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의 포스터. 이전 세대의 리얼리즘 계열 흑인 영화들처럼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기 보다는,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관심과 사랑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각각 9세, 16세, 성인 시절의 샤이론을 연기한 배우 세 명의 얼굴을 합성하여 만든 것이 인상적이다.

영화 <문라이트> 포스터. ⓒ A24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것'이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혼란, 아픔, 사랑, 진심. 설명하지 않기에 이 모든 감정은 더 크게 전달되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20여 년에 걸친 한 남자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는 그가 겪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장면과 장면의 흐름은 생략으로, 인물의 감정은 롱테이크로, 인물의 움직임은 핸드헬드로, 이 모든 영상의 흐름이 마치 한편의 무용과도 같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리틀이라는 별명을 가진 샤이론이라는 소년은 별명에 맞게 작은 체구의 소심하고 섬세한 아이다. 또래 아이들은 리틀을 괴롭히기 일쑤고 소년의 소극적인 반응은 아이들의 폭력성을 더 자극하기만 한다.

첫 등장부터 소년은 아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빈집에 숨어든다. 어둡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리틀은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혹시라도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봐) 작고 마른 몸을 더 작게 움츠린다. 이때 한 남자가 창문을 뜯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소년+후안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여는 일이,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리틀의 공간에 후안이 들어오고 다시 후안의 공간에 리틀이 들어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로운 가족 혹은 친구 관계를 형성하고 후안을 알고 나서 리틀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한다.

바닷가에서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는 리틀의 모습을 보면 마치 바닷물의 감촉을 처음 느껴보는 아이 같아 보인다. 두려움은 이내 자유로 바뀌고 자유는 성취감을 선물한다.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후안은 흐뭇함과 기쁨의 미소를 짓고 이들의 연대감을 지켜보는 관객은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후안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남자친구와 함께 마약을 하려는 엄마를 목격한다.

 후안과 샤이론의 즐거운 한 때.

후안과 샤이론의 즐거운 한 때. ⓒ A24


소년+엄마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샤이론이라는 한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샤이론의 엄마는 차근차근 철저히 망가진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싱글 맘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마약을 손에 대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가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샤이론이 처한 현실이 더 안타까울 뿐이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소년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다. 아니, 부릴 수 없다. 엄마가 오늘은 친구(아마도 마약 동무)가 올 테니 나가서 자라고 해도, 돈 가진 것 있으면 다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러도 샤이론은 엄마를 버리지 않는다.

소년+케빈

그 어디에도 소년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제집에서 조차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서야 소년은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온수도 안 나오는 집에서 물을 데워 목욕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몸싸움을 하며 축구게임을 할 때도 소년은 쉽사리 무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고 그저,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내가 속한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체념하고 돌아설 때, 케빈이 쫓아온다.

얼굴에 난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쓱 하고 피를 닦아 버리는 호탕한 성격의 케빈은 샤이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서로 뒤엉켜 몸싸움하며 축구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샤이론은, 네가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케빈과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벌이며 친밀감을 높인다. 이때부터 샤이론은 케빈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샤이론'이라는 이름이나 '리틀'이라는 별명 대신, '블랙'이라는 자신만의 애칭으로 샤이론을 부르는 케빈을 통해 누군가에게 유일한 존재로 각인 되는 특별한 감정을 샤이론은 느끼지 않았을까.

마음 둘 곳이 없어 전철을 타고 도시를 배회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찰싹이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샤이론이 우연히 케빈을 만나 자기 내면의 섬세함과 고독을 고백하는 순간은 두 소년을 육체적으로 더 가깝게 만든다.

수줍고 행복한 밤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잠든 마약중독자 엄마다. 담요를 꺼내 엄마의 지친 육신을 덮어주는 소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후안과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상치 못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케빈과의 행복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더 큰 불행이 샤이론을 기다리
고 있다.

 샤이론과 케빈

샤이론과 케빈 ⓒ A24


소년+괴롭히는 아이들/세상

마약 중독자 싱글 맘과 함께 사는 소극적인, 게다가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흑인 남자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리고 샤이론 같은 아이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어떨까?

