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싱글라이더>의 이주영 감독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전공, 그리고 광고 감독 생활을 오래 한 이주영 감독.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싱글라이더>는 그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 이정민


영화 <싱글라이더>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 이주영 감독은 영화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 휴대폰, 한국 타이어, 쌍용 자동차 등 10년 가까이 광고장이로 살아온 그였다. "의도치 않게 직장을 떠나면서 영화를 공부"했던 이주영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이창동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14번 가까이 한 이야기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이 이야기를 배우 이병헌이 우연히 접하고 영화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싱글라이더> 제작이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풍경과도 같은 영화', '기존 한국 상업 영화의 문법을 벗어난 작품' 등. <싱글라이더>에 대한 평이 다양했다. 부실채권 판매로 궁지에 몰린 한 기러기 아빠 재훈(이병헌 분)이 아내와 자식을 보기 위해 호주로 날아들며 접하게 되는 일들이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이다. 그 재훈이 호주에서 워홀러로 살던 지나(안소희 분)를 만나고 두 사람이 서로의 상실을 공감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변화를 인정하는 과정이 느린 호흡으로 영화에 담겨있다.

수치심과 상실감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 <싱글라이더>의 이주영 감독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주영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번 영화에는, 감독 자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감독이 되기까지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 이정민


"참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직장을 그만뒀다"라고 이주영 감독은 말했다. 큰 불만 없이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일하던 일터를 떠났고, 그즈음 몇 가지 상징적 사건을 뉴스로 접한다. 영화 속 재훈이 증권사 직원으로 나오는 건 2013년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동양증권을 통해 회사채 등을 불완전 판매하며 개인투자자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준 사건)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느낀 상실감과 회의감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영화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신이 투영되는 면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속감을 되게 중시하잖나. 직장을 나오면서 내가 느꼈던 불안감과 공포가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객관적으로 그걸 바라볼 수 있었다. 삶의 가치를 내가 너무 규정짓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때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사실 증권이나 경제 쪽은 무지하다시피 한 데 그때 동양증권 사태가 터졌고, 뭔가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사건 자체보단 그 사건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직원들이 느낀 수치심과 죄책감은 영화 속 재훈이 딱 전형적 조직에서 느꼈을 충격과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었다. 소희씨가 맡은 지나의 이야기는 실제로 제 지인의 이야기다. 뉴스에도 나왔고, 참 가슴 아픈 기억이라 영화에 이걸 차용할 거라 생각 못 했는데 이야기를 쓸 때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워킹 홀리데이 설정이 나왔고, 그 친구 이야기를 차용하게 됐다.

증권사 분들 취재를 좀 했다. 동양 사태 관계자는 많이는 못 만났고, 그 사태를 바라본 다른 회사 분들을 만났다. 다들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계셨더라. 막상 회사채를 판 사람은 단순 영업직이고, 사고는 윗사람이 잘못해서 난 거지 않나. 근데 죄책감은 말단 직원들이 느끼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실제 사건에 함몰됐다면, 아마 <싱글라이더>는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 시스템을 지적하는 전형적인 '요즘' 상업영화가 됐을 것이다. 그 대신 이주영 감독은 "최근까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많긴 했지만, 난 시스템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단 그 안에서 그걸 겪는 사람들 개인의 감정에 관심이 갔다"며 "사회가 아무래 발전해도 개인이 불행한 건 다들 원하지 않는 일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싱글라이더>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이 담긴 영화라고 설명할 수 있다.

대사의 중요성

 영화 <싱글라이더>의 이주영 감독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싱글라이더>의 원래 제목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인물의 '정서'에 집중한 작품이다. ⓒ 이정민


이 영화의 초기 제목이 <기분>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결과 정서가 그만큼 세밀하게 표현돼야 했다. 이주영 감독은 "결정적인 사건이 많지 않은 사람의 여행기 같은 외피를 입은 이상 대사를 더 공들여 써야 했다"며 "이 감독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털어놓는 속마음 같은 이야기"라 설명했다. 그래서 배우들과 사전에 많은 만남도 필수였다.

 영화 <싱글라이더> 한 장면. 이병헌은 해당 시나리오를 접한 이후 꼭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안소희 역시 사전에 먼저 참여 의사를 강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배우들을 매료시킨 이야기라는 뜻이다.

영화 <싱글라이더> 한 장면. 이병헌은 해당 시나리오를 접한 이후 꼭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안소희 역시 사전에 먼저 참여 의사를 강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배우들을 매료시킨 이야기라는 뜻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사실 제작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이병헌씨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접하게 되면서 참여하고 싶다 하신 이후 급물살을 탔다. 제작사도 없었는데 큰 배우가 하고 싶다 하니까 만들어질 수 있었지. 그간 범죄물 같은 장르물을 쭉 하시다가 본인도 그런 역할에 피로감을 느낀 거 같더라. <싱글라이더>를 찍고 바로 <마스터>를 찍어야 했는데 '정서적으로 쉬어가는 느낌으로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현장이 그렇게 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지. 대사 말고 얼굴과 눈빛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했으니까. 총 28회 차를 찍었는데 매번 감정적으로 각성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병헌씨도 (재훈의 아내로 등장하는) 공효진씨도 상업영화의 전형성을 벗어나고 있는 지점들을 좋아했다. 효진씨는 재훈이 느낀 상실감에 대해 여러 얘길 하셨다. 소희씨 역시 자기가 왜 처음에 원더걸스로 데뷔했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등을 나눴다. 각자가 자기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촬영 전에 있었던 거다."

개봉 이후 크게 흥행세는 타지 못했지만, 영화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 중이다. 이주영 감독이 경계하는 지점은 의도치 않은 반전 마케팅이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감정이 주인 이유다. 이 감독은 "그런 마케팅으로 가서 관객분들이 뭔가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있다고 기대하시는 거 같은데 애초에 그 부분을 노리고 이야기를 쓴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후회의 개수

 영화 <싱글라이더>의 이주영 감독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싱글라이더>에 대한 호불호는 명확히 갈렸다. 이주영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 이정민


<싱글라이더>를 두고 나오는 여러 반응, 상반된 평가에 이주영 감독 자신도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좋아하시는 분들은 많이, 또 싫어하시는 분들도 매우 싫어하신다"며 그가 웃어 보였다.

누가 뭐라든 이주영 감독은 "스타 캐스팅, 혹 배우 조합으로 박진감 있게 이야기를 잘 끌어가는 분들의 영역이 있듯,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분명한 주관이 있었다. 반전의 영화라는 세간의 정의를 부정하면서 <싱글라이더>를 "삶이 끝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소개한 대목을 기억하자. 애니메이터, 광고 감독을 거친 그는 분명 한국영화계에선 독특한 위치를 점유할 인물임이 분명하다.

"살면서 후회를 아주 안 할 수 없지만 가능하면 후회를 안 하고 살려고 노력한다. 할 수 있는 건 일단 해보자는 주의다.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후회하는 개수를 줄이고 싶다. <싱글라이더> 이후 뭔가 고민하는 단계는 아직 없는데 다음엔 좀 더 현명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감정에 의지하는 영화다 보니 그 과정이 참 힘들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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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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