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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목)~12일(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 쓰시마에 다녀왔다. 9일(목) 저녁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서울에서 모여 자동차를 몰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당초 10일(금) 새벽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람이 적당히 모여 야밤에 차를 타고 가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부산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는 부산 해운대에 새벽 4시경에 닿았다. 영화평론가인 강익모 선생, 자동차 디자이너이며 사진작가인 하성인 선생과 로드 디자이너(road designer)인 고광용 선배와 나까지 4명은 해운대의 쇠고기국밥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해운대에서
▲ 부산에서 쇠고기국밥 해운대에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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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쓰시마 여행은 총 9명이 동행을 했는데, 이렇게 4명과 아침에 부산항에서 만나기로 한 3명, 그리고 11일(토) 오후에 쓰시마에서 만나기로 한 2명까지 전부 9명이다. 한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정신없이 부산까지 달려온 탓에 피곤했지만, 국밥을 한 그릇 하고 나니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처음 뵙는 두 분과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쓰시마에서의 일정과 조선통신사에 관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부산에 와서 복국을 먹거나, 돼지국밥을 먹어본 적은 있지만, 쇠고기국밥은 처음이라 약간은 생소했다. 그러나 맛은 가성비 대비 나름 만족이다. 적당히 싸고 맛도 보통은 했다.

일출이 좋은 곳
▲ 부산 오륙도 일출이 좋은 곳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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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차를 타고는 일출을 보기 위해 '이기대(二妓臺)공원'으로 갔다. 입구에 바다가 바로 보이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어 다른 무엇이 보일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오륙도를 보기에는 나름 조망이 좋은 곳이었다. 이기대공원은 장산봉 동쪽 산자락에 바다와 면하여 있는 공원이다.

해안 일대에 약 2㎞에 걸쳐 기기묘묘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반들이 바다와 접해 있어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곳으로,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낚시터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새벽부터 출어를 하고 고기를 잡고 있는 작은 배들도 보이고, 낚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인다. 

이곳엔 순환도로와 오륙도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곳곳에 각종 운동기구도,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다. 지난 1999년 바닷가 바위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면서 남구청에서 이 일대를 정비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오륙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인 이 섬들은 멀리 영도구의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와 마주보며,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나누어진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이라고 한다. 등대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오륙도는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한다.

이기대에서 일출을 보다
▲ 부산 이기대에서 일출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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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아직 날씨가 어둑어둑하다. 약간 흐린 날씨라 일출을 제대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은 모양의 해가 떠올라 잠시 보았다. 생각보다는 반갑고 기분 좋은 일출이다.

이제 다시 부산항으로 간다. 출근 시간이 겹쳐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지만, 7시 30분 정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는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쉬었다. 8시가 되어 다른 일행들이 도착했다.

나랑 같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활동하는 공학박사인 양인수 이사, 고향 후배인 지리학 전공인 안종천 박사 등이 전부 도착하여 발권을 하고는 부산에서 쓰시마 이즈하라항으로 출발했다.

파도도 없고 햇살도 좋아서 편안하게 갔다. 배가 이즈하라항에 닿기 직전 인공위성 TV를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박 대통령 탄핵 소식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었다. 11시부터 25분 동안 이정미 재판관의 탄핵 인용을 눈물 나게 보았다. '8:0 재판관 전원의 인용이라, 정말 역사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무튼 잘 보았고, 하선하여 쓰시마 입국 절차를 밟았다.

조선통신사 벽화
▲ 일본 쓰시마 조선통신사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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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D호텔의 승합차에 배달을 부탁하고는 가볍게 이즈하라항구로 나왔다. 천천히 걸어서 시내를 산책하기로 했다. 가는 길 좌측에 조선통신사에 관한 벽화가 보인다. 쓰시마에서 조선통신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지를 다시 한 번 짐작하게 하는 그림이다. 지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이곳은 오랫동안 한일교류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로드 디자이너 고광용 선배랑 기념 촬영
▲ 일본 쓰시마 로드 디자이너 고광용 선배랑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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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선생의 주검이 안치된 사찰인 '슈젠지(修善寺)', 백제의 비구니가 세운 이 사찰에 지난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를 보러갔다. 

경기도 포천 출신의 문신, 학자, 의병장, 애국지사였던 선생은 조선말기 일본의 배신 16조를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후,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쓰시마에 유배되었다. 당시 선생은 "일본군과는 싸울 수 있어도, 조선군과는 싸울 수 없다" 하여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 일본 쓰시마 최익현 선생 순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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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유배지에서도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우국, 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쓰시마에서 선생의 순국비를 보는 기쁨은 남달랐다. 잠시 기도를 하고는 경내를 둘러보았다.

이제 시내 산책을 조금 더 한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초밥집으로 갔다. 된장국 등을 포함하여 초밥과 회를 왕창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잠시 관광안내소에 가서 일행들에게 쓰시마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와 함께 안내를 한 다음, 승합차를 빌려 타고는 인근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신사'로 갔다.

초밥으로 점심
▲ 일본 쓰시마 초밥으로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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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최익현 선생이 쓰시마로 끌려 와 처음 3개월 동안 수용생활을 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 신사의 광장이다. 지금은 수용시설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신사는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 '진구(神功,しんこう)황후'를 모시는 곳으로 일본 역사왜곡의 한 단면이 묻어나는 장소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또 다른 인물인 '고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의 신사를 보기 위해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장녀로 쓰시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이었다.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
▲ 일본 쓰시마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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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보다 200년 이상 먼저 천주교가 전래된 일본의 경우, 당시 이미 3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부모 시절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마리아는 남편인 소 요시토시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고, 쓰시마에서 다양한 전도 활동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전쟁사에서 유명한 '세키가하라전투(関が原の戦い)'에서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장이 되어 처형되자,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는 동군에 투항해 목숨을 건졌다. 후환을 염려하여 1601년 마리아 부인을 버리게 되고, 부인은 나가사키로 추방되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606년 사망했다.

이후 1619년 부인과 일찍 죽은 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부인은 '이마미야(今宮)신사'로 아들은 '와카미야(若宮)신사'로 각각 입신을 시킨 후, 제사로 모시다가 후에 '천신(天神)신사'로 합사를 했다. 대외적으로는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였지만, 사실은 부인과 아들을 제사지내던 신사였던 것이다.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의 사당 앞 건물
▲ 일본 쓰시마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의 사당 앞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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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고니시 마리아는 일본 기독교사에서도 조선의 기독교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임란 직후 포로로 잡힌 조선의 양반 자제 중에 당시 13세의 어린 소년을 본가로 보내, 교토에 있는 예수회 학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소년은 빈센트(Vincent)라는 세례명을 1603년 받게 되고, 나가사키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조선에 돌아가 포교활동을 하고자 중국으로 가게 되지만, 중국에서 조선입국이 원만하게 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가서 활동을 하다가 나가사키에서 1626년 순교하게 된다.

'빈센트 인센쇼 카헤이고(嘉兵衛)'로 불리던 이 조선인 전도사가 우리가 흔히 조선인 최초 신부라고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조선인으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물론 김대건 신부처럼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조선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일행들이 기념촬영
▲ 일본 쓰시마 일행들이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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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고니시 마리아는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도 조선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녀의 위패가 있는 신사의 사당 내부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입구의 큰 나무와 앞뒤로 두 개의 사당 건물에서 나름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쓰시마 도주의 부인이었고, 이곳에 천주교를 전도한 사람으로 지금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태그:# 쓰시마, #일본 , #고니시 마리아, #최익현,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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