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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보았다. 요즘 공중전화 부스는 그 자체로 과거 역사의 산물인 박물관 속 물건처럼 마냥 신기하게 여겨진다. 보통 사람들이 그저 공중전화의 형체를 본다면 시인은 다르다. 실제 공중전화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넘나들던 익명의 통화자들의 말의 깊이, 무게까지 감지하는 가슴을 가졌달까.

공중전화 도둑/이명윤

누가 훔쳐갔을까,
부산으로 달려가는 안부에 빙그레 웃고 광주에서 흘러온 고백에 얼굴이 빨개지기도 하다가 때론 속초에서 뻗어온 고구마줄기 같은 목소리에 그만 눈가에 이슬 맺혔을, 별보다 더 짤랑거렸을 수많은 밤을 누가 끙끙 어깨에 메고 사라졌을까,
몇 톤 트럭에도 다 실을 수 없는 구름보다 무거운 말, 돌보다 단단한 말, 단풍잎보다 붉은 말들, 어떤 가난이 그 무거운 말들을 통째로 들고 갈 수 있었을까/ 일부 137쪽

갈무리 출판사에서 펴낸 2017년 리얼리스트 100 시선집 <구름보다 무거운 말>은 시의 제목이 아니라 '공중전화 도둑'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무거운 동전이 들어있었을 공중전화 박스를 통째로 떼어 간 어느 도둑을 떠올린다.

가난한 서민들이 공중전화 부스에 매달려 동전을 끊임없이 집어넣으며 때론 그리움을 담아, 때론 사랑을 담아 때로는 분노와 하소연을 담아 가족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지인에게 전했을 말, 말, 말들의 무게와 깊이를 시인은 구름보다 무거운 무게로 느낀다.

하지만 소통의 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말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운가.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된 대통령과 최순실과 안종범, 우병우, 김기춘 등 범죄자들의 말은 또 얼마나 가볍고 경망스러운가.

시집을 펼쳐들지 않는 시대에 시인이 블랙리스트로 분류되어 침묵을 강요 당하는 시대. 쌓이고 쌓여 결국은 더 이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쏟아져 내리는 시의 눈물은 촛불의 바다를 뒤덮는 격랑의 파도가 되고 환희의 송가가 되기도 한다.

시집 <구름보다 무거운 말>에는 마흔두 명 시인의 시와 이민호 시인의 문학평론이 실려 있다. 그는 다양한 시인들의 시 모음을 "'혼밥'의 시대에 홀로 노래하는 '혼시'가 아닌 '음식은 여럿이 함께 먹어야 제격'"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어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비유해 분류해 낸다.

자본주의 시대에 시를 붙들고 현실의 격랑에 부딪쳐야 하는 시인들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들이 사람의 삶, 소통의 삶을 선택하고 노래하는 대가는 현실의 가난의 무게다. 하지만 시인들은 상실감으로 주저앉지도 절망하지도 않고 침묵하지도 않는다. 끈질긴 생명의 끈을 붙들고 꿈꾸고 견디며 새봄을 꽃피울 준비를 한다.

이민호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상실, 침묵, 그늘, 상처, 무지, 헌신 속에서 꿈을 꾸고, 깊어지고, 꽃을 피우며 향기를 담고, 생명의 일관성을 깨닫고, 슬픔을 견딘 리얼리스트가 내오는 전체는 비릿하지만 따뜻하다'고 평하고 있다.

갈 수 없는 나라* 정하선

팽목항을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똥을 누고 밥을 먹고 연애를 했다
아이들이 보낸 마지막 문자
"엄마 사랑해'를 떠올리면서
바다 속 지문이 새겨진 소금문자를
옛 애인에게 복사해서 보냈다
최순실과 안종범 수석은 서로 모르듯
팽목항 유족들의 배식을 받으며
내 죄를 곱씹어 먹었고
누군가 내 얼굴만 봐도 모른다 했고
그 후 여러 날 또 침몰한 배의
녹슨 쇠가 쇠를 서로 파먹듯
목포의 먹갈치횟집을 찾아다니며
갈치생선 살을 발라 먹엇고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세 번 모른다 했듯
나 또한 끝내 부정하리라
7시간** 동안 너희는 어디에 있었느냐 / 전문 180쪽

* 갈 수 없는 나라 – 조해일 소설에서 빌려옴.
**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오후 5시 박근혜 대통령 7시간.

