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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혜씨의 남동생이 나에게 처음 사건을 알려온 그 날은 참으로 얄궂은 시점이었다. 2000년 3월 7일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된 후 범인으로 체포된 신혜씨는 1심에서 사형 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내려진 법원의 선고는 무기징역.

검찰과 법원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신혜씨의 억울함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를 살해하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검사는 준엄하게 비난하며 사형을 구형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였다. 왜 그럴까?

판사는 김신혜씨가 재판 내내 부인했던 아버지에 의한 성추행을 사실로 인정했다. 당사자가 아니라며, 우리 아버지는 그런 추악한 일을 한 적이 없다며 부인했음에도 판사는 그것이 사실이라며 '강제로' 인정한 후 그 정상을 참작해 준다면서 검사의 사형 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해 준다.

 김신혜씨는 1심과 2심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대법원은 이를 그대로 확정했다. 내가 그녀의 사건을 처음 제보받았던 2000년 12월 28일은 그녀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다음날이었다.
 김신혜씨는 1심과 2심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대법원은 이를 그대로 확정했다. 내가 그녀의 사건을 처음 제보받았던 2000년 12월 28일은 그녀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다음날이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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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신혜씨는 항소했다. 1심 재판에서 인정한 그 정상 참작은 사실이 아니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항소심. 그러나 이번 역시 다르지 않았다. 1심이 열렸던 해남지원에서 다시 광주고법으로 법정만 바뀌었을 뿐 결과는 똑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딸들을 잇따라 추행한 파렴치 범이었고 그 파렴치한 아버지를 딸이 죽인 후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려진 판결은 1심과 똑같았다. 검사의 사형 구형에 이은 무기징역 선고. 남동생이 나에게 메일을 보내 누나를 도와 달라고 한 그 날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시 한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항소심 다음 날이었다.

수사기록을 구해 사건의 진실을 보다

나는 신혜씨의 남동생에게 사건의 수사기록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다행히 신혜씨의 1심 변론을 담당했던 변호인에게 받아 놓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수사기록은 십 수 년 후 이 사건의 재심을 맡게 되는 박준영 변호사에게 전달되어 재심을 진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방대한 수사기록을 읽으며 나는 막연했던 이 사건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찾게 된 곳이 바로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었다. 2001년 2월, 나는 전남 완도를 향하게 된다. 나는 신혜씨 아버지가 살았던 집과 사체가 발견된 현장을 꼼꼼하게 살폈다. 남동생의 안내를 받아 사망한 아버지의 집에서 사체가 발견된 현장까지 이르는 과정을 걷거나 차량을 이용하여 일일이 살펴봤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사체가 발견된 장소까지 이동하게 된 것일까? 신혜씨가 범인이 아니라면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범인은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시신을 어떤 방법으로 이동시킨 것일까? 나는 아버지의 집과 사체 발견 현장 사이에서 남아 있을지 모를 또 하나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마지막 장소는 신혜씨의 할아버지 집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약 100미터가량 떨어진 산비탈 위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집. 신혜씨와 동생들은 사실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 할아버지 집이 있기에 주로 그곳에서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생활했고 아버지와는 집을 왕래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남동생은 아버지가 누나와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함께 살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이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고 검찰이 주장한 여동생에게 그 사실을 물었으나 여동생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아버지의 사체가 마을 주민에게 발견되었다는 그날 아침, 그러니까 2000년 3월 7일 새벽 5시경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온 신혜씨를 본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싶었다. 신혜씨가 들어왔다는 그 시각은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한 직후일 것이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범할 수 없는 흥분 상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때 신혜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혜씨 할머니의 기억은 총명했다. 2001년 당시 80세를 넘겨 많이 연로했으나 말씀만은 대단히 또렷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매우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신혜씨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기 전 모습.
 김신혜씨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기 전 모습.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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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날 새벽 5시가 좀 넘어서 집에 왔는데 평소처럼 나를 보자마자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꼭 껴안고 뽀뽀하고 좋아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다 큰 애가 그만 좀 하라.'며 뭐라고 그랬어요. 그런 후에 세수를 하더니 자기가 며칠 전에 데려다 놓았던 강아지와 좀 놀더니 조금 있다 잠이 들더라고요."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신혜씨가 잠든 시간은 새벽 5시 30분경이었다고 했다. 그 시각은 마을 주민에 의해 아버지의 사체가 발견되기 약 20분 전쯤이었다. 정말로 김신혜씨가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맞다면 과연 이런 행동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완도경찰서, 민·형사 소송 건다더니...