360도로 어지럽게 회전하는 장면들은 혼란스러운 샤이론의 마음을 잘 대변한다. 경계심 가득한 소년이 보는 세상은 자신에게 위협적이고 소년은 좁은 어깨를 한층 더 움츠린다. 약자를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다수가 한 명의 약자를 대할 때 그 태도는 짓궂거나 잔혹할 때가 많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약자를 향한 폭력이 반복될 때 그 폭력은 당연시되고 그 약자는 다수가 쉽게 대해도 되는 대상이 되어 약자 스스로도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게 된다.

불량소년 타이렐의 타깃이 되어 케빈에게(다수에 속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지만) 주먹질을 당하고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망가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샤이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몸도 마음도 상처 입은 샤이론은 타이렐을 의자로 내려치고 소년원에 수감된다.

리틀-샤이론-블랙

유약했던 소년은 이제 근육질의 마약 중개인이 되어 마이애미를 떠나 애틀랜타에 살고 있지만, 지난날의 기억들은 악몽이 되어 그의 잠을 방해한다. 애송이 마약상들을 관리하며 예전의 후안이 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블랙은 전보다 강해졌다 해도 여전히 말이 없고 수줍어하는 샤이론이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케빈의 전화를 받고 그가 일하는 식당을 방문하는 샤이론. 카메라는 차에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뒤에서 따라가며 길게 찍는다. 인물의 뒷모습을 핸드헬드로 길게 따라 찍는 장면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인물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인물의 알 수 없는 심리를 각자가 짐작하게 한다.

식당 문이 열리고 '따르릉',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면서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어 들려오는 바브라 루이스의 '헬로 스트레인져'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어색하고 복잡 미묘한 표정은 클로즈업에 담긴다. 샤이론의 시점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클로즈업은 종종 대사와 입 모양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그가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 것과도 같은 주관적인 시점을 보여준다.

 재회한 샤이론과 케빈

재회한 샤이론과 케빈 ⓒ A24


다시 '따르릉' 종이 울리고 영업이 끝난 가게 문을 닫고 두 사람은 케빈의 집으로 향한다.
케빈의 집 앞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는 지난날의 추억과 설렘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샤이론을 안아주는 케빈을 보고, 이제야 샤이론의 인생에도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구나 관객은 안심하게 된다.

리틀. 샤이론. 블랙을 연기한 세 명의 배우는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샤이론의 수줍고 소극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 세 사람은 한 명의 샤이론이다. 79년생 젊은 감독 배리 젠킨스의 탁월한 연출을 만나 배우들의 연기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고 후안 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는 아카데미에서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시나리오 작가로서 긴 시간을 보낸 감독의 거의 첫 장편영화라고 할 수 있는 <문라이트>는 대담한 스타일과 인간의 섬세한 내면을 표현하는 통찰력을 모두 갖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수상작 타이틀이 크게 와 닿지 않기 시작했는데 이번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보수적 이기로 유명한 아카데미 협회의 의외의 작품상 선정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빛 아래에서는 흑인 아이도 푸른빛을 띤다는 시적인 대사가 나오는 영화는 영화 곳곳에 파란색 오브제들이 많이 등장한다. 후안의 차, 리틀의 책가방, 리틀네 집의 소파와 벽(이는 샤이론이 청소년이 됐을 때는 흰색으로 바뀌어 있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가 입은 옷, 마지막 자신의 집에서 케빈이 갈아입은 티셔츠, 그리고 샤이론의 마음을 위로하는 바다와 달빛까지. 모두 파란색이다.

소년의 진심은 오염되지 않는다. 그의 선함은 변질하지 않는다. 마치 푸른 달빛처럼 어떤 상황에서건 무엇을 비추건 자신의 푸른빛을 고고하게 뽐낸다. 샤이론의 섬세한 마음결이 오래도록 기억이 날 것 같은 아름다운 영화다.

 달빛을 받으면 흑인 아이도 푸른빛이 되지.

달빛을 받으면 흑인 아이도 푸른빛이 되지. ⓒ A24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문라이트 아카데미 작품상 성장영화 배리 젠킨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