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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 거리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빵을 팔고 있는 티베트 젊은이와 노인.
 맥간 거리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빵을 팔고 있는 티베트 젊은이와 노인.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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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젊은이,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빵을 권했다

맥간에서 머무는 내내 매일 아침 빵을 구하러 나섰다. 단골 빵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맥간 중심지로 들어서는 길목에 빵을 팔고 있는 티베트 청년과 노인이 있었다. 거기서 매일 아침 신문지에 둘둘 말린 빵을 두 개 씩 샀다. 이 빵은 호떡처럼 생겼다. 호떡보다는 두툼하지만 속 내용물이 아무것도 없는 그냥 호떡 모양의 밀가루 빵이다. 불 기운에 부풀려 나온 이 빵은 고소하니 맛이 좋다. 입맛 없을 때 특별히 '피스 식당'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이 빵을 거의 매일 값싼 토마토와 곁들여 주식으로 먹었다.

아침나절에만 구할 수 있는 이 빵은 5루피, 우리 돈으로 100원 정도에 불과하다. 가난한 현지인들이나 여비가 넉넉지 않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보니 두어 시간 좌판에 빤짝 나왔다가 사라진다.

맨 처음 빵을 사러 갔을 때 노인과 젊은이,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빵을 권해 난감했다. 그 다음 날부터는 노인과 젊은이의 빵을 번갈아 가며 샀다. 하여 추레한 옷차림에 긴 머리, 긴 수염의 흔치 않은 내 인상착의로 금방 날 알아보고 서로가 양보하듯 상대방의 빵을 권하곤 했다. 매일 아침, 값싸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순박한 인상의 그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숙소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하나둘씩 베란다로 나와 기지개를 펴가며 눈앞에 훤히 펼쳐져 있는 맥간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워 물거나 한다. 내가 머문 게스트하우스에는 미얀마에서 온 스님을 비롯해 한국여행객은 물론이고 태국에서 왔다는 비구니 스님과 이탈리아,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배낭여행객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국인들이 4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남성은 내가 유일했다. 나머지 세 명 모두가 젊은 한국 여성들이었다.

"께 벨라 꼬사 나 유르나따 에 쏘레..."

매일 아침 공동 샤워장에서는 '오 솔레미아'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내 바로 옆방에 묵고 있는 이탈리아 사내의 어설픈 노래 소리다. 염소수염에 키가 껑충하게 크고 싱겁게 생긴 30대 중반의 그는 아무데서나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닌다. 주로 이탈리아 나폴리 민요인 '오 솔레미오'(O sole mio. 나의 태양)다. 그는 나만큼이나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 다른 외국인들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몇 마디 하는데 나처럼 거의 '콩글리시' 수준이다.

그의 영어는 노래 부르듯 말끝을 치켜 올리는 이탈리아식 억양이 강하게 섞여 있다. 그리고 말을 할 때 마다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손짓, 손가락을 오므려 앞으로 내밀곤 한다. 그와 만난 지 이틀째 되던 날, 반나체 차림으로 샤워장에서 마악 나오던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였죠?"
"북인도 코오사니~"
"아 맞습니다. 요기 레스토랑!"

그가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제서 40여일 전쯤에 북인도 코사니에서 잠시 스쳐 만났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코사니의 채식전문 식당인 요기레스토랑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는 코사니에서 만났던 몇 안 되는 서양인이었다.

코사니에서 흔치 않은 외국인 여행객을 만난 것이 반가워 '어디서 왔는가' 물었을 때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탈리아'라고만 짤막하게 대답하고 식당을 휑하니 빠져 나갔었다. 나는 그때 아주 거만한 이탈리아 사내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는 나처럼 영어가 짧아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맥간에서 만난 그는 아주 유쾌한 사내였다. 공연히 베란다를 오락가락 하며 이탈리아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하는 그는 이탈리안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0여년에 걸쳐 인도를 찾아오고 있다는데 맥간에만 10여 차례 이상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그와 몸짓 발짓으로 가끔씩 빵이나 과일 등의 먹을거리를 나눠 먹기도 했다. 그에게 어떤 목적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냐고 묻자 그는 짤막하면서도 코믹하게 대답했다.

"발길 닿는 대로 자유를 찾아서요, 무한한 자유요."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어 그가 어떤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침나절에 나갔다가 어둠이 깔릴 무렵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의 숙소 문고리에는 늘 두 개의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다.

