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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탄광 도시인 강원도 태백.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모여든 광부들과 가족들이 있었다. 밤에도 불야성을 이룰 만큼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한산해졌다. 1968년에 그곳 태백에서 태어난 반영숙은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 자격증을 딴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광부였던 아버지와 같은 탄광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상담소 간사로 산재 상담을 했다. 그이는 1991년 즈음에 김성수라는 한 남자를 만나 새 삶을 꿈꾸면서 그곳을 떠났다. 좌충우돌, 거듭된 실패, 하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자신들만 잘사는 사회가 아닌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꿈꾸며 활동하는 삶을 살아왔다.

2007년, 그이들은 강릉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반영숙은 밤에는 간호사 일을 하고, 남편 김성수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과수원 농사를 짓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면 "다 잘 될 거야. 어떻게든 살아" 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이들의 일생을 돌아본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언니 오빠 동생들과 난생처음 가족사진
▲ 초등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언니 오빠 동생들과 난생처음 가족사진
ⓒ 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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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4학년 때 오빠랑 동생과 함께
▲ 초등 4학년 때 초등4학년 때 오빠랑 동생과 함께
ⓒ 사진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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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의 딸

충북 음성이 고향인 아버지가 논밭을 담보로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수가 없어 태백으로 들어왔다. 반영숙은 1968년에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태탄광 광부로 일했다. 그 당시 탄광 경기가 좋아 외지에서 와도 석 달만 고생하면 사택에 들어갈 수 있었고, 구판장에서 두부 돼지고기 쌀이 배급 나와서 최소한 굶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두부와 돼지고기 몇 근, 연탄 200장도 배급받았다.

그곳 어른들은, 딸들은 여상을 졸업하고 광업소 경리를 하다가 시집가는 게 가장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들 대부분은 여상으로 진학하거나 야간학교를 보내 주는 공장에 취직했다. 반영숙은 그런 삶을 벗어나고 싶어 떼를 써서 인문계를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대학을 가겠다고 7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

여자가 대학이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하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반영숙을 대학에 보내준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붙었다. 반영숙이 가고 싶은 과가 국문과였는데 아버지는 나중에 밥벌이하고 살 수 있는 자격증이 있는 과로 선택하라는 거였다. 반영숙은 결국 합격한 대학을 포기하고 강릉간호전문대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다. 간호과는 적성에 안 맞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영숙은 글 쓰는 걸 좋아해서 학보사 기자를 했다. 당시 전두환의 폭압적인 군사 정권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날마다 시위가 일어났다. 강릉간호전문대에서도 늘 학내 투쟁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학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학교는 여전히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 재단 비리를 저지르고 있던 한보 정태수가 이사장이었다. 정태수는 수서 비리, 대통령 비자금 사건, 한보 비리 등으로 다섯 차례나 징역형을 선고받은 악덕 기업주다.

"교수 임용권부터 학생복지 관련 일체 어떤 것도 관여하지 못하는 고등학교 수준도 안 되는 학교였다. 항의하면 보복하는 교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 학교는 70년대 형태라고 보면 된다."

반영숙은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민중문학을 알게 됐다. 학교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문학상도 받았다. 반영숙은 글을 쓰면서 세상이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절로 운동권 학생이 됐다.

성완희 항거 분신 한겨레 기사
▲ 성완희 항거 분신 성완희 항거 분신 한겨레 기사
ⓒ 한겨레 기사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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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대학 3학년 때인 6월 29일,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강원탄광 노동자 성완희가 회사의 노동탄압에 맞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1년에 10명 중 한 명이 죽거나 다쳐 나간다는 탄광. 사무직 노동자의 일곱 배의 중노동이 뒤따르는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조건에도 한마디의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군사정권 시절 만들어진 탄광의 어용노조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묵살하고 노동현장에서 터지는 불만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작업량 조작을 통한 임금갈취, 부당해고 등이 일상적으로 자행됐다. 노조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은 가차 없이 해고됐다. 성씨는 입원한 지 9일 만인 7월 8일 숨졌다. 그의 죽음은 회사와 경찰, 공기관, 심지어 지역 상인들까지 결탁해 노동자들을 착취해 온 어용노조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었다.

