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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아라칸주 로힝야 거주 마을에 진입하고 있는 미얀마 무장경찰들
▲ 마을로 진압하는 미얀마 경찰들 미얀마 아라칸주 로힝야 거주 마을에 진입하고 있는 미얀마 무장경찰들
ⓒ 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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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ADI)는 2016년 미얀마 메이크틸라 무슬림 학살사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보고서와 영상을 발표하였다. 2017년 2월 유엔에 따르면 미얀마군에 의한 로힝야 사람들의 인권침해가 심각하다고 하여, 아디는 현장에 직접 활동가를 파견하여 로힝야족 인권실태조사를 진행중이다. 지면을 통하여 로힝야족의 탄압사례를 국내에 알리고자 한다. - 기자말 

"여긴 니네 나라가 아닌데 왜 여기있어. 떠나"

11월 어느 날 오후 무장한 군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마을 상공에 두대의 헬리콥터가 나타나 자동화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총성에 놀라 숲속으로 도망가려던 사람들에 군인들은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쏨술도 헬리콥터에서 날아온 두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다행히 빗맞아 살아 남았다. 살아남은 자는 지옥을 목격해야 했다.

미얀마군이 헬기에서 발포하여 두방의 총알을 맞은 쏨술, 그는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 총상을 보여주는 쏨쑬 미얀마군이 헬기에서 발포하여 두방의 총알을 맞은 쏨술, 그는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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쏨술은 군인들이 영아를 연못에 던져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무려 다섯 아이를. 자신의 아들도 군인들에게 끌려가 돌아 오지 못했다. 다만 이웃사람이 자신의 아들과 같이 죽었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장녀는 총을 맞아 죽었다. 이유도 없다. 집 앞에서 발각된 딸은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았다. 세 살 많은 친형은 손발이 묶인 채로 칼에 찔려 죽었다. 그 형의 아들 넷도 끌려가 행방을 알 수 없다. 마을의 650여 주택 중 10개만 남고 타 불태워졌다. 물론 자신의 집도. 군인들은 가축과 귀금속, 돈 등을 모두 탈취해 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들은 여기가 그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설사 이곳이 그의 나라가 아니라도 군인들에게 그의 가족을 죽일 권리는 없다. 그런데 쏨술은 여기서 나고 자랐다. 다른 곳을 가본 적도 없다.

그녀는 미얀마군 10여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 강간피해자 라미아오 그녀는 미얀마군 10여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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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당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인 라미아오의 증언이다.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여동생과 라미아오를 방에 가두고 약30분간 구타했다. 강간 시도에 맞서 저항하는 여동생과 본인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방안에 있던 10여명의 군인들은 두 여성을 집단 강간했다. 여동생은 당시 임신 7개월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군인들은 구타로 피범벅이된 남편을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뒤로 남편의 생사는 모른다. 그녀는 2살된 아들 모하마드도 잃었다. 군인 하나가 아들을 거꾸로 들어 땅에 내려 찍었다. 모하마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그녀가 모든 것을 남겨두고 집을 나서야 했을 때 모진 구타로 두 다리가 부러진 아버지도 집에 남겨졌다. 지금도 살아계신 지 확인할 수 없다. 이 엄청난 이야기를 증언하는 동안 그녀는 무표정하다. 마치 딴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 이런 그녀의 모습이 더 염려된다.

미얀마군에 의해 아버지와 사위, 딸이 실종된 알리, 그 자신도 미얀마군인에 의해 집단 구타를 당해서 왼팔을 사용하기 어렵다.
▲ 미얀마군에 의해 가족이 실종된 알리 미얀마군에 의해 아버지와 사위, 딸이 실종된 알리, 그 자신도 미얀마군인에 의해 집단 구타를 당해서 왼팔을 사용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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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군인들이 아버지와 사위를 체포해 간 뒤 행방을 알 수 없고, 군인들의 집단강간을 피해 도망간 딸도 실종된 어느 중년 남성 알리(Ali, 45)의 절규이다. 15명 가량의 군인들은 소총, 장검, 쇠막대기 등으로 무장하고 알리의 집에 들이닥쳤다. 마침 외출에서 귀가하던 알리는 이들에게 잡혀 30분간 소총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당하고 심한 내상을 입었고 왼팔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실종된 가족들의 생존을 기대해 보지만 알리는 알고있다.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군인들이 집을 불태웠을 때 이미 알리는 깨달았다. 더 이상 본인이 나서 터전을 잡고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집에서 더 이상 살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로 남은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지난 해 11월부터 방글라데시로 넘어온 미얀마 로힝야족 무슬림 난민이다. 유엔은 지난해 10월부터 70,000명이 난민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만행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이다. 군인에게 잡혀가 죽도록 맞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숲속을 2-3일간 걸어 국경을 넘어왔다. 일부는 박해를 피해 마을을 탈출한 후 피난길 도중에 군인들에게 또 붙잡혀 고초를 겪거나 이때 가족을 잃기도 했다. 대부분은 작은 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더러는 수영을 해서 국경을 넘어야 했다.

미얀마군의 집단학살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족의 난민캠프내 마을
▲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에 있는 로힝야 난민캠프 미얀마군의 집단학살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족의 난민캠프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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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구타를 당해 2-3개월이 지난 지금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고, 발을 절거나 제대로 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난민도 있다. 방글라데시로 넘어 온 후에야 주변의 도움으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사례도 있다. 이들은 등록된 또는 정식으로 인정된 난민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과 국제엔지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우선은 1990년에 넘어와 등록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선배난민들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 등록된 난민들의 사정도 녹녹지는 않다. 그래서 기껏해야 10평도 안되는 집에 10여명이 함께 살게 되는 형편이다. 이번에 새로 넘어온 이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렵다. 건강상태도 허락하지 않고, 이들은 법적으로 일할 권리도 없다. 일부는 하루벌어 하루 살아간다. 하루에 1-3달러를 벌어 생계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인근마을에 다니며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영양상태가 염려된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눈은 맑다. 그러나 크게 늘어져 있는 다크써클은 난민으로서의 삶의 고단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생동안 가꾸어 온 모든 것을 남겨두고 국경을 넘어야 했다. 이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에게 남은 것 자신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참혹한 장면, 지켜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  그리고 삶에 대한 회한 뿐이다. 군인들은 매질을 해대며, "너의 알라는 지금 뭐하냐. 너를 구하지 않고." 라고 했단다. 이들에게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우리를 기억해 달라며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는 함께 울어줄수 있는가?

덧붙이는 글 | - 이동화 기자는 아시아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아디(ADI)라는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합니다. 분쟁과 평화, 중동 관련 이슈에 관심이 많습니다.

- 다음 기사는 이번 사건의 개괄, 배경, 정부와 국제사회의 대응,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의미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태그:#로힝야족, #미얀마, #집단학살, #인종청소,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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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아디(ADI)에서 상근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디는 아시아 분쟁 재난지역에서의 피해자와 현장활동가와 함께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활동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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