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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기 전부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뉴질랜드 남 섬의 넬슨이란 도시 근처 리버사이드 공동체에서 27일을 보내기로 했다.(사진은 넬슨의 바닷가)
 뉴질랜드 남 섬의 넬슨이란 도시 근처 리버사이드 공동체에서 27일을 보내기로 했다.(사진은 넬슨의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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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그만 오세요. 앞으로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공동체 회원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의심했던 리버사이드 공동체에서의 시간은 예상과는 달랐다. 기대와 어긋난 시간을 보내며, 좋은 공동체의 기준은 무엇일까 되뇌었다.

뉴질랜드 남 섬의 넬슨이란 도시 근처에 있는 리버사이드 공동체에서 27일을 보내기로 했다. 세계 2차 대전 때 징집을 거부한 평화주의 기독교인들이 리버사이드 공동체를 만들었다. 현재는 종교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농업 위주의 공동체이다.

리버사이드 공동체에 오기 전부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매년 1월 중순에 한다던 '방문객을 위한 공동체 몰입 프로그램'은 비행기 표를 산 이후 갑자기 취소됐다. 비행기 표까지 다 샀으니 어쩔 도리가 없어 자원봉사자로 가겠다고 했더니, 2달 후에나 방문 허가를 받았다. 숙박비와 식비는 지불하되, 텃밭 일을 도우면 야채를 얻는 조건이었다.

한참 호주, 멜버른을 여행 중일 때, 방문객 관리 담당인 베레나는 도착 예정일보다 1주일 먼저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어디에요?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기 전부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1주일 후, 공항에서 만난 베레나는 허리까지 오는 긴 회색 머리의 70대 노인이었다. 드디어 만났다며 서로 기뻐하기도 잠시, 베레나는 나를 공동체의 방문객용 호스텔에 데려 주고는 사라져버렸다.

내가 가본 다른 공동체는 손님이 도착한 날 마을 투어를 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리버사이드 공동체는 그런 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호스텔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을 주민이에요?"라고 물었지만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여행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호스텔 구역을 벗어나자 마을 주민들이 사는 구역과 공동체 농장이 나타났다. 집들은 몇십만 평쯤 되는 공동체 농장에 흩어져 있었고, 농장에는 사람 대신 양과 소가 돌아다녔다. 탁 트인 드넓은 푸른 목장 너머로는 뉴질랜드의 산과 호수가 펼쳐진 관광엽서 속 풍경이었지만, 누구도 나를 환영하지 않았다. 도착한 날, 리버사이드가 바라던 공동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텃밭일을 도우면 야채를 얻을 수 있다'라고만 했다

공동체 농장의 풍경만큼은 아름답다.
▲ 공동체농장 공동체 농장의 풍경만큼은 아름답다.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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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사람 중 방문객 연락 담당 베레나와 방값 걷으러 다니는 프랑카 빼고는 아무도 호스텔에 오지 않았다. 호스텔 청소부인 다니엘에게 상황을 물었다.

"가끔 너 같이 공동체 생활 하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데, 완전 잘못 왔어. 마을 사람들은 방문객에게 인사도 안 해. 나도 원래 공동체 멤버가 될 생각으로 방문해서 청소부일까지 얻었지.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정말 짜증 났어. 공동체 사람들끼리 밥도 안 먹고, 미팅도 안해. 나도 처음에 마을 사람들하고 친해지려 했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말도 안 걸었어. 돈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마을 사람들끼리 밥도 안 먹고 미팅도 안 하다니.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며 대안적인 삶을 사는 게 공동체인데, 리버사이드 공동체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공동체 멤버들이 내게 인사도 안 하는데 그런 깊은 내막을 물어볼 길이 없었다.

마음 속에 불만이 켜켜이 쌓여가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방문객 담당 베레나가 분명 '텃밭일을 도우면 야채를 얻을 수 있다'라고 했으니 공동체 텃밭에 혼자 일을 하러 갔다. 어떤 규칙도 안내 받지 못한 상태였다.

