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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뭐가 좋아졌는지 잘 모르겠는 순간이 더 많습니다. 여전히 '여자'라서 차별받고 억압받고, 특정 역할을 하길 강요받죠.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 사회 여성들의 목소리, 여성을 생각하는 목소리들을 몇 차례에 걸쳐 전합니다. [편집자말]
나는 여중, 여고, 여대생이었으며, 졸업 후에는 '여'기자가 되었다. 학교야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다한들 사회인이 돼서까지 신분 앞에 '여'가 따라 붙는다. 거의 모든 직업 앞에 '여'가 붙는 것이 우리에게 어색하지 않다. 여의사, 여기자, 여군, 여배우, 심지어 그냥 회사원도 여사원이다.

반대로 남을 붙이면 어색해진다. 남의사, 남기자, 남군, 남배우, 남사원 같은 단어는 사용하는 이가 없다. 직업인의 디폴트가 남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 여가 안 붙는 직업이라곤 종사자의 성별이 여자가 압도적인 미용이나 서비스직 정도가 다다. 여성은 어떤 직업을 갖든, 한 명의 직업인 이전에 '여성'으로 먼저 분류된다. 사회적으로 전문성을, 권위를 깎아내린다.

'남자는 프로, 여자는 아마추어'... 뿌리깊은 성차별적 인식

외식업종 노동자의 전체 비율로 보자면 여성이 높지만 그중에서 프로페셔널로 취급받는, 소위 '있어보이는' 영역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외식업종 노동자의 전체 비율로 보자면 여성이 높지만 그중에서 프로페셔널로 취급받는, 소위 '있어보이는' 영역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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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잡지 쪽에서 일해왔기에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은 덜했다. 물론 남자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만연한,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한 여성을 향한 편견과 성차별적 발언들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취재를 나가면서 더욱 심해졌다.

나는 음식 전문 기자다. 음식이라는 분야가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생활 속 음식 그러니까 집밥의 영역, 아마추어의 영역은 완전히 여성의 것으로 치부되지만 그 반대로 프로페셔널의 영역, 그러니까 권위가 주어지는 영역은 완전히 남성의 것으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남성은 프로, 여성은 아마추어'라는 성차별적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외식업종 노동자의 전체 비율로 보자면 여성이 높지만 그중에서 프로페셔널로 취급받는, 소위 '있어보이는' 영역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셰프가 그렇다. '주방에서의 일은 위험하고 힘을 쓰는 육체노동이기에 여자보다 남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일까? 해외에서도 셰프의 남성 쏠림 현상에 대해, 더 이상 체력 차이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일인 척만은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주방의 노동력을 통솔, 지휘하는 셰프는 상당한 권위와 책임이 실리는 직책이다. 주방은 군대문화와 비슷하다고도 한다. 여성에게는 당연히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권위를 일임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 안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여성 셰프들은 존재하지만, 이 적디 적은 소수의 인원을 증명 삼아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상대적으로 '안 알아주는', 소위 '주방 아줌마'의 영역을 생각해보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아닌 서민적인 음식점의 주방 요리사가 여자라면 '주방 아줌마'라고 불린다. 여성이기에 하는 일의 가치를 저평가해서 부르는 말이다. 같은 서민적인 음식점이라도 주방의 요리사가 남자라면 '주방 아저씨'라고 부르는 일은 현저히 낮다. '아줌마'와 '아저씨' 두 단어의 사회적인 쓰임조차 차이가 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슷한 예로 분명히 하는 일은 비슷한데, 남자의 경우 그 단어를 붙일 만한 경력이 없어도 '셰프'라 불리고 여자는 '요리연구가'라 불리는 일을 수도 없이 봤다.

매일의 밥을 차려내는 일은 어머니가, 부인이, 딸이, 여성이 하는 일이면서 같은 요리라도 프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남성의 영역으로 뒤바뀐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셰프와 요리사를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그것도 아세요?'다. 음식 전문 기자로 일하며 직업적 전문성을 갖기 위해 나름의 공부를 많이 해왔다. 하지만 많은 요리사들은 '항상' 나를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봤다.

