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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는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는 모습.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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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仙甘學院)만큼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오롯이 간직한 곳이 또 있을까?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으로 존재한 강제 수용소다. 일제가 불량행위를 하거나 할 우려가 있는 8세에서 18세 소년을 '감화(感化)' 시킨다는 목적으로 세웠다고 하니, 이 사실만으로도 강제 수용소였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8살짜리 꼬마가 자기 의지로 감화원에 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세워져 해방이 된 뒤에도 존재했고, 군사독재 시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2년에야 사라졌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위치만 봐도 섬뜩하다. 선감학원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선감도(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소다. 선감도는, 지금은 다리로 대부도, 탄도와 연결돼 육지처럼 보이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배를 타지 않고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외로운 섬이었다.

일제는 선감학원을 무척 폐쇄적으로 운영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3년 4개월간 선감도에는 선감학원 운영을 보조할 15가구 70명 정도의 주민만 거주했다. 일제가 땅을 매입한 뒤, 그 외 주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이 학원에서 벌어진 일은 그곳에 있던 사람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일제 강점기에 선감도에서 일어난 일은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가 지난 1989년 속죄하는 마음으로 낸 <아! 선감도>(1989년)라는 소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선감학원 부원감인 아버지를 따라와 선감도에서 3년여를 보냈다. 성인이 되어 자신이 목격한 선감학원 소년들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을 썼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원생들이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2년 동안 10명이나 된다. 배가 고파 아무 풀이나 먹은 탓에 위염,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아이가 많았다. 폐결핵 환자도 10명이나 됐다. 도망치다 잡혀 온 아이는 손을 뒤로 묶은 뒤 죽도(竹刀)로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등과 허벅지 엉덩이에서 쏟아진 피가 순식간에 마당에 있는 돌을 적셨다. 마침내(매를 참지 못해)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은 아이도 있었다." - 책 <아! 선감도> 속에서-

"일제, 소년들 전쟁터로 몰려고 하다가..."

정진각 역사학자, 안산 지역사회 연구소 소장
 정진각 역사학자, 안산 지역사회 연구소 소장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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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위령탑 뒤로 보이는 산(배꼽산)에 선감학원에서 생을 마감한 소년들 유해가 묻혀 있다. 약 300미터 정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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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하라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1980년대에 여러 차례 선감도를 다녀갔다. 책이 나오고 난 뒤인 지난 1996년경에는 경기도 안산시를 방문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소년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위령탑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은 정진각이라는 역사학자다. 그는 당시 한양대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안산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이하라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열정에 자극을 받아 20여 년간 선감학원에 관한 조사와 연구에 매달렸다.

"이하라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를 욕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우익한테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과감하게 진실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 소장이(65세) 선감학원 진실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그를 지난 2월 22일 안산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정 소장은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호 대상이 아닌 청소 대상으로 본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부랑아 등을 사회와 격리시키기 위해 일제가 선감학원을 설립했고, 경기도 또한 이런 이유로 선감학원을 계속 운영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일제가 아이들을 태평양 전쟁에 내몰기 위해 선감학원을 세웠으리란 의혹도 제기했다.

"선감학원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어요. 외부와의 접촉도 불가능한 지역이라 엄청난 인권유린 사태도 일어났고요. 소년들은 중노동에 시달렸어요. 20만 평에 달하는 농지를 소년들이 감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감화원의 목적을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육성하여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원을 늘리자'라고 분명하게 천명했어요. 전쟁터로 몰 계획이었는데, 전쟁이 빨리 끝나서 그러지 못한 거죠."

정 소장은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일본인 교사로 보이는 군복 입은 사람이 야외 수업을 하는 사진이었다. 칠판에 '지원병'이란 제목의 글이 쓰여 있다.

"천황폐하의 감사한 호의로 우리도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명예로운 일본의 군인이 된다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다. 나는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닦아서 훌륭한 청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원병이 되어 천황폐하의 고마운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 칠판 글 -

얼마나 죽었는지,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어

경기창작센터(옛 선감학원)에 전시된 사진, 칠판에 지원병이 되어 전선에 나가자란 글이 쓰여 있다. 삽을 총처럼 들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옛 선감학원)에 전시된 사진, 칠판에 지원병이 되어 전선에 나가자란 글이 쓰여 있다. 삽을 총처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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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지도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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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경기도가 이 시설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경기도 또한 일제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 시설을 폭력적으로 운영했다. 소년들은 선감학원에서 생지옥을 경험했다. 강제노동과 폭력, 굶주림에 시달렸고 죄수들처럼 머리를 박박 밀렸다.

도망치다 잡히면 원장 사택 마루 밑 땅굴에 갇혀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끊임없이 반성문을 써야 했다.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나 병이 들어 죽은 아이는 가마니에 둘둘 말아 선감학원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나 죽었는지 죽은 아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빠져 죽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 건넌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근(선감도 인근 섬이나 육지)에 사는 주민들도 한통속이었던 것 같아요. 도망친 아이를 발견하면 차비를 빌려 주거나 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게 아니라, 붙잡아서 자기 집 머슴으로 부려먹기도 했다. '돌아가서 맞아 죽을래, 우리 집에서 일할래?' 이런 식이었죠. 그 분들(주민들)은 그게 당연하다 생각한 거 같아요. 만나 보면 '그 때는 다 어려워서 그랬어요'라고."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이 지옥의 수용소에 경찰이나 시청 공무원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아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이나 시청 등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됩니다. 부모도 있고 학교도 다니고 있었는데 거리에 나왔다가 부랑아 취급을 받아서 끌려 온 분이 있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왔다가 손을 놓쳐 미아보호소에 있다가 끌려온 분도 있고요. 지금도 생존해 계신데, 그 분들은 자신들이 공무원한테 납치됐다 생각하고 있어요."

지옥 같은 선감학원의 기억은 소년들 삶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정 소장을 통해 알게 된 피해자들의 삶은 처절했다. 끔찍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해, 노인이 된 지금도 '다시 잡혀가는' 악몽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많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정 소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 진실 규명이 더욱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에서 저지른 폭력이니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지도자가 피해자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하고, 재발 방지까지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 치료 등을 비롯한 실질적인 지원도 필요하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박물관 건립' 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나 경기도는 선감학원의 비극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이 없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 또한 거의 없었다. 정 소장을 비롯한 뜻 있는 사람들이 선감학원의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선감학원의 비극 대부분은 아직도 피해자들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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