혼자 비트를 캐고 있는데, 농장 입구에서 단발머리의 중년 백인 여성이 나를 향해 빠른걸음으로 걸어왔다. 안경 너머 그녀의 파란 두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당신 누구예요. 누구인데 남의 밭에 와서 막 야채를 캐요? 호스텔에 있는 방문객이죠?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마음대로 텃밭에 들어와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우리 텃밭에 들일 수 없어요. 더는 여기 오지 말아요. 앞으로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이름은 마렌, 공동체의 오랜 멤버이자 텃밭 담당이었다. 몇 달 정도 고향인 독일에 있었고,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방문객 연락 담당인 베레나가 텃밭 관리까지 했다. 마렌은 몇 주 전 공동체에 돌아왔고 베레나는 마렌에게 그동안 어떻게 텃밭 관리를 했는지, 누가 텃밭을 돌보는지 전혀 말하지 않았다. 공동체 사람들 간의 공식 회의도, 식사교제도 없기에 생긴 일이었다.

공동체 사람중 진짜는 20명, 나머지는 월세 세입자들

청소부 다니엘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 공동체 회원들은 호스텔 청소를 하지 않았다
▲ 호스텔 청소부 다니엘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 공동체 회원들은 호스텔 청소를 하지 않았다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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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베레나에게 물으니 "맞아, 텃밭에서 일하려면 마렌과 친하게 지내야 돼. 그냥 가서 일하면 안돼"라고 했다. 베레나는 이메일로 텃밭일을 도우면 야채를 얻을 수 있다고만 했지, 마렌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안 했다. 해당 규칙은 공동체 회원들의 텃세로 보였다. 리버사이드 공동체는 방문객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볼 뿐, 방문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았다.

알고 보니 리버사이드 공동체에 있는 50여 명의 사람 중 진짜 멤버는 20명 정도, 나머지 30명은 공동체에 월세 내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공동체에서 월세를 받는다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인가. 월세 내는 사람들은 호스텔에 자주 놀러 왔는데, 그중 독일인 키라와 마오리족 다니언과 친해졌다.

키라와 다니언은 동거중인 커플인데 2년 전부터 리버사이드 공동체의 월세 집에서 산다. 3평 정도 될까 싶은, 집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헛간에 살며 월세로 840 뉴질랜드 달러(한화 70만원)를 낸다. 그나마도 부엌과 화장실이 없어 월세 내며 사는 다른 주민 집의 시설을 이용한다.

키라와 다니언은 둘 다 번듯한 직업도 직장도 없었다. 다니언은 공동체 정화조 청소를 하고, 나무 조각을 만들어 팔았다. 키라는 과수원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았고, 그나마도 수확 철이 되어야 일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월세 840달러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내가 공동체에 머물 당시 키라의 통장에는 단돈 5달러밖에 없었고, 급한 대로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는 중이었다.

공동체에 살면서 신용카드 돌려막기를 하고, 월세 낼 걱정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리버사이드 공동체의 진짜 회원들은 주택구매 공동 자금을 통해 산 집에서 월세 걱정 없이 살며, 호스텔과 농산물 판매 수익을 나눠 쓴다.

1~2분 거리에 사는 이웃의 경제적 어려움 따위 알지 못한다. 진짜 회원들 간의 소통도 부족한 마당에 월세 내고 사는 세입자의 사정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웃에 살지만, 누구는 건물주, 누구는 세입자. 과연 주류 자본주의 사회와 뭐가 다를까.

공동 출자 자금을 통해 구매한 집에서 살고, 매일 같이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삶이 여태까지 봐온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특정 집단만 부유하거나 권력을 잡는 건 대안적으로 살겠다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리버사이드 공동체는 방문객과 세입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봤다. 자신들의 삶을 이웃과 나누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많은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알리고, 사회 변화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객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외부와 소통이 부족하면 사회와 고립된 신흥종교 집단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버사이드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제를 알고 있긴 할까. 3주가량 머무는 단기 방문객 주제에 참견할 처지가 안돼 하고 싶은 말을 속에만 담아 둔 채 리버사이드 공동체를 떠났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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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계일주, #뉴질랜드, #넬슨, #리버사이드공동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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