성완희의 분신은 전태일의 분신처럼 오래도록 침묵해 있던 노동자들을 일깨웠고 노조 집행부에 대한 퇴진운동으로 이어졌다. 원주 지역 대학생들은 연세대 원주의대에 모여 강원탄광의 인권 탄압의 진상을 밝히라고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며 치열하게 싸웠다. 반영숙도 그런 데모에 늘 끼어 있었다. 성완희의 안타까운 죽음은 결국 어용 노조위원장을 사퇴시킬 수 있었다.

소설 《파업》을 쓴 안재성은 성완희 열사의 복직 투쟁을 계기로 인연을 맺고 당시 광산지역 사회선교협의회 노동상담소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반영숙은 성완희 열사 노제를 치르면서 그곳에 머물러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안재성과 반영숙은 나중에 같이 일하게 된다.

"학생들하고 같이 연대해서 원주대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노제를 진행하면서 아빠와 같은 삶을 사는 탄광에 가서 뭐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이팅게일 서약식을 하던 날
▲ 나이팅게일 서약식을 하던 날 나이팅게일 서약식을 하던 날
ⓒ 사진 제공- 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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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숙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취업했다. 다친 사람들, 진폐증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광부들의 어려운 삶을 몸으로 깨닫고 간호사를 그만두고 광산으로 갔다. 이때 노동상담소 국장을 지내던 안재성과 만나게 된다.

"노조 활동하면서 어려운 일을 상담하거나, 주로 산재 상담을 도와드리고, 산재를 인정받도록 회사와 싸우는 일을 했다. 사실 광부들의 고충을 들으면서 같이 술 먹은 기억밖에 없다. 하루에 30여 명 가까이 갑을병 교대로 찾아와 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웃음) 광부들은 3교대였다. 아침 10시, 오후 4시, 밤 12시에 주르르 오신다. 주로 큰 대응은 선배들이 하고 나는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성완희 추모기념 사업회가 설립됐다. 안재성은 사무국장, 반영숙은 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반영숙은 타이핑해서 등사기로 밀어 노보를 만들어 주는 일을 주로 했다. 대자보 쓰는 건 지금도 자신이 있다.

"1주기 추모제를 하면서 그때 처음으로 추모시를 썼다. 지금도 행사에 가면 그 시를 낭독한다."

너를 만나리라, 반영숙

광산쟁이답게/ 우직하고 타협할 줄 몰랐던/ 마음 여리고 착해 터진 너는/ 이 사회의 모순 앞에/ 얼른 다가서지 않는 울분을/ 무너져 버린 억장을/ 고스란히/ 네 온몸으로 부둥켜안으려 했다

이 돌구지 탄촌에서/ 에라, 댓병 소주로 하얀 밤/ 그렇게 쓰린 속을/ 탄가루 엉켜 붙은 목구멍을 씻어 내리던 네가/ 비틀거리며/ 자꾸 휘청거리며/ 더 깊은 갱을/ 내려가고 또 올라가고 하던 네가/ 부당하게 막힌 갱도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춘 채/ 여느 때처럼/ 꾸부정한 자세로/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끝까지 함께 싸우자던 네가

우리들의/ 그 숱한 눈물과 탄식 속에서도/ 정작 외로웠던 가슴으로/ 치 떨리는 주먹을/ 끝내는 짓밟힌 설움을 불살라버린/ 사정없이 불살라 버린/ 완희야,/ 불에 데인/ 자꾸만 감겨 오는 두 눈 속에/ 입술마저 아예 문드러져 버린/ 막힌 기도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신음처럼 내뱉는 소리/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우리에게 민주노조가 있었다면/ 이런 아픔은 없었을 거라고

그래, 완희야/ 이젠 더 이상 더 이상/ 캡프 불빛 속의 속수무책 탄 먼지들도/ 서늘하게 울려대는 괴물 같은 삭도의 덜컹거림도,/ 시큰거리는 어깨 위로 하루하루 버팀해 나가는 동발 한 틀 한 틀도/ 절망의 몸짓들이길 거부하고/ 숨죽임의 몸짓들이길 거부하였다(1989년)