하지만 유감스러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수사기록을 읽고 현장을 다녀온 후 판단이 섰을 때는 이미 재판이 모두 끝난 후였다. 너무 늦게 알게 된 진실이었다. 그래서 신혜씨에게 물었다. "내가 어떤 부분을 도와줬으면 좋겠냐"고 했다. 그러자 신혜씨는 "언론을 통해서라도 내 억울함을 많은 이들이 알게 해 달라"고 청했다.

2001년 6월, 그렇게 해서 나가게 된 이 사건 첫 방송이 당시 SBS 시사 프로그램이었던 <뉴스 추적>이었다. 지금은 SBS <8시 뉴스> 편집 책임자로 있는 정명원 기자에게 취재를 부탁했고 그는 흔쾌하게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첫 방송이 나간 후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특히 이 사건을 수사했던 완도경찰서는 네티즌의 항의글로 서버가 다운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러자 완도경찰서는 이틀 만에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서장 명의의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물론 반성이 아니었다. 수사 결과는 정당하다며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경찰의 명예를 훼손한' 나와 SBS 취재진을 상대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발표였다. 나는 이러한 경찰의 발표에 대해 바로 소송을 기다리겠다는 환영 글을 완도경찰서 홈페이지에 썼다.

정말로 나는 그 소송을 기다렸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신혜씨 사건은 더 이상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없었다. 모든 재판 절차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완도경찰서가 우리에게 소송을 제기한다면 우리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두고 다시 한번 진실을 다퉈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그 후로 지금까지 16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 소송은 제기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실망했다.

 완도경찰서는 나와 방송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다렸던 소송은 17년째 소식이 없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경찰이 더 부끄럽다. (sbs 뉴스토리 캡쳐)
 완도경찰서는 나와 방송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다렸던 소송은 17년째 소식이 없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경찰이 더 부끄럽다. (sbs 뉴스토리 캡쳐)
ⓒ sbs 뉴스토리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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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5년을 넘고, 10년을 넘고, 거기서 또 넘었다. 올해로 17년째. 그 시간 동안 나는 신혜씨와 수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통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죽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은 어둡지만, 반드시 정의가 찾아와 진실을 말해 줄 때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리자고 했다. 그런 말 외엔 달리할 방법이 없는 답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혜씨는 나보다 더 강했다.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도소에서의 강제 노역을 거부했다. 자신은 아버지를 죽은 사실이 없다며 교도소가 강요한 강제 노역을 거부했다. 노역을 거부하면 가석방의 기회도, 귀휴의 가능성도, 그리고 소내 처우도 개선되지 않지만, 그녀는 그런 작은 달콤함 대신 한결같은 태도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나 역시 그녀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지난 2003년에 쓴 책, 젊은 인권운동가가 쓴 인권 현장이야기 <니가 뭔데...>였다. 나는 이 책에서 '어느 존속살인 여 무기수의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제목으로 김신혜씨의 억울한 진실을 고발했다. 뜻밖의 반응을 보여준 곳은 월간 <신동아>였다.

책이 나온 후 <여성 동아>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본 <신동아> 기자가 김신혜씨 사건을 100매 분량의 원고로 기고해 줄 수 있냐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해서 월간 <신동아>에 실리게 된 그 기사가 훗날 오늘날 재심에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그때만 해도 몰랐다.

신동아에 실린 신혜씨 기사를 보고 방송사 시사프로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2003년 <피디 수첩>을 비롯하여 법정 드라마인 <죄와 벌>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방송이 나가면 반응은 늘 대단했다. 하지만 2014년 여름 어느 날, 나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측에서 찾아온 방송 제안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사를 표시했다.