이탈리아 사내의 방문을 굳게 물고 있는 두 개의 자물쇠. 하나는 숙소에서 제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내의 방문을 굳게 물고 있는 두 개의 자물쇠. 하나는 숙소에서 제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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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내, 검은 안경을 즐겨 쓰는 한국 여성에게 푹 빠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사람들, 자유로운 배낭 여행객 모두에게는 저마다 부자유스러운 자물쇠가 물려 있다. 심지어 한국인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숙소와 불과 1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의 베란다로 나설 때도 자물쇠를 걸어놓을 정도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인상 깊게 남은 또 한 사내가 있다. 무더운 인도 라자스탄에서 맥간으로 피서 온 인도사내다. 그는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즐겨 쓰고 다니는 한국인 여성이 머무는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 사흘을 머물다 갔는데 수시로 내 방문을 두들겨 댔다.

"한국말 좀 알려주세요?"
"어떤 말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한국말로 어떻게 말합니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즐겨 쓰고 다니는 한국 여성에게 푹 빠져 있던 그가 내게 요청했던 한국말은 주로 '사랑' '이쁘다' '좋아한다' '함께 하고 싶다' '무엇을 좋아합니까' 등등의 연인들이 주고받는 달콤한 언어들이었다.

인도 사내는 그 한국여성이 아주 예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보통의 한국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자신의 숙소까지 따라온 사내에게 따듯한 눈빛조차 주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사내 옆방에 머물던 또 다른 한국여성이 커피를 타다 주는 등 호의를 보이자 그제야 도도한 여성의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두 사람은 히말라야를 코앞에 펼쳐놓고 있는 트리운드 트레킹을 다녀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따로 등산화까지 구입해 산행을 다녀온 인도 사내의 표정은 침울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레킹이 즐겁지 않았나요?"
"예..."

등산화를 벗으며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발에 맞지 않는 새 등산화 때문에 발가락에 심하게 물집이 잡혔다며 덧붙여 말했다.

"그 여성에게 남자 친구가 있답니다."

다음날 의문투성이의 한국여성은 검은 라이방을 끼고 남자 친구가 기다린다는 북인도 마날리로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사내는 목이 아프다며 사탕을 먹다가도 줄 담배를 피운다. 내가 목 아픈데 그만 피우라고 했더니 말보루 담배를 보여주며 그녀가 사주고 간 담배라고 한다. 나는 또 다른 한국여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혀가며 검은 옷에 검은 라이방을 끼고 다녔던 여성이 이미 가슴에 들어와 있다고 말한다.

칼쌍 게스트 하우스에는 내가 인도 여행길에서 유일하게 만난 미국인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그 역시 이탈리아 사내처럼 아침나절에 숙소를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온다. 동화작가 지망생이라는데 한 번도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내 숙소보다 두 배로 너른 방을 쓰고 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웃통을 벗어 젖히고 베란다를 어슬렁거리다가 창 너른 방안으로 들어가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곤 한다. 하지만 잠시 후 창문 커튼이 닫히고 불이 꺼진다.

잠깐 스쳐가는 인연들, 각자 제 일에 시간을 쏟는다

숙소 사람들은 저녁 무렵이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베란다에 모인다. 맨 꼭대기 층에서 홀로 명상에 집중하고 있는 영국 여자와 말없이 숙소를 오고가는 서양 커플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이 모여 한 그룹을 이룬다. 그 그룹에는 영어가 유창한 한국 여성들 뿐 아니라 종종 아래층에 머물고 있는 일본청년도 끼어든다.

영어수준이 비슷한 나와 이탈리아 사내 또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돌다가 누군가 질문을 하면 한 두 마디로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초급영어라면 그들은 고급영어 수준이었다. 다국적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들을 대충 분석해 보면 '어느 나라에 갔다 왔나' '인도 어디에 다녀왔나' '티베트 불교는 어떠한가.' 자신들의 나라 음식이나 역사와 문화, 관광지 정보 등을 주고받는 듯했다.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여행지에서 정 깊게 만났던 인도나 네팔 사람들과는 다르다. 잠시 잠깐 스쳐가는 인연들이기에 깊이 있게 그리워 할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 각자 제 일에 시간을 쏟는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찾아 나서거나 적당한 말 상대를 찾아 끊임없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지친 몸을 다스려 가며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빵을 사들고 들어오면 노트북 앞에 앉아 그동안의 여행기를 정리하거나 말기 환자처럼 맥없이 누워 무한한 시간을 벽면에 새겨놓거나 베란다에 나와 맥간 하늘을 수놓는 독수리들의 비행을 따라 다닌다. 때로는 낯선 이방인들 틈에 끼어 짧은 영어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딱딱한 빵과 물컹한 토마토가 싫증이 날 때면 수제비나 만두를 먹으러 값싼 식당을 찾아 맥간 중심지를 어슬렁거리곤 했는데 그 풍경들이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맥간에서 머문 지 나흘째가 되자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이 거추장스럽게 다가왔다.