1989년 여름 성완희기념사업회사무실에서 한보탄광 막장 안 단식농성을 알리는 대자보 쓰는 중
▲ 대자보 1989년 여름 성완희기념사업회사무실에서 한보탄광 막장 안 단식농성을 알리는 대자보 쓰는 중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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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봄, 민중당정선지구당 장기표선생 강연회에서 광산노동자들과 함께
▲ 장기표 선생 강연 1991년 봄, 민중당정선지구당 장기표선생 강연회에서 광산노동자들과 함께
ⓒ 사진 제공- 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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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고한 사택으로 선전전 가던 길
▲ 1990년 고한 사택으로 선전전 가던 길 1990년 고한 사택으로 선전전 가던 길
ⓒ 사진 제공- 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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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에 이어 정권을 잡은 노태우 독재정권은 추모제를 지낸 이들조차 불순 세력으로 몰았다. 1주기 추모제를 연 뒤 관련자 수배령이 떨어졌다. 어느 날 반영숙은 잡혔지만 경찰은 4일 동안 조사만 하다가 초범이라고 내보내 줬다. 안재성은 3년 뒤, 소설 《파업》을 낸 뒤에 경찰에 잡혀 국가보안법으로 두 번째 구속을 당했다.

병원에 취업해서 일하는 줄 알았던 반영숙이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집에서 알았다. 오빠한테 잡혀 집에 갇혀 있던 반영숙은 강원도 정선으로 도망쳤다. 안재성의 후배들이 고한과 사북의 삼척탄좌, 동원탄좌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노동조건 개선을 추진하는 모임 '노개추'도 결성하고 소식지도 만들었다. 감시가 심했다. 술집에 모여만 있어도 찍히는 시대였다.

1990년 해고노동자돕기 모금운동 건으로 광부 성희직이 해고당했다. 성희직은 서울, 태백 등지에서 동발을 메고 기어가는 최초의 '갱목시위' 등으로 석 달 만에 복직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위 주동 혐의로 2차 해고를 당했다. 성희직은 1989년에는 여의도 평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다가 광산작업용 도끼로 왼손 검지와 중지를 자르면서 광산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몸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성희직 도의원 당선 동아일보 기사
▲ 성희직 도의원 당선 기사 성희직 도의원 당선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기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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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선물, 처음이자 마지막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석탄산업합리화'라는 석탄 산업 조정 정책으로 탄광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탄광은 점점 없어졌고, 태백 선수촌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1991년 지자체 선거가 처음 시작되던 4월 즈음 진보정당이 창당됐다. 반영숙은 다시 사북천주교노동사목과 민중당 정선지구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민중당으로 성희직 씨가 도의원에 출마했다. 반영숙은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한 남자가 왔다.

"지원이 아니었다. 연애 사업하러 갔다. 하하하 !"

서강대 휴학 중에 있는 김성수였다. 반영숙은 그 사람 본명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운동하는 학생들은 가명을 쓰는 이들이 많았다. 반영숙은 선거 홍보물을 인쇄하기 위하여 충무로를 자주 오갔다. 교통이 안 좋을 때라 서울을 한 번 가려면 다섯 시간씩 걸렸다.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 때가 많았다. 반영숙은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에서 일이 끝나면 자연스레 서울에서 지원 나온 김성수와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강경대가 서울시경 4기동대 소속 전경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숨졌을 때 대한극장 앞에서 투쟁을 하던 5, 6월에는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다.

어느 날 최루탄 맞으면서 하루 종일 데모를 하다가 반영숙이 정선 선거 사무실로 가기 위해 밤 10시에 정선을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김성수가 배웅해 주기로 했는데 시위를 하다 보니 약속 시간이 빠듯했다.

"그때 가장 클라이막스였다. 시청역에서 내려 갈아타려고 뛰는데 웬 할머니가 꽃을 팔고 있었다. 달리다 말고 찌지직! 돌아서서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때가 선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반영숙을 사랑하는 감정이 싹텄을까? 그때는 미안하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반영숙은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김성수 자신이었다. 김성수가 보기에 혼자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최루탄 가스 마시면서 데모하고 혼자서 쓸쓸하게 그 먼 정선을 가야 하는 반영숙을 보니 가슴이 싸했다.

반영숙은 기차역에서 남자한테 그런 꽃 선물을 처음 받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그동안 탄광노동자들, 무뚝뚝한 남성들 사이에 있다 보니까 그 상황이 낯설었고 신기했다. 탄광노동자들이 나를 엄청 아낀다고 챙겨준다는 게 삼겸살 댓 근, 돼지 껍데기에 소주 댓병 가지고 온다. 그렇게 갑을병 3교대로 찾아오니 내 위장이 빵꾸 날 정도였는데 꽃이라니, 게다가 사근사근한 서울 남자…."