그동안 많은 방송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이어질 뿐 과연 신혜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혜씨 역시 그런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담당 피디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방송으로 그치지 않고 재심을 맡아줄 변호사까지 책임지고 연결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박준영 변호사. 그의 열정이 낳은 기적이 김신혜씨 사건의 재심 개시 결정이다. 이는 복역중인 재소자를 상대로 재심이 개시되는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최초로 결정이기 때문이다.
 박준영 변호사. 그의 열정이 낳은 기적이 김신혜씨 사건의 재심 개시 결정이다. 이는 복역중인 재소자를 상대로 재심이 개시되는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최초로 결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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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인연이 된 분이 바로 '파산' 박준영 변호사였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정으로 거짓말 같은 기적이 벌어졌다. 2015년 11월, '기약 없는' 무기수로 복역 중인 신혜씨에게 다시 재판받을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며, 결코 자백한 사실이 없다며 17년간 싸워온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린 그 날, 나는 법정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로 그 사람, 내가 지금까지 이 사건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진짜 이유였다.

할머니가 내밀었던 그 돈 봉투, 그때 한 약속

지난 17년간 많은 분들이 나에게 묻고 했다. 특히 박상규 기자의 스토리펀딩과 박준영 변호사의 뛰어난 능력과 열정으로 사상 최초의 복역 중 재심 개시 결정이 나자 많은 기자들이 나를 찾아와 그간의 일을 물어 왔을 때도 이 질문은 빠지지 않았다.

"어떻게 지난 17년간 이 사건을 계속 이야기해 온 건가요?"

그때 들려준 일화다. 2001년 2월에 처음 완도를 찾았을 때였다. 할아버지 집에서 할머니에게 그날 새벽의 이야기를 듣고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이미 그때 80세가 넘었던 두 분이 일어나려는 나를 자꾸만 붙잡았다. 그러더니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무언의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침침한 방 안 구석에 놓은 4단짜리 서랍장으로 다가가 맨 아래 서랍을 끝까지 빼내는 것이 아닌가.
 방 안에 보이는 서랍장이 바로 그날 할머니가 돈 봉투를 꺼낸 곳이다. 할머니는 약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02세가 된 할아버지가 아직도 손녀딸을 기다리고 있다.
 방 안에 보이는 서랍장이 바로 그날 할머니가 돈 봉투를 꺼낸 곳이다. 할머니는 약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02세가 된 할아버지가 아직도 손녀딸을 기다리고 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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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발적인 상황에 적이 당황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모를까.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이내 서랍장 깊숙이 팔을 뻗더니 바닥에서 구겨진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분들이 가진 현금 전부이자 비상금으로 모아둔 소중한 돈임을 느꼈다. 그런 돈을 내 앞으로 내밀며 할머니는 더듬거리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지가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어요. 죄송혀요. 그런데 이 돈으로 차비라도 쓰면서... 부디... 우리 손녀딸 좀 살려주세요. 우린 선생님밖에 없어요. 암것도 우린 몰라요. 그러니 지발...."

거친 바닷일과 노동으로 쭈글쭈글한 손으로 수없이 만지작거려 때가 탄 돈 봉투를 내게 내밀던 할머니. 그 순간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두 분을 돌봐준 사람은 손녀 신혜씨 뿐이었다. 자식은 있었으나 그들도 살기 빠듯하다며 외면한 조부모를 신혜씨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도와드리고 있던 실정이었다.

그런 형편에서 그분들이 내밀 돈은 그냥 돈이 아니라 그분들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돈을 봉투째 내미는 손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렇게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내가 그 돈을 쉽게 내치면 오히려 이분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단호하게 그 돈을 뿌리치면 "이 사건을 내가 도와줄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시지는 않을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 절망하는 마음으로 내가 떠난 후 오히려 더 깊은 상심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로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꺼낸 말이었다.

"할머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약속 하나 할게요. 제가 두 분보다 나이가 젊으니 제가 더 오래 살겠지요. 그렇게 제가 살아가는 동안 두 분의 손녀를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약속할 테니 믿어주세요."

그러자 이내 두 분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피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본 후 다시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지금 저에게 내밀었던 이 돈은 다시 넣어 두세요. 만약 이 돈을 할머니가 계속 저에게 받으라고 하신다면 저는 지금 이대로 그냥 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이 돈을 다시 넣어 두신다면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제가 손녀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 언제가 되든 반드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겠습니다."

2015년 11월, 김신혜씨의 재심 개시 결정을 본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게 했던 그때 약속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 이 글이 그 약속의 또 다른 시작이기에 그렇다.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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