코사니에서 다친 무릎과 벼랑 끝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고갈된 체력 때문이기도 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좀 더 멀리 걷지 못해 무력증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여행자들은 방문 앞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라도 하면 꼬박꼬박 자물쇠로 단도리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긴장감이 풀려 숙소 밖으로 나설 때조차 간혹 여권이 들어있는 전대를 침대에 놓고 나오기도 했다. 살집이 빠져 가뜩이나 졸아 붙은 허리를 압박하는 전대를 두르고 다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가 맥간 중심지에서 흘러들어온 피티 병을 주워 모으고 있다.
 두 아이가 맥간 중심지에서 흘러들어온 피티 병을 주워 모으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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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 변두리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여인. 도시의 쓰레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온다.
 맥간 변두리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여인. 도시의 쓰레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온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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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에서 인도의 소들은 외양간에 갇혀 있다

비좁은 길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기념품 상점들과 카페와 식당들, 맥간의 중심지에서는 그동안 여행지 어디에서든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아이들의 미소를 만나기 쉽지 않다. 진중한 표정으로 염주를 굴리며 걷는 사람들, 물건을 흥정하는 상인들과 희희낙락 상가를 배회하는 여행객들이 전부처럼 다가온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늘상처럼 다가오는 맥간의 중심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맥간에서는 인도 사람들이 연료로 쓰고 있는 소똥이 필요 없어 보였다. 마켓과 게스트하우스 식당으로 즐비한 거리 외곽에는 오래되고 낡은 건물 안에 소들이 보였지만 더 이상 거리를 활보하는 인도의 소들이 아니다. 외양간에 갇혀 있다. 더러 낡은 건물들은 한 가족이 생활하는 주거 공간이라기보다는 여행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새롭게 단장하고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비한 화려한 상가를 벗어난 변두리 지역인 이곳에서는 본래 맥간에서 살아왔던 로컬 피플, 인도의 전통의상 사리를 입은 시골 사람들이 산비탈 곳곳에 등을 기대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불과 20여분 거리의 맥간 중심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 사람들의 쓰레기들은 가난한 빈민촌으로 흘러들어가기 마련이다. 맥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도시 사람들의 쓰레기들을 모은 쓰레기장이 있었는데 거기를 뒤적거리는 여인네가 보였고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 피티 병을 마대자루에 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쓰레기장을 뒤적거리거나 피티 병을 주워 모으는 일은 용돈벌이가 아닌 처절한 생계수단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배불리 먹고 있을 때 그만큼 누군가는 굶주리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5루피짜리 빵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맥간 중심지를 오가는 사람들은 보통 100루피 이상의 식사를 즐기고 있다. 내가 매일 아침 5루피짜리 빵을 즐겨 먹고 있을 때 저들은 어쩔 수 없이 생계용으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맥간에서 주식으로 먹었던 5루피 짜리 빵과 토마토
 맥간에서 주식으로 먹었던 5루피 짜리 빵과 토마토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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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에서는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불빛들이 밤늦게까지 하늘을 치솟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은 없지만 자동차 소음, 가끔씩 굉음을 내질러가며 오토바이를 함부로 몰아대는 건들건들한 눈빛을 가진 티베트 청년들이 있다. 거기다가 화려하게 치장한 술집 건물을 뚫고 나오는 현란한 음악소리와 환호성 지르는 소리까지 들려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도심을 벗어난 저만치 가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난한 동네가 숨죽이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거리로 물컹거리는 토마토와 그 딱딱한 빵을 씹으며 맥간의 밤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해도 쓰레기를 뒤적거려가며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소박한 삶은 사치로 다가올 것이었다. 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달고 시골생활을 하겠다는,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에 아파트 한 채씩을 보험조로 장만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늦게 돌아온 옆방의 이탈리아 사내는 나의 마음 상태가 그러거나 말거나 공동 샤워장에서 '오 솔레미오'를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사에 대한 번역이 다양한데 그 내용을 의역하면 대략 이러하다고 한다.

오 태양처럼 빛나는 나의 사랑이여
내 가슴에 안겨 추억이 깃든 푸른 바다로 떠나요
눈부신 흰 파도 꿈꾸는 모래 빛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축제의 노래를
이 밤이 새도록,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그대가 들려주는 정열의 사랑 노래를
오솔레미오 영원한 내 사랑
그댈 만나 장미 빛 사랑이 내게 온 것 같아요

딱딱한 빵을 주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장밋빛 사랑'은 무엇일까. 그날 밤 다양한 국적을 가진 게스트 하우스의 젊은 청춘들이 장미빛 사랑을 꿈꾸고 있을 때 나는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태그:#인도 맥간, #5루피 짜리 빵,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맥간 빈민들, #장미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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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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