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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서도, 햇볕에서도, 땅에서도. 달력도 2월을 지나 3월로 가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 친정 아빠의 생신이 있다. 그 누구보다 봄을 사랑하셨던 아빠는 당신의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생일 다음 올 봄을 기다리셨다.

4년 전, 2월 3일 막내를 낳았다. 그 며칠 후가 구정이었고, 한 달 뒤가 아빠 생신이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핑계로 구정에도, 생신에도 아빠께 가지 못했다. 그리고 봄이 채 오기 전, 아빠는 갑자기 하늘로 돌아가셨다.

뒷표지가 오래 남는다.
▲ <할아버지의 벚꽃 산> 뒷표지가 오래 남는다.
ⓒ 청어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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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 생각나는 책 <할아버지의 벚꽃 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그립다. 그 그리운 만큼 봄이 기다려진다. 작년 아빠 기일 즈음에 도서관에서 만난 그림책이 있다. 마쓰나리 마리코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할아버지의 벚꽃 산>. 어린 아이와 도토리의 우정을 다룬 <길 잃은 도토리> 그림책을 먼저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아 이 작가의 책을 더 찾아보다 만난 책이다.

화지 가득 채운 수채화와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는 보는 것만으로 유년의 뜰로 데려다 준다. 2008년 한국에서 초판된 이력 때문인지 조금은 투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투박함이 이야기와 그림과 더없이 어울린다.

이야기 속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자주 벚꽃 산으로 산책을 다니셨다.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벚나무를 심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말을 건네며 정성으로 가꿔오셨다. 벚꽃 산에서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즐겁고 다정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는 병석에 누우신다. 아이는 혼자 벚꽃 산에 올라 벚나무에게 기도한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도하며 벚꽃이 있는 힘을 다해 피어났다.
▲ 할아버지의 벚나무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도하며 벚꽃이 있는 힘을 다해 피어났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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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할아버지의 모자를 썼습니다.
▲ 그 해 봄,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모자를 썼습니다.
ⓒ 청어람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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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깊은 겨울에서 봄이 올 때까지 아이는 산에 올라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한다. 다시 돌아온 봄, 할아버지는 오랜 침묵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나 벚꽃 산에 오르신다, 손자와 함께. 벚나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많은 꽃을 피워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벚꽃 아래에서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화사한 벚꽃 그림과 할아버지의 밀짚모자를 쓴 아이의 뒷모습으로 덤덤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는 책장은 볼 때마다 쉽게 넘기지 못한다.

아빠가 가장 사랑하시던 봄날의 목련나무가 생각난다. 30년 넘게 친정집 대문으로 서 있는 자목련과 백목련은 아빠의 가장 큰 자랑이다. 봄이면 강 건너 멀리서도 환한 등불처럼 보이는 아름드리 목련 나무.

목련꽃이 피면 아빠는 마음이 바쁘셨다. 목련이 피었노라 내게 전화를 하시고 꽃이 지기 전에 다녀가길 바라셨다. 그러나 짧게 피었다 지는 목련. 이런저런 핑계로 목련 꽃 때를 맞추지 못한 봄이 더 많았다. 무심한 딸 대신 성당 교우 분들과 나눈 목련의 봄, 아빠의 봄.

봄이 온다, 친정 아빠가 보고싶다.
▲ 외할아버지의 찬란한 유산 봄이 온다, 친정 아빠가 보고싶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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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이지만 아빠의 목련나무를 대신해 꽂아드렸다. 1년이란 시간은 길다, 못보고 가신 젖먹이 막내 외손자가 저렇게 자랐다.
▲ 친정 아빠의 첫번째 기일 조화이지만 아빠의 목련나무를 대신해 꽂아드렸다. 1년이란 시간은 길다, 못보고 가신 젖먹이 막내 외손자가 저렇게 자랐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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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아빠의 찬란한 유산

아빠를 보낸 그 해 봄, 여름이 올 때까지 어린 세 아이들과 친정집에 머물렀다. 여고 때부터 인근 도시로 유학을 떠나 20여년 만에 오롯이 친정집에서 보낸 봄이었다. 젖먹이를 안고 목련 나무 아래를 자주 서성였다.

아빠에게 못한 마지막 인사를 하는 마음으로. 그해 봄, 목련꽃이 환하게 피어올랐고 아이들은 외할아버지의 찬란한 유산 아래에서 여물어 갔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할아버지의 벚꽃 산>에서 봄마다 열리는 봄 축제처럼. 

