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종료 후 울려퍼진 애국가에 선수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메달이 결정된 순간도 아니었지만 이 승리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한국 여자핸드볼대표팀이 올림픽을 통해 만든 우생순 드라마보다 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소속 팀도 없는 한국 여자 대표팀 선수들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사라 머레이 감독이 이끌고 있는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대표팀이 23일 정오 삿포로에 있는 츠키사무 아이스하키 링크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네 번째 경기에서 정규 시간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이어진 5분간의 연장전 무득점(0-0) 이후 펼쳐진 슛 아웃에서 열 번째 기회를 멋지게 성공시킨 박종아의 맹활약에 힘입어 2-1로 극적인 승리를 따냈다. 이는 중국을 상대로 얻은 첫 번째 득점이자 첫 승리였기에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유일한 팀, '국가대표'

한국 스포츠계에서 비인기 종목이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지만 여자 아이스하키에는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학교를 대표하는 단일 팀도 없을 뿐더러 시도 협회를 대표하는 일반 팀조차 없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유일한 팀은 국가대표 뿐이다.

캐나다 출신의 사라 머레이 감독이 2014년에 부임할 때 이 사실에 놀랐다고 할 정도다. 그야말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는 '불모지'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동계 아시안게임 역사상 이번 삿포로대회에서 첫 승리(한국 20-0 태국, 2017년 2월 18일)를 거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하는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아직 의미가 없다. 그래도 이번 대회 개최국 일본과 만나서 겨우 세 골만 내주며 패한 것(2월 20일)을 놓고 보면 놀라울 정도로 그 격차를 줄인 셈이다.

오늘 만난 중국과의 역대 경기 기록만 놓고 봐도 우리 여자 선수들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다. 2007년 창춘(중국)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 선수들은 중국을 상대로 싸워 0-20 점수판을 받아들었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카자흐스탄)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그 격차를 0-10까지 줄인 바 있다. 아시안게임은 아니지만 2014년 아시아 챌린지컵 대회에서 중국을 상대로 0-5까지 따라붙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 우리 선수들은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중국을 상대로 골을 뽑아내는 것이 첫째 목표였고 할 수만 있다면 승리를 거두고 자신감을 얻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가서 당당히 어깨를 펴는 것이다.

골리 신소정의 슈퍼 세이브, 박종아가 만든 극적인 승리의 순간

한국 여자대표팀의 주장 이규선은 사라 머레이 감독보다 네 살이나 많다. 겨우 중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들도 지금 뛰고 있으니 주전과 후보 선수들 사이의 체력, 실력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는 팀이다.

그나마 강팀 중국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시아 여자 아이스하키 수준을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골리(골키퍼) 신소정의 존재 덕분이다. 그녀가 온몸으로 퍽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우리 여자 선수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핸드볼로 말하면 맏언니 오영란 골키퍼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선수들은 1피리어드 10분 36초에 중국의 주장 유 바이웨이에게 먼저 골을 내주며 흔들렸다. 맏언니 이규선 주장이 크로스 채킹 반칙으로 2분간 링크 밖으로 쫓겨나 있던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1피리어드가 거의 끝날 무렵 박예은이 2분 퇴장당해 한 명이 적게 수비해야 할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1피리어드 19분 27초에 박채린의 중거리슛을 박종아가 스틱으로 재치있게 방향을 살짝 바꿔 동점골을 터뜨렸다.

중국을 상대로 한국 여자 선수들이 공식 경기에서 뽑아낸 감격적인 첫 득점인 셈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저력은 2피리어드 초반에 다시 빛났다. 2분 18초만에 공 밍후이가 한국 골문 앞 혼전 중에 침착한 밀어넣기를 성공시킨 것이다.

2피리어드 6분 5초만에 한국 선수들도 중국의 자오 치난이 2분 퇴장을 받은 사이에 첫 번째 파워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 선수들의 압박 수비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은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며 중국 선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2피리어드 17분 3초만에 2-2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다. 중국 골문 뒤에서 기습적인 패스 플레이가 펼쳐졌고 미국 이름 캐롤라인 낸시, 한국 이름 박은정이 재치있게 리바운드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어진 3피리어드에서는 오히려 우리 선수들이 중국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한계를 드러내며 마무리 슛이 더 날카롭게 뻗어가지 못한 바람에 득점 없이 5분간의 연장전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하키 규정상 5분의 연장전은 각 팀에서 골리를 제외하고 3명의 선수만 스케이팅을 펼칠 수 있고 어느 팀이든 먼저 골을 넣는 그 순간 경기가 종료된다. 여기서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한국 선수들은 중국에 거의 일방적으로 밀렸고 네 차례나 결정적인 슛을 허용했다. 여기서 신소정 골리의 슈퍼 세이브가 이어졌기에 마지막 슛 아웃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축구로 말하면 승부차기처럼 아이스하키의 연장전 이후 슛 아웃이 시작되었고 역시 각 팀에서 3명의 선수가 번갈아 혼자서 퍽을 몰고 들어가 골을 노리는 형식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졌다.

여기서는 골리의 비중이 축구의 승부차기보다 절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신소정의 슈퍼 세이브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공격수로 나온 박종아가 반 박자 빠른 슛 타이밍을 왼쪽 구석으로 정확히 성공시켜 1-0으로 앞서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중국의 두 번째 공격수도 한국 골리 신소정의 스케이트 사이 공간을 노려 1-1을 만들었다.

슛 아웃 세 번째 선수들까지 나왔지만 거기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그 이후부터는 단 1명씩 번갈아가면서 서든 데스 형식으로 진정한 마지막 승부를 가려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공격 순서가 바뀌어서 중국이 먼저 공격을 하고 한국의 신소정 골리가 골문 앞에 서야 했다. 슛 아웃 네 번째 순서부터는 이미 공격했던 선수가 얼마든지 계속 시도할 수 있기에 더욱 피말리는 외나무다리 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열 번째 공격수가 나와야 할 상황까지 이어졌을 때 한국에게 절호의 기운이 느껴졌다. 중국의 열 번째 공격수 공 밍후이의 슛을 한국 신소정 골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쳐낸 다음, 한국의 열 번째 공격수 박종아가 중앙선 앞에 섰다. 그녀는 먼저 기회보다 더 폭넓은 스케이팅을 구사하며 퍽을 몰고 들어가 정확한 임팩트로 골을 성공시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들은 모두 링크로 몰려나와 뒤엉키며 감격의 순간을 나눴다. 이틀 전 카자흐스탄과의 대결에서 0-1로 아쉽게 패하는 바람에 동메달의 희망이 멀어졌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매우 소중한 성과를 올린 셈이다.

이제 우리 선수들은 오는 25일 오후 3시 30분 홍콩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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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여자 아이스하키 신소정 슛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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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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