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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만세항쟁 당시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서'
▲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만세항쟁 당시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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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매년 3월 1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행사에서 광복회장이 읽곤 하던 '기미독립선언서'의 첫 대목이다.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 국민이 궐기한 3.1혁명(소위 '3.1운동')은 기미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주도로 마침내 그 깃발이 올랐다. 이날 오후 3시 민족대표 33인(참가자는 29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전부 일경에게 끌려갔다.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南慈賢) 의사는 남편이 의병전쟁에서 전사하자 독립투쟁에 가담하기 위해 1918년 경북 영양에서 상경하였다. 이듬해 3.1혁명이 일어나자 남 의사는 가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면서 만세 항쟁에 동참했다.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3.1혁명이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립선언서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독립선언서 제작과정에 기막힌 일화가 하나 있다.

민족대표들은 거사에 앞서 독립선언서를 만들기로 하고 당대 제일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육당 최남선(崔南善)에게 맡겼다. 이 과정에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는 기초하되 자신은 민족대표 33인에서 빠지겠다고 해서 한때 집필자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은 육당이 맡게 됐다. 이제 다음 순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하기로 했다.

보성사가 있던 종로구 수송동 80-7번지 수송공원에 세워진 ‘보성사 터’ 표지석
▲ 보성사 표지석 보성사가 있던 종로구 수송동 80-7번지 수송공원에 세워진 ‘보성사 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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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보성사 이종일(李鍾一) 사장은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킨 후 인쇄 기술자, 총무 등 두 사람만 데리고 커튼을 드리우고 극비리에 인쇄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창 인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보성사 주변을 순찰하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신승희(申勝熙·일명 申哲)가 보성사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검문을 하러 온 것이었다. 이종일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쇄소 안으로 들어온 신승희는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독립선언서 인쇄가 바로 탄로가 나고 말았다. 이종일은 신승희 앞에 꿇어 엎드려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제발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고 애걸했다. 그리고는 이종일은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곧장 의암 손병희(孫秉熙)를 찾아갔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손병희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안방에서 5천원 뭉치를 꺼내주었다. 신승희는 이돈 5천원을 먹고 눈감아 주었다. 물론 이 돈은 천도교 자금이었지만 그날 밤 손병희가 당시로선 거금 5천원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3.1혁명을 얘기하노라면 사람들은 흔히 유관순(柳寬順) 열사를 떠올린다. 만세항쟁에 가담했다가 18세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유 열사를 기리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할이나 공로, 순서 등을 따지자면 의암 손병희가 단연 윗자리에 간다고 할 수 있다. 손병희는 3.1혁명을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혁명의 총 기획·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또 민족대표 33인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근현대 역사인물의 평전을 잇달아 펴내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최근 <의암 손병희 평전>(채륜 펴냄)을 출간했다. 그는 의암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하며, ▲동학군 10만 명을 이끌고 관군·왜군과 싸운 혁명가 ▲동학 3세 교주로서 격동기에 민족종교의 발판을 만든 신실한 종교 지도자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대표들을 결집, 자주독립을 선포한 독립운동의 선각자 등의 면모를 들었다.

3.1혁명을 실질적으로 엮어내고 주도한 천도교 3세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
▲ 의암 손병희 선생 3.1혁명을 실질적으로 엮어내고 주도한 천도교 3세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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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현대사에서 1894년에 봉기한 동학혁명이 반봉건·반외세 투쟁의 근대적 분기점이라면, 천도교 창설(1905년)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며, 1919년 전 민족적 거사인 3.1혁명은 반제·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를 연 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고, 또 이를 주도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이밖에도 의암은 다방면에서 선각자적 면모를 보였다. 그는 정치·외교·교육·주자학 등에 두루 밝은 경세가(經世家)요, 학자이기도 했다. 일본서 귀국한 후 학교를 여럿 세우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교에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만세보> <천도교월보> 등을 창간해 언론창달에도 기여했다. 또 보성사를 차려 출판 사업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가 3.1혁명을 기획,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심과 지적 역량, 인적 자원 등 제반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
▲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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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회장 손윤) 등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각계에서 참석한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초청인사로는 독립운동가 후예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우당기념관)을 비롯해 이정희 천도교 교령, 함세웅 신부, 이해동 목사, 원행 월정사 부주지 등 종교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의암의 후계자격인 이정희 천도교 교령은 인사말을 통해 "의암 선사는 1904년 '갑진(甲辰)개혁운동'을 통해 개화를 추진한 종교가이자 혁명가이자 경세가"라며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1912년 우이동 봉황각에서 전국서 모인 청년지도자들을 교육시킨 위대한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구한말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천도교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며 "당시 천도교는 곧 국가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는 한 때 신도수가 300만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후 교세가 급격히 쇠퇴하였다. 지난 2009년 통계청이 발표한 종교별 인구에 따르면, 천도교는 4만5천835명으로 유교(10만4575명), 원불교(12만9907명)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함세웅 신부는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쇠퇴의 길을 걷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며 "초심으로 돌아가 민족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의암 손병희 평전> 저자인 김삼웅 전 관장이 출판기념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의암 손병희 평전> 저자인 김삼웅 전 관장이 출판기념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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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머리에서 본 보성사의 독립선언서 인쇄 건도 그렇지만 3.1혁명은 전적으로 의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전> 저자 김삼웅 전 관장은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선생은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동원과 자금지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 서명자 첫 머리에 의암을 추대한 것도 이 때문이며, 해방 후 중국서 환국한 백범이 가장 먼저 찾은 곳도 의암이 묻힌 우이동 묘소였다.

