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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소년 유해와 함께 무덤에서 나온 꽃신, 손바닥 절반정도 크기로 아주 작다
 소년 유해와 함께 무덤에서 나온 꽃신, 손바닥 절반정도 크기로 아주 작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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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걸으며 소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겁에 질려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호기심과 기대감에 가슴이 뛰고 있었을지도 몰라.'

'선감 이야기 길'을 걸을 때 불현듯 스친 생각이다. 겨울의 찬기와 봄의 온기가 한꺼번에 느껴지던 날(2월 24일)이었다. 덮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걷기에 딱 좋았다. 

낙원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겠지만, 이 길을 걸을 때까지만 해도 소년들은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선감학원이 지옥 같은 강제수용소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곳에 강제노역과 굶주림,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길이 소년들의 눈물로 적셔졌을 것이다.

그 옛날, 소년들은 선감나루터에서 선감학원(현 경기창작센터)까지 3km 남짓한 거리를 걸어서 이동했다. 그 길을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복원하고는, 선감 이야기 길이라 이름 지었다. 예술가들은 길 곳곳에 이정표를 세웠고, 소년들이 도착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기도 했다.

걷다 보면 소년들이 거주했던 기숙사와 원장이 살았던 관사를 볼 수 있다. 선감 이야기 길이 끝나는 경기창작센터에는 선감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역사관에는 선감학원의 비극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글과 그림이 전시돼 있다.

선감 이야기 길 끝단 즈음에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든 선감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 역시 작가들이 흘린 땀의 결과물이다.

박물관에는 선감학원을 경험한 3명(김춘근, 김영배, 전남석)의 소년들 이야기가 담긴 영상물이 있다. 노년이 되어서 증언한 내용이다. 한 소년의 무덤에서 나온 꽃신도 전시돼 있는데, 너무 작아서 애처롭다. 성인 손바닥에도 못 미치는 크기다.

경기창작센터에는 소년들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도 있다. 높이 1m 남짓, 아담한 크기의 위령탑이다. 위령탑에는 '농부시인'으로 유명한 홍일선 시인이 강제수용소 선감학원에서 짧은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소년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시와 함께 위령탑을 세우는데 뜻을 함께한 이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20여 년간 선감학원 진상규명에 매진한 정진각 안산지역사회 연구소장과 소설 <아! 선감도>를 발표해 선감학원의 비극을 세상에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 김용현·장을봉 조각가와 이교의 태양석재 대표, 홍일선 시인과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선감학원 운영한 경기도, 소년들 명부 간수 못 했는지 안 했는지

선감 나루터, 소년들은 배를타고 이곳에 내려서 선감학원까지 걸었다.
 선감 나루터, 소년들은 배를타고 이곳에 내려서 선감학원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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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는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는 모습.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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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감학원의 비극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일들이 그동안 계속 진행됐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감 이야기 길과 선감 박물관은 예술가들의 힘으로, 위령탑 역시 예술가, 시인, 역사학자 등이 힘을 모아 세웠다.

그래도 국가에서도 무엇인가는 했겠지 하는 마음에 취재해 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만 얻었다. 혹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의 비극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경기도에 있었다. 일제가 세워놓은 선감학원을 그대로 물려받아 비슷한 방법으로 36년간이나 운영한 것은 경기도다. 일제 강점기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존속했으니, 46년부터는 경기도가 운영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제가 저지른 강제노역, 폭행, 굶주림 같은 인권유린이 경기도가 운영하는 동안에도 계속 자행됐다. 도망치다가 바다에 빠져 죽거나 병에 걸려 죽은 소년 역시 일제와 마찬가지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매장했다는 게 피해자들 증언이다.

이렇게 책임이 큰데도, 경기도는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었다.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사망자 넋을 위로하거나 피해자들 상처를 치유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36년간 선감학원을 거쳐 간 소년들 명부 등을 비롯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록물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디에 살던 누가 왔다 갔는지,몇 명이나 거쳐 갔는지, 왜 오게 됐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없다.

선감학원을 거쳐 간 소년들 신원 등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6일 경기도에 자료 열람을 요청했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선감학원에 있었던 인원수 정도였다.

선감학원 인권유린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 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인 김달수 의원(더민주, 고양)도 이 문제를 지적했다. 김 의원은 "기록도 빈약한데 너무 아픈 기억이라 그런지 피해자들이 밝히기를 꺼린다. 가해자를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고"라며 진상규명의 어려움을 기자에게 토로했다.

