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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바탕, 한 여자가 비스듬히 돌아섰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단화를 신은 채 고개를 숙인 단발머리 여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존재라는 양, 그저 서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누구도 아닌 듯 보이는 그녀와 특색 없는 배경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의 표지다.

아무도 아닌 책 표지
▲ 아무도 아닌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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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은 한국 문단의 주목받는 젊은 작가 황정은의 소설집이다.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것으로 그녀에게 젊은작가상 대상과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안긴 단편도 여럿 포함돼 있다. 한국 문단과 평단이 작가 황정은에 주목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이보다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에선 세상과 끊임없이 관계 맺으며 조금씩 고립되고 점차 자기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는 듯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번 소설집에도 그와 같은 경향이 여전해서 주변 이웃의 힘겨운 이야기를 곁에서 바라보는 듯한 감정이 절로 일어난다. 대개는 슬픔과 무력감, 애틋함과 안쓰러움 따위의 것들이다.

1976년생으로 어느덧 등단 12년차가 된 황정은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정갈한 문장으로 안쓰럽게 무너져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은 현실 가운데 금세 퇴색되고, 젊은 화자가 바라본 나이든 어른들은 염치도 없이 늙어간다. 예쁜 아이와 고왔던 여자친구는 실종되거나 사고로 죽어버리고 그를 잃은 어머니와 남자친구는 미쳐버리거나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첫 소설 '上行'은 남자친구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남의 밭에 고추를 따러 간 일을 떠올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싼 값에 땅을 빌려 농작물을 키우던 밭 주인은 땅이 팔리면 한순간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텐데, 그런 상황 속에서 모두가 할 수 있는 말은 "늦게 팔려라" 하는 게 전부다.

먹어줄 사람 없는 농작물을 키우는 사람들과 자신에겐 쓸모 없는 땅을 가진 땅주인, 삶에 치이다 못해 묘한 패배감까지 느끼는 듯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짧은 이야기 가운데 언뜻 드러난다.

늙은 이들은 시대를 놓치고 버려진 듯한 땅에서 거듭 늙어가고 젊은 이들은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나이만 먹는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며 자기 아닌 자기가 되어가는 이 소설에서 독자는 과연 어떤 감정과 마주할까.

자고 가.
밥 줄게.
누군가 도와줬으면 해서 둘러보았지만 오제도 오제의 어머니도 짐을 확인하느라고 바빴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 있다가 다음에 와서 자고 갈게요, 라고 말했다. 몇 겹으로 왜곡된 안경 속에서 노부인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
오긴 뭘 오냐 니가, 라고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노부인 앞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자 약속도 아닌 약속을 해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33p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단편은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로부터 꽤나 높은 비율로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소설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장년 부부의 유럽여행을 다룬다. 여행 첫날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시작한 이들의 여행은 기대와 달리 부부 사이의 간극을 점차 벌려 나간다.

크고 작은 온갖 것들이 익숙치 않은 여행지에서 과거 해소되지 않은 지난 상처가 불현듯 일어나 오늘을 망가뜨리게 되는 순간을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불과 스무페이지를 조금 넘는 단편이 이토록 처연하고 서글픈 감상을 자아낸다는 사실에서 문단과 평단이 작가 황정은을 주목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이가 여덟 살 때였다. 안장이 사라진 자전거를 끌며 한 정거장을 걸어온 아이의 얼굴엔 눈물이 번져 있었다. 너무 고요하게 울고 있어서 그녀는 아주 가깝게 다가가서야 아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횡단보도로 마중나온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달려왔다. 누가 안장을 가져갔는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변명하듯 말하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배 쪽으로 당겨 안았다. (...) 이렇게 시작되어서 앞으로도 이 아이는 지독한 일들을 겪게 되겠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거듭 상처를 받아가며 차츰 무심하고 침착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149p

이밖에도 책은 작은 무관심으로 납치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자책을 하는 서점 종업원의 이야기 '양의 미래', 서로 사랑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부부와 보낸 당혹스럽고 서글픈 하루 '상류엔 맹금류', 하루종일 백화점에서 거짓 웃음을 웃는 종업원의 이야기 '복경' 등이 담겨 있다.

특유의 우울하고 애처로운 분위기 가운데 비루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른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아무도 아니지만 누군가일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작은 위로와 공감을 받은 이들이 있을까. 문득 그들이 만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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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아닌 / 문학동네 / 황정은 지음 / 2016. 11.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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