올해로 네 번째 맞는 아빠의 기일. 젖먹이였던 막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가 자란만큼 아빠를 보낸 슬픔은 무뎌졌지만 시간이 흐르니 좋은 날 아빠가 더 생각난다. 이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선 더, 곧 피어날 목련꽃을 생각하면 더, 꽃이 피어오르면 더, 더, 더...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따뜻한 안녕
▲ 할아버지의 섬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따뜻한 안녕
ⓒ 예림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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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안녕 <할아버지의 섬>

<할아버지의 벚꽃 산>과 비슷한 그림책을 만났다. 벤지 데이비스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 <할아버지의 섬>. 이 책에도 할아버지와 손자 시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드는 할아버지의 추억이 가득한 다락방을 보게 되고 그 곳에서 신기한 철문을 열고 모험의 세계로 떠난다.

아주 커다란 배를 타고 할아버지와 함께 떠난 항해는 작은 섬에 정박한다. 할아버지는 지팡이 없이도 시드와 함께 섬 곳곳을 누비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신다. 할아버지 다락방에 있던 거북이 주전자와 고릴라 인형이 어느새 섬에서 생명을 얻어 할아버지의 친구가 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할아버지는 섬에 남겠다 하신다. 시드는 혼자 남겨두고 가는 할아버지가, 혼자 돌아가야 할 바닷길이 걱정이 되었지만 할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씩씩하게 거친 바다를 항해해 돌아온다. 돌아온 할아버지의 다락방엔 할아버지도,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없다. 텅 빈 새장과 낡은 배 모형 뿐.

이승에서의 삶 그 너머가 정말 있을까? 죽음을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정말 사람은 돌아가는 것일까?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의 모습으로 죽음 너머의 그 곳에서 영원을 산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친정아빠를 보내고 자주 궁금했었다. 목련꽃이 필 때마다 아빠의 안부를 물었고, 아빠를 닮은 둘째 아이의 얼굴을 보며 그 곳으로 돌아가신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홀로 돌아가는 길, 무섭고 힘들지만 할아버지의 기억으로 힘을 낸다
▲ 할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홀로 돌아가는 길, 무섭고 힘들지만 할아버지의 기억으로 힘을 낸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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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 너머의 긍금함

벤지 데이비스의 <할아버지의 섬>은 누구에게나 있는 이별 그 후의 물음에 대한 따뜻한 대답을 담고 있다. 할아버지가 계신 그 섬의 모습이 아마도 천국일 것이다. 친정 아빠는 늘 작은 라디오를 들고 다니셨다. 그 곁엔 커피 잔도 자주 있었다.

시드의 할아버지의 다락방에도, 바다를 가르는 큰 배의 갑판 위에도, 할아버지가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섬의 오두막에도 라디오와 커피 잔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장미꽃 한 송이도. 이승과 그리 다르지 않은 저승의 모습이다.

외할아버지를 보지 못한 막내이지만 막내는 외가에 갈 때마다 외할아버지를 본다고 말한다. 외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집에서 외할아버지가 심으신 목련 나무을 보며, 외할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이신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외할아버지의 라디오를 들으며... 막내에겐 처음부터 곁에 계시는, 떠나지 않은 외할아버지인가 보다.

<할아버지의 섬>은 죽음 저 너머에 있는 낙원이지만, 떠난 이를 기억하는 마음이 있는 한 모든 곳이 할아버지의 섬일 것이다. 시드가 돌아온 다락방엔 더 이상 바다로 통하는 철문이 없지만 작은 창을 열면 하늘이 보이고 그 하늘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물고 새 한 마리 날아온다. 다락방이 편지 한통으로 다시 할아버지의 섬이 된다, 시드는 할아버지와 함께 한다.

나는 잘 있단다!
▲ 할아버지의 편지 나는 잘 있단다!
ⓒ 예림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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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기억할께요

푸른 면지에 그려진 나뭇잎으로 시작해 분홍빛 꽃잎 두어 장으로 마무리 한 <할아버지의 벚꽃 산>을 내년 아빠의 기일에도 다시 찾아볼 것 같다. 섬으로부터 온 할아버지의 유쾌한 편지로 끝이 나는 <할아버지의 섬>도 함께. 아이들도 외할아버지를 부르며 그림책 앞으로 모여들겠지.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 자식 키우느라 바빠 잠시 잊었던 아빠를 다시 그리워한다. 온 몸으로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아빠의 소리를 찾아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가 우리에게 남기신 많은 것에 보답하는 길은 아빠를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 기억하는 한 아빠는 늘 곁에 계신다. 

할아버지의 목련나무 아래로 봄으로 걸어가는 아이들
▲ 외할아버지의 밀짚모자를 쓰고 할아버지의 목련나무 아래로 봄으로 걸어가는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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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벚꽃 산

마쓰나리 마리코 지음, 고향옥 옮김, 청어람미디어(2008)


태그:#할아버지의 벚꽃 산, #할아버지의 섬,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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