김성수는 착하고 성실하고 순박했다. 반영숙은 김성수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연애는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선배들도 "지금 혁명의 시대인데 그런데 틈을 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노동운동을 했는데 이런 설레는 감정을 느껴도 되나 싶었다. 이렇게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마음을 여는 데까지 오래 걸렸다.

그동안 선거운동을 했던 성희직이 강원도 정선에서 도의원에 당선됐다. 진보정당으로는 최초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것이다. "당선"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했을 때 둘레에 있던 동료들, 운동원들은 모두 서로 부둥켜안고 껑충껑충 뛰며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우리 결혼할 겁니다

그런데 얼마 뒤 반영숙은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정선을 떠난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광산  선배들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야? 떠나다니?", "성희직이 도의원에 당선됐는데,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여길 떠나면 어떻게 해?"  옆에는 김성수가 있었다.

"우리 결혼할 겁니다."

광산 선배들은 기함했다. 반영숙은 스물네 살, 김성수는 스물여섯 살, 게다가 아직 학생 신분, 노동운동을 하느라 휴학 중이었다. 결국 두 사람 결심을 꺾지 못했다.

1991년 10월 10일 김성수는 반영숙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갔다. 집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결혼하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성수는 혼자 소주를 몇 잔 먹고 용감하게 들어갔다. 반영숙 아버지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다. 김성수가 앉자마자 "난 나간다!" 하고 나가 버렸다.

예상했던 일이다. 김성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기다렸다. 반영숙 아버지가 네 시간 만에 다시 들어왔다. 그때까지 김성수는 무릎을 꿇은 채였다. 발이 저려 감각이 없었다. 반영숙 어머니와 언니가 김성수 편을 들어줬다. 언니가 먼저 말했다. "아빠, 그래도 사람이 착한 거 같아. 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어머니도 거들었다. "여보, 둘이 저렇게 좋다는데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한마디 했다.

"나는 결혼하더라도 한 푼도 도와줄 수 없네."

김성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김성수는 큰절을 드렸다. 반영숙을 데리고 나왔더니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이 따라 나왔다. 그런데 당장 차비가 없었다. 김성수는 반영숙 동생한테 돈 30만 원을 빌렸다. 그게 두 사람 총 재산이었다. 김성수와 반영숙은 늦가을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기차를 타러 갔다. 반영숙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걱정이 됐지만 김성수를 믿었다.

밤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하니 새벽이었다. 무작정 간 곳이 부평이었다. 김성수가 말했다.

"우리 당분간 여관에서 생활하면 어떨까?"

반영숙은 눈물이 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한번 쏟아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김성수는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반영숙을 달래고 근처에 집들을 알아보고 다녔다. 갈산 시장 근처 전봇대에 붙은 광고가 보였다. "보증금, 30만 원? 저기로 한번 가 보자."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집주인이 "좀 전에 나갔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하고 말했다.

그분이 소개해 준 집은 조그만 연립이었다. 주인집 할아버지가 대우전자 대리점 사장이었다. 가진 돈 30만 원을 보증금으로 내고 나니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주인 할아버지가 달랑 몸만 있는 두 사람이 안쓰러웠는지 이불을 그냥 줬다. 다음날엔 "이건 나중에 갚아라" 하면서 가스레인지를 줬다.

1991년  가을  결혼 허락 받으러 가던 날
▲ 1991년 가을 1991년 가을 결혼 허락 받으러 가던 날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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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유원지 소풍. “나 잡아봐라” 하면서 놀았다
▲ 1993년 유원지 소풍 1993년 유원지 소풍. “나 잡아봐라” 하면서 놀았다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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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는 방을 구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았다. 마침 바로 근처에 공사장이 있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노가다'는 처음이었다.

"거푸집에서 바라시한 걸 트럭에다 싣는 상차하는 작업이었는데 하루에 열 번씩 못에 찔려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처음 3일은 온몸이 쑤셨다. 한 달 일하고 났더니 몸무게가 58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김성수는 한 달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이라고 주인 할아버지가 프라이팬, 냉장고도 주셨다. 부부는 일이 끝나면 저녁엔 현장에서 가져 온 땔감으로 군고구마를 팔았다. 몸은 힘들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던 이들을 국가는 가만 놔두지 않았다. 기무사에서 남편을 탐문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도바리 다니느라 3개월 동안 고생했다."

