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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동물들은 암컷보다 수컷이 더 화려하다. 공작이나 꿩을 보라, 사자는 또 어떠한가. 화려한 깃털을 가진 공작이나 꿩, 멋진 갈기를 휘날리는 수사자에 비해 암컷들은 수수하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템
 <샤넬, 미술관에 가다>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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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떠한가? 인간 역시 남성들의 치장이 더 화려한 시기가 있었다. 힘과 위용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치장을 하거나 용맹을 뽐내어 상대의 환심을 샀다. 인디언 추장의 화려한 치장이나 왕과 귀족들의 화려한 치장은 힘의 과시와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화려함은 상대의 환심을 사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이 입고 걸치던 의복이나 패션 액세서리는 기능의 용도와 더불어 힘과 부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패션의 역사는 어떤 변화를 거쳐 현대에 이르게 됐을까? <샤넬, 미술관에 가다>(아트북스)는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콘이다. 저자 김홍기는 첫 직장 백화점에서 아동복 구매와 상품기획을 담당했다. 구매 담당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패션 이론 공부를 시작한 저자는 유학을 하면서 패션 특화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다녔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로 활동하며 그림에서 보이는 패션의 역사를 책으로 엮었다. 패션의 역사를 복식사가 아닌 그림 속 의상과 소품으로 소개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패션은 삶의 모든 곳에 녹아있으면서 서로를 구분하거나 동질화 하는 역할을 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저자가 소개한 패션의 역사를 짚어보려고 한다.

[관점①] 과시와 유혹의 패션 역사

화려한 의복과 모자, 구두 등 패션 용품은 과시와 유혹의 수단이었다. 제정일치 시대 제사장이나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왕과 귀족들은 화려한 의상과 머리 장신구, 가죽 신 등으로 힘과 위용을 자랑했다. 귀족 여성들은 화려한 의상과 장식으로 자신들의 미를 한껏 드러내며 신분을 과시하고 상대를 유혹했다.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미와 부의 상징이었다. 조선 시대 머리 장식인 가채의 가격은 집 한 채 가격을 넘었다고 한다. 무게도 20킬로그램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높이와 무게로 목이 부러져 죽은 여성이 있을 정도였다. 가발과 머리 장식을 힘과 부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빨간 하이힐이 눈에 띈다
▲ 루이 14세 초상화 빨간 하이힐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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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귀족들은 사자갈기 같은 머리카락으로 높은 지위를 드러냈다. 절대주의 왕조 패션리더로 유명한 루이 14세의 초상화에서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사자갈기 머리를 볼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헤어 디자이너라는 용어도 이 시기에 생겨난다. 유명 헤어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의 헤어 상롱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들의 여행에 동행하며 머리를 매만져 주기도 했단다. 그 모든 패션의 선두에 루이 14세가 있었던 셈이다.

루이 14세는 머리만이 아니라 토털 패션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사치재 중심의 소비재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현대식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직접 홍보의 중심에 섰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와 영국에 뒤처진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틈새시장을 사치재로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기 자신의 스타일과 취향을 무기로 삼았다'고 하니 대단한 패션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루이는 바로크 시대의 웅장한 무대 기술자이자 배우였다. 그는 대본을 쓰고 세트를 지었으며, 의상을 디자인하고 연기를 지도했다. 군주의 역할과 본인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절대주의 이념에 힘을 불어 넣었다.' - 조지프 클라이츠 '프로파간다로 보는 루이 14세 시대-절대왕정과 공론(프린스턴대학 출판부)

현대에는 여성 전용 신발인 하이힐의 역사도 무척 흥미롭다. 루이 14세는 미끈하게 빠진 다리를 가진 군주였다고 한다. 저자는 300여 점 이상 남겨진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에 항상 다리를 내놓은 모습이 그려진 것을 놓고 잘 빠진 다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루이 14세는 특별히 여성들에게도 도발적인 붉은색 하이힐 마니아였다고.

'당시는 남녀 구별 없이 귀족이면 하이힐을 신었다. 긴 스커트에 가려 있던 여성의 힐보다 남성의 힐에 오히려 더 장식이 많았다. 일명 풍차 타이라 불리는 리본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버클이 붉은색 하이힐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를 흔히 가장 우아한 '신발의 역사'가 펼쳐진 시기라고 한다. 루이 14세는 하이힐에 유별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무도회를 위해 가면과 붉은색 하이힐을 동시에 디자인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빨간색 하이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 붉은색은 귀족임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 258쪽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상, 과도한 머리치장, 모자와 장감, 안경 등 고급 패션 아이템은 오랫동안 상류사회를 지배한다. 모자의 높이는 신분과 부의 상징이었고 장갑 역시 고귀한 신분인 왕과 귀족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모자와 신이 남성귀족의 선호품인 반면, 부채와 숄은 귀족 여성들이 사용한 은밀한 유혹의 수단이자 소품이었다. 오랫동안 의상에서부터 패션 소품까지 귀족과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부와 힘, 과시와 유혹의 아이템으로 발전해왔다.

[관점②] 샤넬, 패션의 새 지평을 열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의 몸을 옥죄는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패션 근대화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다. 샤넬은 "패션이란 옷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명한 하늘과 거리,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 등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라고 믿었단다. 샤넬이 추구한 패션은 몸과 개인의 의지에 충실한 아이템이었다.

'거리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패션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진 샤넬은 1920년 여성의 신체를 억압한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폐기하고 남성용 '저지'(남성 속옷으로 사용하던 신축성이 뛰어난 천)를 이용한 편안한 옷으로 대치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 16쪽

샤넬은 전통적인 패션의 벽을 깨고 편안하고 기능성이 뛰어나면서 단순한 우아함을 갖춘 옷을 만들어 낸다. 샤넬은 여성의 몸과 미의 조건을 남성의 시각과 손에 맡겼던 관행을 깨트렸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디자인을 하고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들이 입는 옷은 샤넬로부터 시작된단다. 통념을 깨고 실용적인 의상 디자인으로 복식사에 혁명을 일으킨 샤넬이 명품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패션은 가진 자나 특정인을 위한 대상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패션에 의해 '발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 자기만의 개성과 꿈을 개발함으로 패션을 '발명'하고 활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패션리더일 것이다. 샤넬이 진정한 패션리더인 이유는 자신을 위한 다자인에 과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패션은 '입을 수 있는 것' 즉 웨어러블의 기준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말해주는 역사다. 이 기준을 심도 깊게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다 보면 한 사회가 옷이라는 사물을 통해 어떻게 인간을 '발명'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패션은 구매하는 것이지만 스타일은 소유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떠올려 본다. 소유란 돈으로 어떤 것을 구매함으로 내 곁에 쌓아두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다. 옷은 우리가 꿈꾸는 다양한 존재에의 가능성에 닿게 해주는 마법과 같은 것이다.' - 296쪽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샤넬, 미술관에 가다/ 김홍기 지음/ 아트북스/18,000



샤넬, 미술관에 가다 - 그림으로 본 패션 아이콘

김홍기 지음, 아트북스(2017)


태그:#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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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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