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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아가씨는 고향집을 떠나기로 합니다. 서울로 갈 꿈을 품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딱히 있지 않고, 대단한 재주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고시원 한 칸을 겨우 얻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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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 서울에서 고시원은 창문조차 없는 성냥갑 같습니다. 이곳에서 돈을 더 치르고서라도 창문 있는 자리를 찾아봅니다. 그런데 막상 고시원에서 창문 있는 자리를 찾아보니, 창문을 열면 바로 옆 건물 벽만 보인대요.

저는 작은 규모의 인테리어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근만큼은 남다른 규모를 자랑합니다. 철야가 계속될수록 사무실은 극단적인 상상들로 가득 찹니다. 절대 실현되지는 않지만, 상상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음침한 생각들 말입니다. 물론 저도 저만의 불순한 상상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18쪽)

요즘은 출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독이 쌓이는 기분입니다. 물리적으로 먼 길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고 그만둘 수는 없겠죠? 적어도 시한부쯤의 이유는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24쪽)

<혼자를 기르는 법>(창비,2017)이라는 만화책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을 내놓은 김정연 님은 먼저 웹툰을 선보였습니다(webtoon.daum.net/webtoon/view/selfgrow). 시골 아가씨 한 사람이 서울에 터를 얻어 으레 밤샘일에 시달리면서 홀로서기란 얼마나 고단한가 하는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줍니다.

툭하면 밤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일터는 어느 날 빈 방에 침대를 들여놓더랍니다. 일터 한쪽 빈 방에 놓인 침대는 '대놓고 밤샘일을 시키겠다'는 뜻일 테지요. 침대가 있는 일터는 복지를 몸소 보여주는 셈일까요. 아니면 복지하고 동떨어진 셈일까요.

나는 이시다이시다
 나는 이시다이시다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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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창문 있는 고시원도 이와 비슷한 얼거리이지 싶어요. 창문이 있기는 있는데 창문을 열면 바로 맞닿은 옆 건물 벽만 보인다니, 이는 창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창문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더 따지고 보면 거님길도 이야기할 만합니다. 서울이든 시골이든 모두 매한가지인데요, 사람이 다니라고 하는 거님길에 버젓이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서곤 합니다. 사람길이 아닌 '자동차 서는 자리'가 되고 마는 거님길은 참말 거님길일까요. 아니면 그냥 '주차장에 사람도 다닐 수 있다'뿐일까요.

인류는 어쩌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69쪽)

무리지어 살게 되면 좋은 점도 있지만, 흐릿해지는 가치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를테면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아끼지 않거나 막 쓰게 되는, 욕실 안의 공공재 같은 것들 말이죠. 혼자 살게 되면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것은, 만 원이 훌쩍 넘는 백화점 비누를 하나 사서, 개봉해서부터 쌀 한 톨 크기가 될 때까지 온전히 혼자서 다 써 보는 것이었습니다. (75∼76쪽)

혼자
 혼자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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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가씨는 서울 아가씨로 살려고 용을 써야 합니다. 입밖으로 쉬 내뱉지는 않지만 거친 말이 튀어나올 만한 일을 으레 겪어냅니다. 거친 말이 아주 쉽게 튀어나올 수 있을 만큼 거친 사회이고 메마른 도시입니다. 어느덧 웃음도 눈물도 무디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럴 즈음 시골 아가씨는 마음을 기댈 수 있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벗님을 만납니다. 집에서 수많은 물고기와 여러 짐승을 기르는 언니입니다. 작은 집에서 작은 목숨붙이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나누어 봅니다. 사람도 작은 짐승도 물고기도 작은 곳에서 비로소 쉽니다.

작은 단칸방에서, 작은 사육장에서, 작은 어항에서, 저마다 조그마한 살림을 꾸립니다. 작은 단칸방에 깃들면서 벽을 꾸민다든지 집을 가꾼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달삯을 내면서 얼마쯤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뿐이에요. 작은 사육장이나 어항에서 사는 작은 짐승이나 물고기도 그저 그곳에 머물 수 있을 뿐입니다.

