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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거리 한편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승동교회.
 서울 인사동 거리 한편에 숨은 듯 자리하고 있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승동교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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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지나 인사동 거리로 접어드는 초입에 100년이 넘은 오래된 예배당 승동교회(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7-1)가 있다.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인사동 거리 한편에서 숨은 듯 자리하고 있는 교회다. 이정표를 따라 교회 입구 골목으로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주위가 고요해진다. 교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담벼락 게시판을 지나면 붉은 벽돌을 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아담한 교회가 나타난다. 

1912년 지어진 승동교회는 일제가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일환으로 이 땅의 지명을 새로 지으면서 생겨난 동네 인사동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터줏대감이다. 이 교회의 오랜 역사는 '승동'이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다.

승동교회가 생겨난 자리는 서울 중앙 종로 한복판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 137번지)이라는 동네였다. 절골 또는 사동(寺洞)이란 동네 이름은 고찰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도 했다. 이후 교회의 한자 이름은 현재의 '勝(이길 승)洞'으로 바뀌었다.

* 참고 : 서울 종로구 인사동은 관인방(寬仁坊)의 '인'자와 옆 동네 대사동(大寺洞)의 '사'를 강제 결합시켜 지은 합성 지명이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이 있었다. 방(坊)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수도의 행정 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말한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표현의 유래가 된 말이다.

붉은 벽돌과 종탑이 있는 아담하고 정겨운 교회

인사동 거리와 승동교회를 이어주는 작은 뒷골목.
 인사동 거리와 승동교회를 이어주는 작은 뒷골목.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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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로운 종탑이 서있어 교회가 정겹게 느껴진다.
 이채로운 종탑이 서있어 교회가 정겹게 느껴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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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풍이라고 하는 반원형 아치 모양의 큰 창문이 붙어있는 붉은 벽돌에 교회 마당엔 보기 드문 종탑이 서있다. 왠지 오래된 간이역 같은 정겨움이 느껴졌다. 교회 마당엔 앉아 가기 좋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마련돼 있어 종탑을 바라보며 종소리를 상상하며 쉬어가기 좋았다. 교회입구에 관리실이 있지만 누구나 오갈 수 있도록 정문은 물론 후문도 열어 놓았다.

교회의 몸체를 두른 붉은 벽돌은 군데군데 색깔이 다르다. 한양도성 성곽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개보수를 한 흔적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제130호)이기도 한 이 교회는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 편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19년 2월 당시 교회 1층 밀실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을 중심으로 경성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20여 명이 모여 3.1독립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모의했다. 2월 28일 밤엔 1500장의 독립선언문을 경성 각처로 배포한다. 교회의 위치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할 탑골공원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진행을 돕는 데 쉬웠기 때문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학생 대표였던 김원벽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투옥되자 당시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12인의 장서'를 과감히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용감한 학생들

3.1독립운동 유적지를 기념해 만든 표지석이 교회 안에 있다.
 3.1독립운동 유적지를 기념해 만든 표지석이 교회 안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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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승동교회 청년회장 김원벽과 차상진 목사.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승동교회 청년회장 김원벽과 차상진 목사.
ⓒ 교회내 안내 게시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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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생들은 민족대표 33인이라 불리는 어른들보다 더 큰 용기를 내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년 3.1일 토요일 민족대표와 학생대표들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종로 탑골공원(당시엔 파고다 공원)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33명이 아닌 29명만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인근 서양식 요리집이었던 태화관(現 태화빌딩, 인사동 194-27)에 모인다. 이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수를 했고, 전화를 받고 온 일본 헌병과 순사들에 연행되어 경무 총감부로 들어갔다.

이일은 어떤 징조였을까. 민족대표 대부분은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선다.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여든 군중에게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마침내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다. 

학생들에 의해 불처럼 번진 3.1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 이어 중소도시와 농촌까지 확산된다. 3.1독립운동은 일제에 의해 총 7500여명이나 죽고 체포된 사람만 4만 5천여 명이나 되는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엔 계몽운동, 무장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한일강제병합의 해인 1910부터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를 했던 일제는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1919-1930)로 식민지 정책을 바꾼다.   

또한 승동교회에서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민족의 아픈 역사 속 특별한 의미 때문인지 여느 교회당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곳이다.

덧붙이는 글 | ㅇ 지난 2월 25일에 다녀 왔습니다.
ㅇ 찾아가기 : 서울 1호선 전철 종로3가역 1번 출구 - 탑골공원 - 승동교회
ㅇ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3.1독립만세운동, #승동교회, #기미독립선언서, #김원벽, #민족대표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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