전체로 시작한 시의 밥상은 '강렬한 맛, 분명한 맛, 깊은 맛, 입안을 헹궈주는 개운한 맛, 삶을 견인하고 조이고, 접고 닦는 행위로 구체화 된 저항의 맛, 입 주위에 묻은 것을 말끔히 훔치고 역사의 쓰레기장 아우게이아스의 식당을 나서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시인에게 시를 짓는 일은 날마다 밥을 지어 식탁을 차리고, 씨실과 날실로 한 올 한 올 소중한 삶의 집을 엮어가는 일에 다름아닐 것이다. 시인이 현실의 삶을 외면한 채 이슬과 햇살과 바람과 이상만으로 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얼리스트 100(평등, 평화, 행동하는 작가네트워크) 시인들이 차린 밥상에서 송로 버섯이나 상어지느러미, 값비싼 루왁 커피 향은 맛볼 수 없다. 대신 질기고 강인한 생명의 힘, 때론 접히고 굽고, 때론 넝마처럼 후줄근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역사와 희망의 끈 한 줄기를 붙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꼭 순서를 따라 맛을 볼 필요는 없다. 위로가 필요할 때 적당한 맛을 골라 삶의 에너지를 채우면 될 일이다.

성주군청 앞마당에서/김해자

요래요래, 목욕탕 가방 딱 열고, 돗자리 척 깔고, 물통 탁 내놓고, 머리띠 턱 내고, 딱 짜매면 준비 끝이다카이. 할매요, 참말로 전문시위꾼 다 됐네여, 어찌 머리띠를 그라고 잘 묶는겨? 이골났다 아이가, 살아 바라, 머리 짜맬 일이 얼매나 많은고.
저 바라, 찍는 거, 저거 온데 방송 다 나간단다. 그라믄 화장 좀 해가 나와야겠데이. 깜깜한데 비나? 화장 안 해도 된다. 소리나 크게 지르면 된다. "가족은 가족이다 사드 때문에 헤어지지 말자!"

옮겼다매? 거그도 성주잖아. 그기 환영한다꼬 기자회견도 하고 했단다. 그 새끼 빙신 아이가. 그기 뭐 정신이 제대로 박힜나? 여서 싫다 했는데 거그서는 좋다 한다꼬? 내 싫은 거 옆집에 줘놓고 좋다 한데이. 이놈의 시끼 인간이 되나? 다 끄집어내려야 헌다, 그런 새끼들은.
그라고 사드가 좋으면 저거 조상 묘 앞에 세우든가, 청와대로 갖고 가서 지 혼자 끌어안고 죽든가. 고마 살던 대로 살게 지발 좀 냅두라. "이웃은 이웃이다 사드 때문에 갈라서지 말자!"

조 만데이 요 만데이 양짝 질만 막으면 사드는 못 간데이. 그래도 갈라카만 고만 내가 질에 들누불끼다. 이럴 줄 알고 뽑았겠나? 아고 내사 마, 찍은 손가락 깔아 뽀사뿔고 싶다.
사드 들오게 해 주면 지하철도 주고 공항도 맹글어준다 카던데. 그라믄 참외밭에 뱅기 타고 가까? 입 꿰매부릴라, 그기 암까무구인지 숫까마구인지 알끼 머고. "참외 사 먹겠다 헛소리 말고 사드배치 참회해라!"

떡도 주제, 감빵도 주제, 노래도 하제, 머라 외치쌌제,얼매나 재밌노? 집에 있으믄 깜깜하니 혼차 테리비만 보고 심심한데 여그 나오면 얼매나 좋노. 야야 떡도 참말로 맛있데이, 날매다 일곱 가매나 한단다. 살 값이 개사료 값만 모 하다 아이가, 참말로 개누리라 카이.
쟈덜은 육교사변도 안 겪어 밨나? 하늘 땅 어데를 바라, 무기 갖꼬 평화 지키는 디가 어딨다꼬, 참말로 골치 아프데이. 야야 살아 바라, 머리 짜맬 일이 얼매나 많은고. "내사 딴 기는 모리겠고 끝까지 투쟁이데이!"/전문 58~59쪽 

덧붙이는 글 | 구름보다 무거운 말/ 2017년 리얼리스트 100 시선집/ 갈무리/ 13,000원



구름보다 무거운 말 - 2017년 리얼리스트 100 시선집

리얼리스트 100 지음, 갈무리(2017)


태그:#리얼리스트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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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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