'도바리'는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인 사람들이 검거망을 피해 도망치던 것을 가리키던 은어이다.

1990년도 민자당 합당하고 시민들의 저항이 거셀 때였다. 정권은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조직 사건을 터트렸다. 거기 걸리면 빼도박도 못했다. 친구한테 집을 부탁해 놓고 피했다. 3개월 동안 도망 다니고 나니 모든 연락이 끊겼다. 차비가 떨어진 김성수는 영등포에서 부천역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반영숙은 애가 탔다. 어느 날은 김성수가 온다는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해 받고 부천역에서 네 시간 동안 마냥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남편이 그동안 지내면서 공중전화박스에서 잠을 잔 이야기를 하는데 반영숙은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공중전화박스에서 잠을 잤다는 말 들으니까."

김성수는 아내에게 태평스러운 척했다. 신문지만 있으면 바람이 안 불어서 좋다고 하면서 공중전화박스에서 웅크리면서 잠자던 모습을 재연했다. 반영숙은 원망스러운 듯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집으로 들어간 것은 봄이었다.

김성수는 다시 복학했고, 반영숙은 병원 간호사로 취직했다. 생활비, 학비, 월세를 혼자 벌면서 김성수의 뒷바라지를 했다. 반영숙은 그 집에서 3년 반 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김성수를 졸업시켰고 월세를 전세로 바꿨다. 집에는 날마다 후배들이 찾아왔다.

"부평장 여관 같았다. 후배들이 허구헌날 와서 죽치고 쌀이 떨어지면 간다. 웬수들이었지만 오면 반가웠다. 만나서 얘기하고 문학 토론도 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서 이사했다. 반영숙은 그렇게 싫어하던 간호사 일이 새삼 고마웠다.

부부는 살림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 다시 시민활동을 한다. 처음 들어갔던 단체가 진보정당추진위였다. 딱히 맡은 직책은 없었다. 반영숙은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김성수가 다니는 학원에서 강사로 들어갔다. 간호사 일을 해서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남편이 하는 학원 강사 일이 재밌어 보였다. 과학 공부를 한 뒤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쳤다. 반영숙은 두 달 안 된 애기를 이웃집에 돌리면서 맡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벌어 부평에 경매가 들어간 아파트를 샀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내 집'을 가지게 됐다고 좋아했다.

"집을 사서 기분이 좋아 술을 먹었다. 그때 둘째가 생겼다. 하하하."

김성수는 학원에서 실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학원에서 아이들을 줄인다고 하면서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만 남기려고 했다. 낙오되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학원을 냈다. 수강생들은 몇 명 안 되는데 채용한 학원 강사들 대우를 제대로 해 줘야 한다고 월급을 후하게 줬다. 그 당시 180만 원. 교사가 다섯 명이었다. 망할 수밖에 없었다.

"쓴맛을 봤다. 1년 반 버티다 말아먹었다. 인테리어 비용만 7, 8백만 원 들었는데. 에어컨 하나당 30만 원 샀던 걸 3만 원 받고 팔았다. 마지막에 강사 월급을 주려고 집을 처분했다. 은행권 대출을 할 수 있는 대로 다 받아 신용불량자가 됐다."

둘째가 태어날 무렵이었는데 집을 뺏기고 월세로 가야 했다. 원룸으로 이사를 간 뒤 반영숙은 다시 병원 간호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김성수는 인터넷방송국도 운영해 봤다. 하지만 또 망했다. 다시 쓴맛을 보고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종로엠스쿨, 학림학원 등 몇 군데를 옮겨 다녔다.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는데 10년 동안 갚아 2007년에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다.

그 밖에도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에서도 활동했는데 너무 많아서인지 둘 다 기억하지 못한다.

