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늦겠다. 서두르자, 참 꽃다발."
"괜찮아요. 누가 보면 엄마가 졸업하는 줄 알겠어요. 후후......"

신발을 신은 채 까치발로 걸어 식탁 위에 놓여있던 꽃다발을 챙기는 나를 보며 아이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굳이 안 와도 된다니까. 대학원 졸업식은 대부분 혼자 가서 학위수여증만 받아도 되는데......."

무심한 듯 하는 말과는 달리 거울 앞에 앉아 곱게 단장을 하고,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골라 입는 모습을 보니 아이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올해 27세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한 아이는 우리 집에서 막내로 분위기 메이커이다. 공부에 욕심이 많고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언니의 그늘에 가려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덕분에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큰아이를 뒷바라지 하느라 소홀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곤 했었다. 가끔은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탈로 긴 머리를 싹뚝 자르기도 하고, 때로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는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가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한 번쯤은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택하기도 하고.......

그렇게 아이는 한 걸음씩 자신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4년 동안 성적장학금을 받아 든든함을 주더니 대학원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등록금 전액면제로 다닐 수 있었다. 대학원 생활도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단 하루를 쉬지 못한 채 실험실에 박혀 지내고, 툭 하면 새벽이나 되어야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면서도 묵묵히 자기가 맡은 실험에 최선을 다하는 아이를 보며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지난 해, 지도 교수는 아이에게 박사과정을 강력히 추천했지만 아이는 취업을 선택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니? 당장 급해서 취업하는 거라면 좀 더 생각해 봐."
"아니야 엄마, 지금은 빨리 취업하고 싶어. 아빠도 퇴직해서 일을 구하고 있고 언니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말이 아니잖아. 내가 나중에라도 박사과정을 밟고 싶으면 그 때 하면 돼요. 빨리 취업해서 엄마도 자식 키운 즐거움을 맛봐야죠. 엄마,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취업하면 두둑이 챙겨드릴게요."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아이의 눈시울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도 아이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급작스러운 남편의 퇴직은 생각했던 것보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고 외무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큰아이의 뒷바라지에 숨 쉴 여유조차 없다보니 졸업식이라 해도 선물은커녕 용돈조차 줄 여유가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축하 꽃다발을 쥐어주고 싶은 마음에 어제 오후, 아이 손을 잡고 화훼단지까지 찾아가 앙증맞은 꽃다발을 샀다.

"요즘은 이렇게 말린 꽃이 유행이에요. 아이면 장미꽃도 좋고."
"나는 수국이 참 좋아요. 풍성해서 좋고, 은은한 향도 좋고."

이것저것 권하는 주인아주머니의 웃음에 아이는 분홍빛 수국 한 다발과 분홍빛 안개꽃을 섞은 꽃다발로 답을 했다.

"참, 졸업선물로 뭘 해줄까?"
"으응, 아니야. 지금은 이 수국꽃다발이면 땡큐에요.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할게요."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수국꽃처럼 아이에게 좋은 일이 수국수국 하기를......

졸업식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화사한 꽃다발들도 많아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식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환한 웃음으로 걸어오는 아이를 보자 코끝이 싸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아이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일렁이는 수국 너머로 아이의 웃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막내. 졸업 축하해. 그리고 취업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좀 늦게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네 삶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란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네가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렴. 그렇게 첫 발을 내딛는 거야. 이제는 가슴 속의 젊음을 마음껏 펼치며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으렴. 사랑해......."


태그:#졸업, #대학원, #석사과정, #취업, #퇴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