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공사 서남원 감독과 한수지 선수(오른쪽)

인삼공사 서남원 감독과 한수지 선수(오른쪽) ⓒ 박진철


모험이었다. 실패할 경우 '경기를 포기했다', '프로가 장난이냐'는 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 갈림길에서 서남원 KGC인삼공사 감독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다.

이틀 뒤 벌어진 현대건설전. '봄 배구'인 플레이오프 진출의 최대 분수령이었다. 서 감독은 다시 원래대로 선수 구성을 바꿨다. 대혈투 끝에 또다시 짜릿한 승리. 용감하고 변화무쌍한 전술에 팬들은 놀라움과 감동의 박수를 쏟아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프로배구 경기에서 실화로 등장했다. 감독은 서남원, 주연은 만능 플레이어 한수지였다.

인삼공사는 지난 24일 GS칼텍스와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3-1로 이겼다. 이 승리로 정규리그 3위를 탈환했다. 이전까지 인삼공사는 4연패 중이었다. 최하위 도로공사에게도 2연패를 당했다. 현대건설과 봄 배구를 향한 살얼음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기에 뼈아픈 패배들이 계속됐다.

최고의 돌풍을 일으켰지만, 주전 레프트 2명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조직력과 경기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이날마저 패하면 분위기상 봄 배구를 접어야 할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위험한 승부수... 주전 빼고, 백업 대거 기용

이대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서 감독은 GS칼텍스전에 깜짝 승부수를 던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선발 라인업을 들고 나온 것이다.

팀 전력의 핵심인 외국인 선수 알레나(28세·190cm)와 주전 세터 이재은(31세·176cm)을 선발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센터인 한수지(29세·182cm)를 라이트로 옮겨 알레나를 대신하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주전 세터였다. 선발 경험이 없는 김혜원(22세·173cm)을 전격 투입했다. 그러면서 한수지와 '더블 세터' 시스템을 가동했다.

1세트 중반. 알레나를 투입하면서 이번에는 한수지를 세터로 옮겼다. 주전 세터 이재은은 끝까지 투입하지 않았다.

레프트도 신인 지민경(20세·184cm)과 단신 김진희(25세·175cm)를 배치했다. 지민경은 4연패 기간 중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격과 수비에서 크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서 감독은 팀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선발로 기용했다. 센터도 올 시즌 거의 뛰지 못한 문명화(23세·189cm)를 출장시켰다.

이런 구성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요한 순간에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감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능 팔' 한수지, 모두를 부활시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상대 팀인 GS칼텍스는 상상도 못했던 인삼공사 라인업에 당황하며, 최근 상승세의 경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날 승리의 일등공신은 한수지였다. 모처럼 주전 세터로 팀을 이끌었다. 또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세터-라이트-레프트-센터 4가지 포지션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웬만한 공격수보다 나은 10득점(성공률 64%)을 기록했다.

원래 포지션이 세터인 한수지는 올 시즌 센터로 전환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센터-레프트-라이트-세터로 수시로 변신하며, 만화 주인공 가제트의 '만능 팔'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지의 활용도는 더욱 다양해졌고, 신출귀몰하고 독특한 캐릭터로 인기도 급상승했다. 팬 투표로 올스타에도 뽑혔다.

신인 지민경도 팀 내 두 번째로 많은 12득점을 올렸다. 수비에서도 잘 버텨줬다. 레프트 공격수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서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알레나도 34득점을 책임지며 중요 고비마다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재은과 부상에서 복귀한 최수빈은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백업 멤버들을 선발로 기용하면서 선수 운용 폭도 넓어졌다. 배구팬들에게도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승리로 인삼공사는 많은 가욋 소득을 챙겼다.

선택지 많아진 서남원 '행복한 고민'

서남원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승부수를 던졌을까. 그 이유를 직접 들어봤다.

그는 기자와 통화에서 "최근 경기력으로 볼 때, GS칼텍스는 너무 좋았고 우리는 최악이었다"며 "기존 패턴대로 나가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변화와 트릭(속임수)이 필요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초반 김혜원 카드는 상대의 허를 찌르면서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려는 트릭이었다"며 "1세트 중반부터 원래 계획대로 알레나를 투입하고 한수지를 세터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센터인 한수지가 세터로 가면, 그 자리에 문명화를 투입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장신화까지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GS칼텍스전 승리로 선택지가 늘어난 서 감독은 최대 고비인 현대건설전(26일)을 앞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재은 세터 체제로 안정을 꾀할 것이냐, 한수지 세터 체제로 높이를 강화할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최종 선택은 이재은이었다. 한수지 카드는 앞서 선을 보였기 때문에 또다시 전술의 변화를 택한 것이다.

대성공이었다. 3-2 짜릿한 승리로 봄 배구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승점 41점을 기록하며 4위 현대건설(39점)과 차이도 벌렸다. 알레나 36점, 김진희 20점, 지민경 17점, 한수지 7점, 유희옥 7점으로 득점 분포까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만화보다 흥미로운 '인삼 배구', 결말은?

인삼공사가 흥미롭고 변화무쌍한 팀이 된 핵심 요인은 바로 한수지의 존재다. 4가지 포지션을 모두 수행할 역량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서 감독은 "한수지 덕분에 너무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흐뭇해했다. 신인 지민경에 대해서도 "믿고 계속 기용하다 보니 버티는 힘이 생겼다"며 "최근에는 수비도 많이 늘었다"고 칭찬했다.

'현실 속 만화' 같은 팀 KGC인삼공사. V리그 개막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 꼴찌 예상 팀이었다. 1순위 외국인 선수와 주전 레프트의 이탈 등 숱한 역경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봄 배구를 넘보는 최고 돌풍의 팀이 됐다. 경기 내용과 전술도 파격의 연속이었다. 팬들의 관심도와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서 감독은 기자에게 농담조로 "올해 우리 팀 경기가 하이큐보다 재밌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하이큐는 배구를 소재로 한 일본 만화 드라마다. 국내 케이블 TV에서도 큰 인기를 모으며 방영되고 있다.

서남원과 아이들. 그들이 써내려 가는 반전 드라마도 어느덧 종영이 가까워 오고 있다. 결말이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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