2009년 1월 21일 용산 철거 투쟁에 함께한 김성수. 서울에서 각종 집회에 참석하고 투쟁할 때 연행돼 받은 벌금을 지금까지 합치면 천만 원이 넘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택 쌍용차 투쟁하던 여름에 방학한 아들 영화 보여 준다고 데리고 가서는 아들 준이가 보는 앞에서 강제 연행되는 바람에 아들이 울면서 혼자 내려왔던 일이다.
▲ 용산 철거 투쟁에 함께한 김성수 2009년 1월 21일 용산 철거 투쟁에 함께한 김성수. 서울에서 각종 집회에 참석하고 투쟁할 때 연행돼 받은 벌금을 지금까지 합치면 천만 원이 넘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택 쌍용차 투쟁하던 여름에 방학한 아들 영화 보여 준다고 데리고 가서는 아들 준이가 보는 앞에서 강제 연행되는 바람에 아들이 울면서 혼자 내려왔던 일이다.
ⓒ 사진 제공- 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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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2007년 3월 반영숙이 보건복지부 산하 강원도 아동 복지교사지원을 총괄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귀촌은 해도 귀농은 못한다"는 김성수를 설득해 두 사람은 강릉 주문진으로 내려왔다. 강릉에는 남자들 일거리가 없었다. 김성수는 강릉에서 학원 강사를 6개월 동안 하더니 다시 서울로 가 버렸다.

반영숙은 주문진으로 와서도 평범하게 살지 않았다. 아동복지센터 임기가 끝날 무렵, 2010년에 민병희가 교육감에 출마했다. 반영숙은 교육이 제대로 서야 한다는 마음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민병희가 교육감에 당선됐다. 선거가 끝난 뒤 반영숙은 참교육학부모회, 교육희망네트워크와 같은 학부모 조직을 만들었다. 강릉에서 전교조 이후로 처음 시작된 교육운동이었다. 이곳에서도 반영숙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강릉학부모회를 조직하면서 그때 처음 교육운동을 했다. 젊은 교사들하고 젊은 엄마들하고 작은 학교 살리기, 혁신학교 만들기도 했다. 우리 아이도 일부러 시골학교로 보냈다. 없어질 뻔한 운양초가 지금은 엄청나게 커졌다. 또 포남초는 도심공동화 때문에 예전에 번영했던 마을이 학급수가 줄어 수급자나 한부모가정 아이들이 많았다. 교사들과 협력해 혁신학교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강릉에는 학교 중심 지역 교육 공동체가 형성됐다. 강원교육연대활동을 하면서 중학교까지 무상급식이 이루어졌고 고교 평준화가 시행됐다. 포남초 교사들은 지난 2016년에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다 학교를 바꾸다!》(에듀니티)라는 책도 냈다. 이 책은 포남초등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과 혁신학교로 지정된 이후 4년 동안 어떻게 학교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즈음 김성수는 서울에서 민주노동당 민생희망본부에서 민생 상담을 맡고 있었다. 용산범대위나 평택의 쌍용차 해고자 투쟁, KBS 노조 파업 현장 같은 데서 싸움만 있으면 잡혀갔다. 그동안 낸 벌금만도 천만 원이 넘는다.

반영숙은 남편이 보고 싶었다. 딸도 사춘기가 되면서 외로움을 탔다. 반영숙은 아빠가 옆에 있어 줘야 된다는 핑계를 대고 남편한테 강릉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김성수는 서울 일을 접고 강릉으로 내려왔다. 오자마자 체험마을 사무장 일을 맡았다. 때마침 구정골프장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긴 남쪽 끝, 김성수가 살던 장덕리가 아니었지만 구정골프장 설립반대투쟁공대위 사무장을 맡았다. 농성장과 구정마을을 3년여 동안 허구헌날 제집 드나들 듯 다니며 주민들과 투쟁해 결국 골프장 건설을 막아냈다. 반영숙이 웃으면서 증언해 준다.

"그쪽 마을 사람들이 남편이 가면, 날라리 사무장 왔냐며 엄청 예뻐한다."

남편과 그 싸움을 같이했던 반영숙은 부녀회 회원들하고 꾸러미 법인을 만들었다. 거기서도 반영숙은 사무장을 했다. 2년 동안 그곳으로 출퇴근했지만 인건비를 만들어내기 어려워 꾸러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반영숙은 한 달에 교통비 6만 원을 받고 정성을 쏟았지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남편 김성수는 강릉으로 내려가자마자 구정골프장 반대투쟁에 나섰다.
▲ 구정골프장반대농성장철거 항의 남편 김성수는 강릉으로 내려가자마자 구정골프장 반대투쟁에 나섰다.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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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골프장 반대 집회하는데 딸 하진이가 촬영하고 있다. 그 부모의 그 딸.
▲ 구정골프장 반대 집회 촬영하는 딸 하진 구정골프장 반대 집회하는데 딸 하진이가 촬영하고 있다. 그 부모의 그 딸.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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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세월호 기억 도보 행진
▲ 세월호 기억 도보 행진 2014년 8월 세월호 기억 도보 행진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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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세월호 기억의 밤
▲ 세월호 기억의 밤 2016년 세월호 기억의 밤
ⓒ 사진 제공-반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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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농민대회에 참가한 김성수
▲ 2015년 11월 14일 농민대회 2015년 11월 14일 농민대회에 참가한 김성수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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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이렇게 돈이 안 될 줄 몰랐다


반영숙은 광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었다. 싹이 움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이런 고향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몇 번이나 했다.


