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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은 4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자, 송파 세 모녀의 3주기 추모제를 진행한 날입니다. 빈곤사회연대에서는 박근혜 정권 4년간 송파 세 모녀와 같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죽음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3주간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본 글은 그 중 첫번째 글로 가장 많은 복지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는 부양의무자기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두 번째 글은 사각지대를 발굴해도 제도상의 문제로 빈곤층에게 지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회복지전담 공무원과 사회복지사의 인터뷰 '찾아봤자 뭐하나',  세 번째 글은 가난한 이들에게 충분한 복지의 권리를 주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은 '가난한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이 실릴 예정입니다. - 기자 말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알려진 후 매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추모 위령제를 주관하고 있다. 사진 속 서 계신 분은 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혜용스님
▲ 송파 세모녀 3주기 추모 위령제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알려진 후 매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추모 위령제를 주관하고 있다. 사진 속 서 계신 분은 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혜용스님
ⓒ 빈곤사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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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세모녀 뿐 아니라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근로능력평가 때문에 죽어간 이들을 함께 추모하고 있다. 박근혜정권 4년간 수없이 죽어간 가난한 사람들을 함께 위로했다.
▲ 송파 세모녀 3주기 추모 위령제 위패 송파 세모녀 뿐 아니라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근로능력평가 때문에 죽어간 이들을 함께 추모하고 있다. 박근혜정권 4년간 수없이 죽어간 가난한 사람들을 함께 위로했다.
ⓒ 빈곤사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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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7일 언론 보도를 통해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알려진 지 3년이 지났다. 지난 2월 25일에는 송파 세 모녀의 3주기 추모제를 진행했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 이후 3년이 지나도록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나는 2000년부터 시행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16년 역사 동안 10년간은 조손가정 기초생활수급자였고, 지난 3년간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바꾸는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로 살아왔다.

내가 중학생일 때 집안 사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봉제공장을 하던 아버지는 동네에서 하던 공장을 청계천으로 옮겨 크게 넓혔다. 오래전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적어도 교실 세 개를 합친 크기의 큰 공장이었다. 그러나 그 공장은 곧 문을 닫았다. 인건비가 싼 국가들로 일감이 대거 몰리면서 아버지의 큰 공장은 빚더미로 돌변했다.

부모님은 이혼 후 두 분 다 집을 나갔다. 집에는 할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 세 명이 남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기초생활수급가구가 되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화장실은 있지만 욕실은 없는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그 집에서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생이 군대에 가면서 할머니와 둘이 남게 되었다.

'제도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공허한 그 말

2010년 2월, 이명박 정부는 복지 수급자들을 관리한다며 사회복지 통합전산망, 행복E음 시스템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그러나 나에게 행복E음 시스템은 행복 끊음 시스템이었다. 행복E음 시스템을 도입한 후 시행한 일제조사에서 엄마의 소득이 발견되었고, 부양의무자 기준이 적용되어 수급비가 깎였다. 당시 엄마는 나와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우리를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제 부양하고 있지 않고, 또 부양하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일괄적인 잣대로 '엄마의 소득이 이만큼이니까 얼마는 도와줄 수 있다'고 정하는 것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게 전화통화기록이 이라는 것이. 당시 용산구청 복지담당자와 통화하며 '이혼하면서 양육권도 친권도 다 포기했는데, 어떻게 부양의무가 끝까지 남을 수가 있냐. 전화 통화를 하면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제도가 그러하니 본인도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엄마 앞으로 소득신고가 된 것은 100만 원 정도. 그조차도 실제 소득이 아니고, 엄마가 일하던 가게 사장이 세금 문제로 불려서 신고한 것이었지만 소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로 인해 70만 원가량 나오던 수급비는 20만 원 가까이 깎여 할머니와 나는 둘이 수급비 50만 원을 받아 월세 20만 원을 낸 후 나머지 30만 원으로 살아야 했다. 그 돈은 두 사람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당시 빈곤사회연대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함께 구청에 항의도 해보았지만 당시엔 통화기록조차 조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10년, 내가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그 때에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117만 명이었다. 여기에 나와 할머니같이 수급비가 깎인 사람들을 포함하면 사각지대는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게다가 행복E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나와 같이 수급비가 깎이거나 탈락하는 사람들이 대거 생겼고, 2010년을 기점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계속해서 줄었으니 사각지대는 그보다 훨씬 더 넓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철저한 조사와 관리를 통해 복지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의 상황만 돌아봐도 탈락했던 사람들이 복지가 필요하지 않아서 제도의 바깥으로 내쳐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에게 내쳐진 117만 명

행복E음 시스템을 도입한 2010년 직후 수급자 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기초생활보장 수급자현황 행복E음 시스템을 도입한 2010년 직후 수급자 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E-나라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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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세 모녀의 죽음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있는 복지제도도 이렇게 국민이 몰라서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없는 제도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송파 세 모녀는, 그리고 그들과 같이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복지제도를 이용하지 못한 건 제도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까다로운 선별과정을 모두 거쳐야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가 쳐놓은 장벽 때문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이 어려워진 국민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되었다고 그 법의 목적에서 밝히고 있다. 단, 부양의무자 기준을 두고 가족으로부터 부양받는 사적부양을 우선시하고 있다. 절대빈곤에 처한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부양을 받을 수 있었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이용하려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는 엄마나 아빠가 특별히 불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등장 배경이 되었던 IMF 위기는 개인이 대비할 수 없는 삶의 위협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누구나 한 번씩 혹은 그 이상 삶의 위기를 겪는다. 그랬을 때 바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줄 안정적인 사회적 제도를 갖추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제 폐지' 피켓을 들고 참가하고 있다
▲ 송파 세모녀 3주기 추모제 참가자들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제 폐지' 피켓을 들고 참가하고 있다
ⓒ 빈곤사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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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사회연대에서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빈곤문제 해결의 1호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의 폐지는 대한민국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과제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는 것은 '복지는 국가 책임'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사적 부양으로 넘기는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된다면 국민들이 삶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이용해야 할 여러 사회 제도들의 다른 장벽들 또한 자연히 낮아질 것이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엽서를 시민분들께 받아서 각 대선 후보 캠프에 전달할 예정이다.
▲ 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에게 보내는 엽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엽서를 시민분들께 받아서 각 대선 후보 캠프에 전달할 예정이다.
ⓒ 빈곤사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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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빈곤, #복지, #송파세모녀,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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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경쟁을 강요하고 격차를 심화시키는 사회에서 발생합니다. 빈곤사회연대는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 한시적 원조나 시혜가 아닌 인간답게 살 권리, 빈곤해지지 않을 권리를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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