원 포인트 레슨
 원 포인트 레슨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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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제 껍질의 텍스처나 신경 쓰고 있자니, 불현듯 좋지 못한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어두운 술집에서 나 예쁘다고 뽀뽀해 놓고, 밝은 카페에서 헤어지자고 한 어떤 새끼가요. (137쪽)

고시원 시절, 창문 있는 방이 더 비쌌지만 굳이 욕심을 냈던 이유는, 제게는 그게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창문이란 한 폭의 밖을 담은 그림과도 같습니다. (160쪽)

너무 좁은 서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아주 작은 곳에 아주 많은 사람이 복닥입니다. 어디를 가든 돈을 쓰는 곳이 되고, 마음을 놓으면서 턱 주저앉을 만한 걸상이나 빈터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리하여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이시다'라는 아가씨는 아버지한테서 "'이시다'이시다"라는 멋진 이름을 물려받았으나 정작 '이시다(높임말)'라는 자리보다는 '이 시다(이 した, 이 잡일꾼)'라는 자리에 서곤 합니다. 만화에서도 '아랫자리'에서 맴도는 이야기가 으레 흘러요.

백스크린
 백스크린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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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그냥 노는 대로 놀아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에 갈지를 정하는 것이, 제 놀이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238쪽)

제가 살던 곳의 미끄럼틀에는, 동네의 최강자만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비비탄들을 주워서 갖다 주면, 총에 맞지 않고도 놀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약속들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의 화난 지갑은 제게도 수단이란 것을 안겨 주었습니다. (337쪽)

서울이 더 넓어지면 그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넉넉하게 바뀔 만할까 궁금합니다. 서울이 좀 작아지면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서울 바깥으로 흩어지면서 조금이나마 넉넉하게 달라질 만할까 궁금해요.

아니면 이 서울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씩씩하게 홀로서는 길을 찾을 만할까요. 또는 굳이 이 서울이 아니어도 씩씩하며 즐거이 홀로서는 길을 새롭게 열 만할까요.

덮밥
 덮밥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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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에 청경채를 담고, 고등어를 담고, 콜라를 담고, 방향제를 담고, 휴지도 담고, 락스도 담으면서, 그 중간 어디쯤에선 물고기도 테이크아웃해 올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29쪽)

제 꿈은 폴리 포켓 디자이너가 되어, 제가 살고 싶은 집들을 마음껏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건축 모형용 미니어처 인간들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하죠. 전 아직도 나름의 동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49쪽)

'먹는 물고기'가 아닌 '기르는 물고기'를 요새는 '마트'에서도 판다고 해요. 플라스틱 컵에 담은 '기르는 물고기'가 우리 가운데 누가 골라 주기를 기다린다고 해요.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 '기르는 물고기'라면 으레 도랑이나 냇물에서 낚거나 잡곤 했습니다. 1990년대 첫무렵까지 인천에서 살던 저는 바닷가나 갯가로 낚시를 가서 '기르는 물고기'를 낚았고, 작은 늪이나 못에서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가 마을 언저리에서 '기르는 물고기'를 손수 잡던 삶하고 멀어질 즈음 민물고기나 바닷물고기 모두 제 삶자리에서 빠르게 밀려났지 싶습니다. 물고기뿐 아니라 개구리도 새도 숲짐승도 차츰 보금자리를 빼앗기고요.

우리 올라잇
 우리 올라잇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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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이 벌어지면서 민물고기는 더더욱 설 자리를 잃었는데, 어쩌면 '도시화·서울화'는 우리가 스스로 서는 씩씩한 길을 자꾸 갉아먹는지 모를 노릇이에요. 이런 틈바구니에서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이시다' 아가씨는 홀로서기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요? 혼자서도 씩씩하고, 혼자서도 즐거우며, 혼자서도 아름다운 살림을 끝끝내 찾아내어 활짝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부디 쓰러지지 말기를, 부디 이시다 아가씨 같은 이웃을 보듬을 수 있기를, 부디 서울에서도 살림꽃을 피울 수 있기를, 무엇보다 따사로운 마음을 서울에 씨앗으로 심어서 많디많은 사람들이 바삐바쁜 삶에서 살그마니 시름을 덜면서 흐뭇하게 어깨동무하는 길로 나아가는 징검돌을 이룰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혼자를 기르는 법 1>(김정연 글·그림 / 창비 펴냄 / 2017.2.7. / 16000원)



혼자를 기르는 법 1

김정연 지음, 창비(2017)


태그:#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만화책, #만화읽기, #서울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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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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