당연히, 기자가 셰프나 요리사보다 요리의 영역에서 모르는 것이 많을 수 있고 기자라면 모름지기 취재원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그런데 얘기를 잘 듣다가도 거기에서 더 나아간 질문을 하면 의례 '그런 것도 아세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이런 일이 계속 생기다보니 '다른 기자에 비해 나는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기자인가 보다'라며 칭찬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남자 기자였어도 항상 '그런 것도 아세요?'라는 말을 들었을까?

전문기자에게 "그런 것도 아세요?"라고 묻는 남자들의 심리

문제는 셰프나 요리사 뿐 아니라, 비전문인조차 내가 음식기자라고 하면 음식 이야기를, 자신의 지식을 '알려주려'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백이면 백, 남자다.

소위 미식가라고 불리는 이들을 보자. 미식가라는 영역도 재미있는 것이, 비싼 레스토랑 가서 돈이나 펑펑 쓴다고 욕 먹는 것은 항상 젊은 여성층이지만(인터넷의 댓글창을 보자, 허영심에 가득찬 된장녀 혐오는 이 기사 댓글에도 달릴 것이다) 미식가로 인정 받는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것도 중장년층의 남자다.

같은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해도 그게 30대의 여성이라면 "맛도 모르면서 허영심에 비싼 밥이나 먹는다"고 욕을 먹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그게 40~50대의 남성이라면 "인생의 여유를 아는 미식가"라 불릴 일이 많다는 거다. 소위 '미식 블로거'로 꼽히는 네이버 블로거의 상당수가 남자다. 앞의 '셰프나 요리사 vs. 주방 아줌마' 구도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하는 일에는 권위가 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여자들조차도 같은 설명을 해도 여자 블로거보다 남자 블로거의 말을 더 믿어버린다.

고급 식문화를 향유하는 데에 남성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남녀간의 급여차이, 빈부격차도 한몫한다. 어쨌거나 이 자칭, 타칭 남자 미식가들은 내가 음식 기자라는 것을 아는 순간 "오빠가 알려줄게"의 태도로 자신의 지식과 안목을 줄줄 읊기 시작한다.

그들이 하는 말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이런 것도 드실 줄 아세요? 여자들은 잘 안 좋아하는데" 이 말은 "이런 것도 아세요?"의 다른 버전이며, 웃긴 사실은 이게 칭찬이란 것이다. 여자들은 잘 모르는 맛, 그걸 알다니 의외이며 그 정도면 인정한다는 뜻이다. 여자들은 진짜 맛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맛', 이것은 맛이 진하거나 고기 혹은 고기의 내장 등 부속물을 사용한 요리가 주가 되며 미식의 영역에서 소위 '깊이 있는 맛'이라 취급된다.

그럼 무슨 맛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일까? 보통 산미가 있는 가벼운 음식, 채소가 주가 되는 양식 혹은 한식이건 양식이건 뭐건 무조건 치즈가 범벅이 된 음식, 달콤한 디저트 류를 '여성이 좋아하는 맛'이라 하며, 남성 미식가의 입에서 "이건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네"라는 말이 나온다면 '깊이는 없고 내 취향도 아니지만 대중에겐 먹힐 맛이네'라는 속뜻으로 쓰인다.

뭐 실제로 통계상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단백질을 섭취하긴 하지만, 문제는 디저트나 치즈 범벅 괴식을 좋아하는 남자, 고기를 좋아하는 여자도 많다는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남자가 좋아하는 맛', '여자가 좋아하는 맛'에 매겨지는 등급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셰프건 요리사건 미식가건 아니건, 남자들은 나에게 음식에 관해 가르치려 들었다. 그것도 내가 전문 음식 기자라고 말할수록 더욱더!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도 무시