그러나 의암 손병희에 대해 세상의 관심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천도교의 쇠락으로 인해 묻힌 점이 그 하나이며, 임시정부나 의·열사 위주로 독립투쟁사를 조명하고 또 이를 인식해온 우리사회의 '편식현상'도 한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이해동 목사는 이날 축사에서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치매에 걸린 것과 같다"며 "<손병희 평전>이 의암 선생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저자 김삼웅 전 관장은 "3.1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의암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공적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라 3.1혁명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공화제의 출발점이며, 국민통합과 남북평화통일을 위해서 민족공동체의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정의'를 바로 잡자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3.1혁명으로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에 손병희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당시 의암은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내란죄로 몰려 서대문감옥에 투옥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의암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어떤 정체(政體)로 할 것이냐?"고 묻자 그는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고 단호하게 진술했다. 3.1혁명 과정에서 조선민중은 종파와 지역을 초월하여 의암을 민족의 최고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의암이었으니 일제로서는 '국사범 제1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한용운 등과 함께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 독방에 수감돼 있던 의암은 옥중에서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돼 고통을 겪었다. 침대에 누운 채 재판정에 출정하여 심문을 받을 정도였다. 이듬해 1920년 4월 8일, 의암은 옥중에서 59세 탄생일을 맞았다. 그로부터 한 달여 지난 6월 12일 뇌일혈이 재발하여 쓰러졌는데 일제는 보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
▲ 손병희 묘소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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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의 건강악화가 극에 달하자 일제는 상춘원으로 주거제한을 한 후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가족과 천도교인들의 지극한 간호로 병세는 다소 호전되었으나 1921년 2월 들어 동맥경화증과 당뇨, 늑막염 등 합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4월 회갑 무렵에 다시 상태가 호전되었으나 이듬해 1922년 5월 19일 새벽3시 가족과 천도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2세로 서거했다. 당일 상춘재로 취재를 갔던 유광열에 따르면, 의암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은 실망하지 말고 노력하여라. 일본인들의 도량으로는 도저히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먹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못 보아도 너희들은 보게 되리라. 신념을 잃지 말고 힘차고 줄기차게만 나가라." (유광열, <기자 반세기>, 서문당, 1969)

올해로 3.1절 98주년을 맞았다. 100주년이 이제 2년 남았다. 해마다 이날이면 관공서를 비롯해 각계에서 3.1절 기념행사를 갖는다. 더러는 흰옷을 입고 그날의 만세의거를 재현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걸로 끝이다. 해가 바뀌면 습관처럼 또 유사한 '행사'를 되풀이하곤 한다. 그러기를 어언 98년째다.

올 3.1절에는 3.1혁명의 주역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평전>을 한번 펼쳐보면 어떨까 싶다. 종교지도자, 혁명가, 항일투쟁가,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거인의 면모를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겠기에 하는 얘기다. 아울러 최근 들어 주말이면 광화문 일대를 뒤덮는 '촛불 평화시위' 역시 그 뿌리가 의암의 비폭력 평화투쟁 정신에서 비롯한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의암 손병희 평전> 표지
 <의암 손병희 평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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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평전 - 격동기의 경세가

김삼웅 지음, 채륜(2017)


태그:#의암 손병희, #의암 손병희 평전, #김삼웅, #3.1혁명, #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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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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