"이 마을이 따스하고 좋다. 봄여름가을겨울 이런 데 붙박이로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편에게 농사를 지어 보자고 했다. 돈이 안 될 줄은 몰랐다. 그걸 알게 되는 데 한 3년 걸린 것 같다."


부부는 첫해에 6백만 원, 두 번째 해에 1500만 원, 세 번째 해에 3000만 원 매출을 올렸다. 세 번째 해에 "많이 벌었네!" 하고 감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연은 이렇다.


부부는 2015년에 시범 삼아 '장데기네' 농가펀드를 시작했다. 복숭아 봉지 살 돈이 없어서 돈을 모으려고 6, 7백만 펀딩을 했다. 중고로 얻은 경운기 운전이 서툴러 언덕에서 뒤집히거나 비탈길 내려오다 처박히는 등 큰 사고가 세 번이나 있었기에 경운기를 대신하여 언덕도 잘 올라가고, 동력분무기 설치가 가능한 1톤짜리 4륜 트럭을 중고로 장만하고 싶었다. 처음엔 잘 됐다. 덕분에 쎄렉스도 중고로 사고, 녹슨 컨테이너도 구할 수 있었다.


지난해는 농사펀드에서 네이버에 올려서 해보자고 했다. 3천만 원 넘게 올라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도매시장에 넘기는 가격이면 손해 안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택배비와 포장비를 제하니 박스당 만 원도 되질 않았다. 지난해 추석이 빨랐고 비가 많이 와 출하 시기도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웃 농가의 복숭아를 비싸게 사서 보내줬다.


더 큰 문제는 네이버에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은 인터넷 쇼핑하는 걸로 알았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농사를 짓고 어떤 철학으로 이 작물을 키워 왔는지 이해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주문을 했으면 오는 날짜에 받는 걸로 알았다. 날씨 때문에 늦어지거나 과일이 멍들어 있거나 하면 용납이 안 됐다. 불만 있는 사람들한테는 다시 보내줘야 했다.


"4백 상자를 보내줘야 되는데 복숭아가 익지를 않으니 이웃 농가의 복숭아를 명절 밑 시세로 사서 보냈더니 오히려 박스당 마이너스 2만 원이 났다."


결국 추석 때 마이너스 800만 원이 났다.


"나중에 맺은 과일은 공부방에도 보내고 지인들과 다 나눠 먹었다. 농사를 지은 지 3년 지나니까 마이너스 3천이 됐다."


농사만 지어선 먹고사는 것도 자식 공부시키는 것도 어렵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2014년 가을부터 결국 반영숙은 밤 근무만 하는 나이트 전담간호사 일을 시작했고 김성수는 고등부 수학강사 일을 시작했다. 농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시민사회운동도 시간에 얽매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반영숙은 지난해 병원에서 황당한 일을 당했다. 반영숙은 핸드폰에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녔는데 어느 날 의사가 "그걸 왜 그걸 붙이고 다니냐, 떼라"고 시비를 걸었다. 가만히 있을 반영숙이 아니었다. 떼기는커녕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그 의사는 공개 사과를 하지 않고 도망치듯 다른 병원으로 가 버렸다.

그 뒤 병원에서는 갑자기 3교대로 근무 형태를 바꿨다. 3교대는 농사를 병행할 수가 없다. 돈 안 되는 농사가 주업이고 부업이 병원 일인데 말이다. 싸우는 게 너무 피곤해서 실업급여를 받고 나와 버렸다. 지난해 사과를 수확한 뒤 새로 옮긴 요양병원은 집중치료실을 끼고 있어 한숨도 잘 수가 없다.


"이제 3개월 됐는데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 그래도 남편 학원 그만두라 해 놨으니 버텨야 된다."