'음식전문기자'인 나를, 남자들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음식전문기자'인 나를, 남자들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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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세계적으로 퍼진 단어가 있다. 바로 '남자'와 '설명하다'를 합친 단어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순간 나는 그동안 들었던,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했던 그 모든 설명들, 내가 나름의 지식이 있고 공부를 했다고 어필을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를 가르치듯 하던 태도와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던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가며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거였구나. 나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겪었던 일이구나,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속이 뚫렸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자신의 경험을 줄줄이, 분통을 터뜨리듯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다. 2015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널리 알린 책으로 이 책의 저자 레베카 솔닛이 한 파티에서 어떤 남성에게 자신이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 관한 책을 썼다고 얘기하자 곧바로 남성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그에 관한 중요한 책이 올해 출간된 걸 아느냐"고 가르치려 든 일화에서 출발한다. 그 마이브리지에 관한 책이 바로 눈앞의 레베카 솔닛이 쓴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채.

맨스플레인은 "흔히 남자가 여자에게, 설명을 듣는 사람이 설명을 하는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다. 주말에 카페만 가도, 무언가를 열심히 아는 체하며 설명하는 남자와 그 앞에서 지친 표정을 애써 숨기는 여자로 구성된 소개팅 남녀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음식은 어마어마한 맨스플레인의 판이다. 다른 영역과는 다르게, 우리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먹는 것이 음식이기에 저마다 철학이나 취향이 있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남성이기에, 자신의 철학과 취향이 나의 지식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나의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은 무시되기 일쑤다.

흔히 전라도 남자들이 미식가라고 한다. 각종 해산물이 맛있는 시기를, 고기의 어느 부속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를 꾀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이 지역에서도 그 음식을 '해다 바치는' 것은 온전히 그들 부인의 몫이다. 부인이 주방에서 지지고 볶고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며 내주는 음식에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젠체를 한다.

권위가 있는 한 '남성' 음식 기자출신 컬럼니스트는 "성인이 돼서까지도 쓴맛과 신맛을 싫어한다면 어머니의 연기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하거나 "요즘 아이들이 모유수유를 못하고 분유를 먹어 소아비만과 당뇨병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분별없이 설탕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엄마의 역할, 엄마의 손맛, 엄마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의 미식 세계관은 철저히 여성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이뤄지며, 그 탑의 꼭대기에서 권위를 갖고 미식을 운운하는 것은 남성의 영역이다.

나는 이것이 여성의 노동, 서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찬양을 함으로써 강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권위를 쌓아가는 남성, 아마추어로서 서비스하는 여성과 프로페셔널한 남성이라는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미소지니)의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 셰프건 음식기자건, 미식가건 권위는 다 남성에게 주고 여성에겐 '부엌일'을 도맡긴다. 남자 요리사들조차, '집밥'은 부인의 영역으로 치부한다. "하루종일 요리하는데, 그래도 집에서 밥은 부인이 해야죠"도 수없이 들은 말이다. 부인이 전업주부냐 물으면 맞벌이란다.

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며, 부끄럽지만 잘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압도적으로 "나중에 시집가면 사랑받겠다" 혹은 "남자친구가 좋아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음식기자인 것을 알아도 "직업 때문에 그런가요?"라고 물어오는 일은 적다. 내가 음식 기자라서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좋아했고, 음식 기자를 하면서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게 되었다. 확실한 건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자여서는 아니라는 소리다. 이 땅의 많은 남성과 명예남성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한 번도 남자한테 사랑받기 위해 요리를 취미로, 직업으로 가진 적은 없다. 

내가 일하는 세계의 통념은 앞으로도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적는 것이 무섭기도 하다. SNS에 들어가면 업계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른 온갖 차별적인 혐오 피드가 가득 뜬다. 나는 그냥 계속, 그들이 인정하는 "여자이지만 보통 여자와는 다르게 맛 좀 아는 여자"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는 편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조차 '남자의 음식'이니 '여자의 음식'이니 운운하는 성차별적인 단어를 썼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깨닫게 해준 이 땅의 모든 페미니스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바꿔 갈 것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언어가 필요하다.


태그:#기자, #페미니즘, #여성의 날, #맨스플레인, #3.8 여성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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