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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라성터
 하라성터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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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시마바라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시마바라 반도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하라성터(原城跡).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터만 남아 엄청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던 유명한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등지고 있는 하라성터에는 돌무더기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성의 형태를 짐작하게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물론 예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팻말은 여기 저기 세워져 있지만. 이곳에서 세월을 견디면서 살아냈음직한 오래된 나무들이 있고, 성터 일부는 밭으로 변해 있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고 있는 녹슨 십자가탑이 인상적이었다.

 하라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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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성터에 가면 볼거리가 딱히 없다. 그냥 스윽 주변을 둘러보고, 옛날에 성이 있었대, 하면서 돌아오기 일쑤다. 하지만 그 곳의 역사를 알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돌무더기들이 갑자기 생명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라성터도 마찬가지였다.

이 성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농민 3만7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막부군 12만5천 명이 하라성에서 농성을 벌이던 농민들을 진압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막부군도 1만여 명이 사망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시마바라 반도와 아사쿠사 섬에 사는 사람들은 봉기를 일으켜야 했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아마쿠사 섬은 시마바라 구치노츠 항에서 보면 바다 너머로 보인다. 이곳에도 규슈올레가 있다.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인데, 2015년 2월 28일에 길을 열었다. 그 길, 걸었다. 걸으면서 아마쿠사와 시마바라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역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마바라에 와서 그 역사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아마쿠사에서는 아마쿠사를 중심으로, 시마바라에서는 시마바라를 중심으로.

[규슈올레]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를 걷다

 하라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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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라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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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성터를 둘러본 뒤, 가까이에 있는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으로 가면 하라성터에서 죽은 3만7천여 명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농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아니면 순서를 바꿔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에 먼저 들러 하라성에 얽힌 역사를 미리 알고 하라성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농민들이, 백성들이 봉기를 하는 이유는 지배자들이 가혹한 탄압과 수탈이다.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에서는 기리시탄으로 부르는 가톨릭 탄압이었단다.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박물관에 있는 아리마 하루노부 상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박물관에 있는 아리마 하루노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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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바라 반도의 가톨릭은 구치노츠 항에서부터 시작됐다. 항구를 통해서 서구와 무역이 이뤄지면서 가톨릭 역시 전파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시마바라 반도를 통치하던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는 서구와 무역을 원활히 하려고 세례를 받으면서 가톨릭교도가 된다. 영주가 가톨릭교도가 됐으니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아리마 하루노부의 현명한(?) 선택으로 구치노츠 항은 서구와 무역으로 번창하게 된다. 아리마 하루노부 역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늘 그렇듯이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아리마 하루노부가 막부와 갈등을 일으켜 실각하고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상황은 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도쿠가와 막부는 '기리시탄'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친다.

 세금을 내지 못한 주민에게 짚단으로 만든 옷을 입혀 불을 붙이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고, 가톨릭교도들을 운젠지옥이라는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던져 죽이기까지 했다.
 세금을 내지 못한 주민에게 짚단으로 만든 옷을 입혀 불을 붙이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고, 가톨릭교도들을 운젠지옥이라는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던져 죽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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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온 영주 마쓰이라 가쓰이에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 혹독한 수탈을 시작했고, 더불어 가톨릭을 탄압했다. 세금을 내지 못한 주민에게 짚단으로 만든 옷을 입혀 불을 붙이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고, 가톨릭교도들을 운젠지옥이라는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던져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정을 견디다 못한 시마바라 사람들과 아마쿠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봉기를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했겠지. 시마바라에서 2만3천여 명이, 아마쿠사에서 1만4천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민중 봉기를 주도했던 사람이 당시 16세였던 아마쿠사 시로였다. 가톨릭 신자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데, 그가 진짜로 민중 봉기를 주도했던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하라성터에는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역시 봉기가 진압되면서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고작 16살의 나이가 아깝고, 아프다.

 아마쿠사 시로
 아마쿠사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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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봉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라성에서 농성을 하다 보니 식량이 떨어지고 무기 또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둘러싼 12만 명의 막부 군대를 농민군이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농민군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하라성 뒤에 있는 바다로 교황이 보낸 군대가 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단다.

끝내 성은 함락됐고, 3만7천 명의 백성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하라성은 막부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파괴된 성은 시체들과 함께 묻혀서 이후 350여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화승총 납탄을 녹여서 만든 십자가와 묵주알 등이 출토되고 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간절하게 원했던 농민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민중봉기를 하도록 만들었으니, 역사는 슬플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나 보다.

 미나미 시마바라 시에 있는 구치노츠 항
 미나미 시마바라 시에 있는 구치노츠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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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중봉기를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텅 빈 하라성에는 강제이민령으로 분고, 사츠마, 쇼도시마 등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빈 돌무더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텅 빈 하라성터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를 걸으러 시마바라 반도에 가거든 꼭 하라성터에 들러보길 권한다. 길은 사람의 흔적이면서 역사의 흔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걸으면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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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미나미 시마바라 시 초청으로 시마바라 반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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