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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지인이 많다. 그중에는 동성애자인 친구도 있는데, 그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글을 자주 쓰곤 했다. 하지만 그가 늘 겪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경험담을 들려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차별이나 혐오를 당한 일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찾을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면 안 되나?

그래서 언젠가 '주변에 이런 일을 겪은 성소수자 친구가 없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귀찮은 마음에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스스로나 주변 사람들을 번거롭게 할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냐고.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너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르는구나?"

반사적으로 미안함을 표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그 친구가 유난스럽다고만 생각했다. 홍석천이나 하리수 같은 사람들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세상에 그게 무슨 엄청난 일이냐며 스스로 넘겨버렸다. 그랬던 생각이 달라졌던 건, 언젠가 우연히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뉴스의 댓글란을 본 후였다.

난장판이 벌어졌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 공간은 혐오의 지옥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점잖은 척 '동성애는 비정상'이라 말하는 댓글부터 가족을 들먹이는 조롱까지. 심지어 그곳에는 '내 주변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그 친구가 성소수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나'라는 주어를 쓸 수 없었는지. 글을 쓴 나의 이야기라고 말해버릴 때, '죽어라, 사라져라, 교정되라'는 말은 결국 누구를 향해 가닿게 될지. 그리고 그 말을 받은 사람은 어떤 수치심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될지 말이다.

심각할 정도로 만연한 혐오표현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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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수자들이 겪는 혐오는 일상적이고 만연한 것이지만 그 규모나 심각성, 파급력을 직접적으로 다룬 국내 연구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보고서가 하나 등장했다. 바로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해 공개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다. (다운로드 링크)

이 연구는 약 천여 건에 달하는 설문을 수집하여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이 얼마나 혐오 표현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조사했다. 또한 면접조사를 통해 혐오를 마주한 경험이 소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수자들이 혐오표현을 마주하는 경험은 심각할 정도로 만연했다. 온라인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혐오 표현을 경험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그룹이 80%에 가까운 비율로 그렇다고 답했다. 특히나 성소수자의 경우 94.6%가 그렇다고 응답해 사실상 집단 구성원 전체가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마주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같은 현실은 오프라인의 경우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빈도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소수자 그룹은 온라인에서 자주 혐오를 마주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오프라인은 이보다는 약간 덜했지만 대신 겪게 되는 충격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처럼 만연한 혐오표현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을까. 우선 당사자의 경우를 놓고 보자면 이들은 두려움·슬픔·소외감 등 부정적인 심리반응을 겪었다고 호소했으며, 나아가 자살충동·우울증과 같은 스트레스성 심리 반응을 경험한 이들도 있었다. 즉 혐오표현이 소수자들의 삶의 질과 건강을 직접적으로 헤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온라인/오프라인 공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공론장에 참여해 자기 경험이나 주장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단념했다.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사회 구성원으로 활동할 권리를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수자들은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최소한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혐오표현이 공동체 전반에 미친 영향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예시된 차별사유 19가지를 나타내는 이모티콘. 여기에 명시된 사유는 예시적인 조항으로, 예시된 사유 외의 임의적 차별도 당연히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예시된 차별사유 19가지를 나타내는 이모티콘. 여기에 명시된 사유는 예시적인 조항으로, 예시된 사유 외의 임의적 차별도 당연히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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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내의 특정 인구 집단이 이런 열악한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비상사태라 할 만하지만 보고서가 드러낸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만연한 혐오표현이 공동체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연구에서도 지적되는 바이지만 소수자에 대한 일상적인 혐오는 공공연히 이를 획책하는 '증오선동'이 등장하는 환경을 만들어 내며, 이 같은 선동은 '증오범죄'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보고서에는 비교적 온건한 혐오를 보였던 사람들이 '동성애 반대 집회'에 참석한 후, 성소수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것처럼 암시하는 발언을 한 사례가 등장한다. 또한 이 같은 폭력은 꼭 당사자만을 향하지 않는데, 일례로 이성애자 남성이지만 성소수자 지지 운동을 했던 한 면접자는 학교와 사람들의 괴롭힘에 못 이겨 결국 학교를 휴학해야 했던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즉 보고서가 보여주는 현실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단지 특정 집단의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 전반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임을 드러낸다. 또한 어떤 종류든 혐오가 만연한 공동체가 이상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가령 각종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소수자를 지목하는 혐오 양태를 보라. '이주노동자가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간다', '동성애자들이 에이즈에 걸려 혈세를 축낸다'는 식의 허구에 근거한 비방은 온라인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현수막으로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널렸다.

그런데 이렇게 특정 소수 집단을 희생양 삼아 사회적 불만을 혐오로 해소하는 모습이 과연 낯선가. 역사를 들여다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유태인과 여타 소수민족, 성소수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했나.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겪은 참상이 그들에 대해 만연했던 편견과 혐오와 무관했을까. 그리고 언급한 각 사회는 결국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갔는가.

'나중에'는 없다

[카드뉴스] 무심코 뱉은 말? 누군가에게는 폭력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 실태와 규제 발언 실태 조사, 소수자 혐오는 폭력이다!
▲ [카드뉴스] 무심코 뱉은 말? 누군가에게는 폭력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 실태와 규제 발언 실태 조사, 소수자 혐오는 폭력이다!
ⓒ 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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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나는 이번에 발표된 연구가 단순한 현황 정리가 아니라 일종의 비상 신호라고 생각한다. 국가든 시민 사회든 나서서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혐오 표현에 제동을 걸어야만 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식의 주장에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공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은 국가에만 속해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배제된 진공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권력은 당연히 공동체 구성원들이 맺는 관계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소수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불평등하게 부여되어 있다. 애초에 이들에게 함부로 혐오를 표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소수자들이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힘의 평등한 재분배다. 그리고 그 일은 제도적·법률적으로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일에 적절한 때란 없다. 누군가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나중에'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혐오 표현 금지 제도를 도입하자고 한다. '사회적 합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시된 법과 제도는 소수자들의 기본적인 존엄과 가장 기초적인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취지에도 합의를 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언급한 시스템들은 반드시 지금 만들어져야만 한다. 이는 소수자들이 그만큼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너무나 당연시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부조리한 현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필요하다. 합의가 가능한 조건을 기다리자는 것은 선후관계가 완전히 뒤틀린 이야기다.

앞서 내가 언급했던 그 친구는 아마 이후로도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순간에,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자신이 마주한 혐오를 말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순간에도. 그리고 그가 한 번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혼자서는 견딜 수 없거나 함께하고 나누고 싶었던 순간들을 묻어둔 채로 살아갈 것이다.

그 친구는 아마 '숨은 쉬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묻고 싶다. 인간의 삶이 그것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삶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집단의 사람들에게 이런 인생이 보편인 사회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일까? 그 사회가 마주하게 될 미래는 어떤 것일까?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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