남편이 하는 강사 일을 그만두게 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농사에 전념하라는 뜻이다. 저녁에 한참 일할 시간 되면 학원을 가야 되니까 일할 시간이 부족하다. 또 하나는 남편이 이번에 이 지역에 농민회를 만들려고 한다. 반영숙은 무조건 찬성이다.


"3년째 농사지어 보니까 농민회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겠다. 어차피 농민회 만들려면 학원 그만둬야 한다. 어떻게든 살겠지. 밑바닥 다 겪어 보고 살아서 별로 걱정 안 한다. 아이들 독립할 때도 됐고."


부모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일관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스스로 자라도록 놔뒀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착하게 자랐다. 큰아이는 강릉 원주대 관광경영학과 2학년을 올라가는데 장학금을 타서 등록금이 없다. 아들은 고3인데 이번에 자퇴서를 냈다. 그 이유가 거창하고 위대(?)하다.


"이 나라가 싫다는 거다. 그런데 담임이 자퇴서 접수를 안 해 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니들은 알아서 커라' 하는 철학이다.(웃음) 혼자 공부해서 일본어 동시 통역 수준으로 자격증까지 땄고 자기가 벌어서 여행도 갔다 온다. 일본에 가서 취업을 하는 게 목표다."


두 사람은 아이들이 자랑스럽다는 걸 숨기지 않는다.


과수원이 있는 컨테이너 장데기네에서 쉬고 있는 부부.
▲ 장데기네에서 과수원이 있는 컨테이너 장데기네에서 쉬고 있는 부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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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두 사람은 현재 강릉시민행동 회원이다. 김성수는 강릉시민행동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1인시위나 기자회견, 캠페인이나 집회 등을 쫓아다니느라 농사를 자꾸 뒷전으로 미루게 된다. 요즘은 주말에 박근혜 퇴진 비상행동 촛불캠페인을 나가고, 로컬푸드형 학교급식확산을 위해 농민들을 만나느라 바쁘다.

틈틈이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들에게 땔감을 전해주거나 기초수급 상담을 해주고 있다. 반영숙은 건강한 먹거리와 쌀농부이야기, 농업의 가치를 알리는 수업도 나가고 있다. 전에 식생활교육네트워크 사무국장을 하다가 현재는 이사로 있다. 김성수는 두 사람이 살아오면서 그동안 맡은 사무국장 직함만 열댓 개 된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저하고 가족하고 꿈이 달라요. 일 순위가 따로 있죠."


반영숙은 그게 뭔지 안다. "섭섭한데요"하면서도 남편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인다.


"나는 사회운동하면서 사는 게 그게 삶의 목표예요. 만약에 아이가 없었으면, 하고 싶은 일들 하면서 직장 고민 안 하면서 살았을 거 같아요. 왜 낳았는지 몰라. 하하하."


"그래도 우리가 아이들 때문에 사람 노릇 하잖아요."


"아 맞아! 하하."


아, 닭살 부부다. 천생연분이다.


"제 인생 목표가 무엇이 되겠다는 게 아니고 이건 내가 해야만 되는 일이면 해야 되는 거예요. 열 받는 일은 안 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을 하게 될 뿐인 거죠. 아내가 이해하고 지지하는 게 큰 힘이죠. 결혼 잘한 거죠. 일단 좋아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 반영숙은 그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한 일을 되돌아보면 아내 반영숙이 남편 김성수보다 더한 사회운동가일지도 모른다. 김성수는 아내 꼬임에 빠져 운동가의 삶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영숙은 어제 밤새고 지금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인터뷰를 하느라 남편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조금 이따가 또 밤 근무를 하러 나가야 하는데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되레 인터뷰를 길게 하고 있는 내가 미안했다.

"사과, 복숭아 익을 때 꼭 연락하고 올게요."

인사하고 일어섰다. 올가을 그이들이 농사지은 사과와 복숭아를 먹고 싶어 열 박스를 미리 주문했다. 


공유가 나오는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한 주문진에서 기념 사진 한 장.
▲ 도깨비 촬영장에서 공유가 나오는 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한 주문진에서 기념 사진 한 장.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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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사진첩을 들여다보다가 모두 모여 찍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멋지게 자랐다.
▲ 함께한 가족 오랫만에 사진첩을 들여다보다가 모두 모여 찍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멋지게 자랐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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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은책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작은책, #안건모, #반영숙,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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