김 의원을 만난 것은 지난 2월 17일이다. 1년 기한으로 구성한 특별위원회의 활동 기간을 올해 9월까지 연장하는 안건이 운영위원회를 통과한 날이었다. 연장 이유는, 기록물 등이 충분하지 않아 목표한 만큼 진상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령탑 세우자는 제안 끝내 외면한 안산시, 왜?

선감 이야기 길을 공동 기획한 정기현 작가, 공동 기획자는 자우녕 작가다.
 선감 이야기 길을 공동 기획한 정기현 작가, 공동 기획자는 자우녕 작가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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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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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만든 선감 박물관
 작가들이 만든 선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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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이 있던 선감도 관할 관청인 안산시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뜻있는 안산시민들이 소년들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을 세우자고 제안했지만, 끝내 외면했다.

처음, 위령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이는 <아! 선감도>(1989년)라는 소설을 발표해 선감도의 비극을 세상에 알린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다.

그는 선감학원 부원장인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서 3년여를 보냈다. 그때 기억을 토대로 자기 또래 소년들이 선감학원에서 겪은 참상을 소설에 담았다. 소설을 발표한 뒤인 지난 1996년 안산시를 방문해 위령탑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안산지역에서 '위령탑 논란'이 시작됐다.

"이하라가 일본에 가서 모금이라도 해서 위령탑을 세우고 싶다고 하니까 안산시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러고 나서는 1999년도에 예산( 9500만 원)도 세웠어요. 설계까지 다 끝냈는데,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없던 일로 하자고…."

20여 년간 선감학원 진상조사에 매달린 정진각 안산역사연구소장이 지난 2월 22일, 3월 6일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위령탑 건립계획을 돌연 취소한 뒤 안산시는 10여 년이 훌쩍 지나도록 위령탑을 세우지 않았다.

결국, 위령탑을 세운 것은 정 소장을 비롯한 뜻있는 시민들이었다. 정 소장 등 뜻있는 사람으로부터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김용현·장을봉 조각가는 기꺼이 재능기부를 해 주었고, 석재 사업을 하는 이교의 대표는 돌을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2014년 세워진 게 경기창작센터에 있는 높이 1m 남짓한 아담한 위령탑이다.

안산시는 어째서 예산까지 세워 놓은 사업을 돌연 취소해 버린 것일까?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안산시에 1999년 당시 문서 열람을 요청했다. 확인 결과 '공사금액이 수의계약 한도액 초과(한도 7000만 원)로 규정상 공개경쟁 입찰이 불가피한데, 그럴 경우 수의계약을 하기로 (안산시와) 의논을 하고 이미 설계를 진행한 설계자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해하기 힘든, 억지로 이유를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설계자와 협의를 해서 비용을 줄여도 되고 사업비를 나누어(설계/시공) 수의계약 한도를 넘기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아예 계획을 취소했다는 게 억지스럽다.

실제로 회계업무 경험이 있는 경기지역 한 공무원한테 물으니 "이런 경우 사업비를 나누어서 수의계약 한도를 넘지 않게 하기도 한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1999년에 만든 안산시 문서보다는 정 소장과 안산시 관계자 등이 전한 추측이 더 믿음이 갔다.

"선감학원이 일제 강점기에만 존재한 것으로 알고 위령탑을 세운다고 했는데, 훨씬 더 긴 세월을 경기도가 운영했다는 사실을 안산시가 나중에 알게 된 거예요. 그 뒤로는, 선감학원과 관계된 일은 경기도 책임이니, 모두 경기도가 해야 한다며 미뤄버린 것이죠."

"소년들이여, 어머니 기다리는 집으로 가소서"

선감 역사관
 선감 역사관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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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 이야기 길
 선감 이야기 길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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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

어둠 속 섬에서
동트는 새벽이 있었으련만
아주 오랜 날 유폐된 섬 속에서
소년들이 있어야만 했으니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정녕 역사일진대
삼가 오늘 무릎 꿇어
그대들 이름 호명 하나니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 치듯 어희 돌아들가소서
이 비루한 역사 용서하소서

위령탑에 새겨진, '농부시인'으로 유명한 홍일선 시인의 시(詩)다. 시인은 '비루한 역사'를 만든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있다. 그들의 넋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국가의 폭력으로 일어난 비극인데, 어째서 가해자인 국가가 아닌 시인이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관련 기사]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빠져 죽고, 지옥의 수용소


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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