넣어 양말코를 기웠다. 아버지는 입을 닫고 신문을 뒤적이며 방에서만 지냈다. 엄마의 부업으로 연명하면서도 물 한동이 길어다 주는 법도 없었지만, 그 시절의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서운한지도 몰랐다고 한다. 

두 번의 사산 끝에 엄마는 통곡을 했고, 아버지는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다시는 다리미를 안 잡겠다고 돌아섰지만 길이 없었다. 그 절박함으로도 아버지를 세탁소에 잡아둘 순 없었다. 엄마가 막내를 업고 '과일다라이'를 이고 먹골 언덕을 넘나드는 시간 동안 아버지는 직업을 계속 바꾸었다. 골동품을 한다고 하다가 장물을 거래해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수정 광산을 찾았다며 뾰족한 수정을 몇 개 캐와 백반에다 삶기도 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지고 엄마는 뼈가 삭는 노동에 지쳐가면서 점점 집안에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주사가 심해졌고 엄마는 가시나무처럼 말라가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온종일 100원짜리 크림빵 하나로 배를 채우던 엄마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가장 극적인 파국은 내가 12살 무렵의 어느 날 벌어졌다. 아버지와 엄마가 3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집 윗목에는 커다란 항아리 3개가 있었다. 허연 곰팡이 같은 거품이 일고 이상한 악취를 풍기는 구정물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다. 아버지가 하려는 구아노(비료) 사업을 위한 준비였다.

해안가나 섬을 돌아다니며 걷어온 갈매기 똥을 넣어 발효를 시켰다. 배가 불뚝하던 항아리에서 나오는 꼬리꼬리한 냄새는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방안에선 비료가 끓고 있고, 엄마는 하루종일 화장품 가방을 매고 명동 빌딩 숲을 누볐다.

온종일 100원짜리 크림빵 하나로 배를 채우며 맏딸의 중학교 등록금을 모으던 엄마는 밤마다 술에 취해 '어떤 놈을 만나고 오는 거냐'며 생소리로 사람을 잡던 아버지의 술주정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술만 들어가면 가장을 뭘로 보느냐, 아버지를 뭘로 보느냐며 화를 냈다.

그날도 술에 취한 아버지가 엄마를 찾더니 다시 나갔다. 조금 후 엄마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엄마를 찾았다고 하니 허둥지둥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엄마는 머리채가 들린채 끌려왔다. 아무리 술이 취해도 집밖에선 똑바로 걷고, 술주정을 해도 목소리가 집 담을 넘지 않게 하던 아버지가 그 날은 미쳐버린 것 같았다.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새벽녘에 몰래 들어와 본 현장은 참혹했다. 두 사람이 방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항아리들은 박살이 났고 방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엄마는 입술이 터지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에 옷은 다 뜯겨 있었다. 아버지는 발이 찢기고 이마가 피투성이였다.

아줌마들이 영화배우 같다던, 총각이라고 해도 믿겠다던 아버지의 얼굴은 하룻밤 새 노인이 된 듯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그 날은 척척하게 젖어버린 양말의 불쾌한 촉감과 함께 내 마음 속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았다. 내가 느낀 건 비참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닌 끊임없는 의문이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엄마는 왜 저런 남자랑 살고 있을까? 왜 우리를 데리고 도망가지 않을까.

나중에 엄마에게 듣기론 아버지가 다방 레지랑 바람이 났었다고 한다. 그걸 억지로 떼어놓은 다음부터 술만 마시면 엄마한테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때리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사랑을 잃어서였는지,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어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후로도 아버지의 주사는 계속됐다. 엄마와 나에겐 아버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병이 생겼다.

40대 중반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아버지, 돈이 돌아도 싸움 끝나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가장 극적인 파국은 내가 12살 무렵의 어느 날 벌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가장 극적인 파국은 내가 12살 무렵의 어느 날 벌어졌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부터다. 봉제공장에서 자투리 천을 가져다 크기와 종류에 따라 골라서 파는 일이었다. 일은 험하고 힘들었지만 수입은 제법 괜찮았던 모양이다. 낡고 작은 집이었지만 집도 마련하고, 트럭도 한 대 굴렸다. 아버지는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돈다발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돈이 돌아도 우리 집은 늘 시끄러웠다. 아버지는 작은 봉제 공장들이 아니라 큰 공장을 뚫어야 한다 했다. 평생 이렇게 기레빠시(자투리)나 고르고 살 순 없으니 구청 직원도 만나고, 공장장 소개도 받고... 접대 아닌 접대가 이어졌고 늘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물품대금을 들고 나가 밤새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새파랗게 독이 오른 엄마는 새벽녘까지 온 동네 술집을 헤매고 다녔다. 늘 돈 때문에 싸웠다고 생각했지만 돈이 돌아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올해 77세가 되신 아버지가 신장 투석을 받기 시작한 지 15년이 넘어간다. 일주일에 삼일 네 시간씩 온몸의 피를 뺐다가 다시 넣는다. 나이 50이 넘어 다시 세탁소를 차렸던 아버지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반년 만에 문을 닫더니 택시 기사로 10년을 보냈다.

사납금도 못 채우는 일을 뭐 하러 하냐며 말렸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누구 참견도 듣지 않고 훨훨 돌아다니는 것이 좋았는지 맞교대를 10년 하시더니 병을 얻으셨다. 앙상한 팔에는 밧줄보다 굵은 혈관이 지나가고 새카맣게 변한 얼굴엔 예전의 보기 좋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훨씬 자주 웃으시고 하루하루를 별일 없이 지내신다. 작은 방에서 혼자 티비를 보고 동네 공원에 가서 장기 두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한잔 걸치고 집에 와서는 소파에 누워 꾸벅꾸벅 존다. 엄마의 구박에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늘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없었으며 무엇인가를 쫓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번듯하게 보이고 싶어서...'라고 아빠의 허영을 정의했다. 비록 집안이 망해서 중학교도 진학을 못했지만 필체가 좋았던 사람, 인물이 훤하고 말수가 점잖은 사람, 그래서 늘 이런 일 하실 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 그래서 번듯하게 보이는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달력 뒷면이나 종이 여백에 가지런하고 빽빽하게 쓰여 있던 아버지의 글씨들. 가끔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배를 깔고 혼자 무언가 쓰고 있던 모습. 궁금해서 들여다 본 종이엔 신문의 헤드라인 한자들이 빼곡이 쓰여 있었다. 멋들어진 획들과 단정한 필체에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무심코 던져버렸던 그 종이들에 아버지의 욕망이 줄줄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60 고비를 넘기며 아버지의 몸에 들어 앉은 병은 아버지에게 위로와 평화를 가져다 준 것 같다. 끝없이 당신을 끌고다니던 번듯하게 보이고 싶은 헛된 욕망에서 놓여나서일까. 이제 글씨도 쓰지 않으신다.

중학교도 못나온 가난한 집 가장이 무슨 수로 번듯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누군들 번듯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너무 자주 남몰래 아버지의 부재를 꿈꿨던 나는 이제 그의 욕망이 서럽다.


태그:#아버지와 딸, #잃어버린 꿈, #가정 폭력, #할배의 탄생, #서체
댓글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7,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삶을 살고 글로 쓰고 읽고 듣고..되새김질 하는 소처럼 ...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