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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 복지 제도는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복지 혜택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수혜자 기준에 약간 못 미쳐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스스로 생활의 어려움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청하는 사람을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복지 대상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료제의 폐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복지 제도는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복지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부담 없이 충족될 때, 진정한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한 것이니까요.

최근 여러 대선 주자들이 조금씩 언급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기본소득' 제도 역시 공동체 구성원에게 조건없이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로 돈을 퍼 주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난과 함께, 취지에는 동의하나 재원 확보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시기상조라는 이야기도 듣고 있지요.

이 책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는 기본소득에 관한 여러가지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그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책입니다. 기본소득의 개념이 무엇이며 한국 사회에 왜 필요한지, 기본소득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더 나아가 한국 사람들도 기본소득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지 등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 봅니다.

기본소득이란, 국가나 정치공동체가 구성원에게 조건없이 지급하는 일정한 금액의 생활비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개인에게 준다. 가구 단위로 지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성년자도 지급받는다. 둘째, 자격심사 없이 누구에게나 준다. 즉 여타 소득이 있는지, 집이나 차량 등 자산을 갖고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자든 부자든 상관없이 지급한다. 셋째, 조건이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을 받는 대가로 일을 해야 하거나 구직 의사를 주기적으로 확인시켜줄 필요가 없다. (p.23에서 인용)

여기에 정기적으로, 현금 형태로 지급돼야 한다는 원칙을 더해진다고 합니다. 일정 기간 동안만 주고 말거나, 한 번에 목돈으로 주어서는 안 되며,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현물이나 특정 상품으로만 바꿀 수 있는 상품권으로 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의 표지.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의 표지.
ⓒ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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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서는 기본소득이 일부 몽상가들의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줍니다. 기본소득은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즉 인공지능의 발달과 만성적인 저성장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선별 복지 시스템의 실패, 이주노동자나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증오 행동 등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이미 세계 여러나라에서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기본소득의 효과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살아 온 모습을 돌아보기만 해도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친구들이 학업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어 했던 것에 반해, 부모님 집에서 통학하고 용돈 받아가며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만 떠올려 봐도 그렇지요.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비가 조금이라도 보장이 된다면 생계 유지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다른 곳에 쏟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넘어야 할 편견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선,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무상으로 주면 그것을 자기 멋대로 탕진해 버릴 뿐 아니라, 더이상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또 하나의 걸림돌은,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생겨나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전통적 노동 윤리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식의 경구나, 나이가 차면 직업을 갖고 자기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워낙 뿌리 깊이 퍼져 있어서, 국가로부터 공짜로 생활비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 책의 2장과 3장은 이와 같은 기본 소득에 대한 선입견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입니다. 2장에서는 영국, 인도, 케냐,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기본소득 실험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공짜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빈곤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보장받음으로써 거의 대부분이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어 3장에서는 이제는 전통적 노동 윤리의 시각을 교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취업 노동만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은 아닙니다. 급여를 지급받지 않는 활동, 즉 가사, 육아, 자원봉사, 정치 참여 같은 일들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일이며, 기본소득은 이런 일들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사회가 금전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일자리 감소로 인해 불가피하게 노동 시간을 단축해야 할 텐데, 이 과정에서도 기본소득이 충격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노동 시간이 줄어 들면서 적어진 수입을 보충해 줄 수 있으니까요.

일자리가 줄어 들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사용자가 멋대로 노동 조건을 바꾸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패 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굳이 저임금의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결국 사용자는 함부로 임금을 내리거나 작업 환경을 열악한 상태로 방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4장에서는 민주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누구나 국가에 기본소득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논의를 압축합니다.

첫째, 기본소득은 국가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얻은 이익에 대한 배당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나 공기 같은 자연 환경 뿐만 아니라, 주파수 대역 같은 인공적인 자원을 활용해서 얻은 소수의 초과 이익을 재분배하는 제도인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 협업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기도 합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성취는 그가 사회 구성원 모두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협력한 결과이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한 이윤에 대한 권리를 구성원 모두가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누구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를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기본적인 생계에 대한 걱정에 얽매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유란 불가능한 꿈에 불과할 테니까요.

넷째, 민주 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주권자가 되지 못하고, 몇 푼 안 되는 돈에 태극기 집회에 동원되는 노인들이 많은데,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그런 곳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는 기본소득을 현실화하는 데 가장 큰 현실적 장벽인 재원 조달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주장의 골자는 세금을 더 걷고 기존의 중복된 복지제도와 통합하여 비용을 절감하면 충분히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설득력을 갖춘 정치 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기본소득의 취지에 공감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쪽입니다. '당선이 되면 기본소득과 유사한 정책을 바로 다음 정부에서 시행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정치 지형이라면 시행 과정에서 잡음이 나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역풍이 불어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당장은 아니라도 10년, 20년 후쯤에는 이뤄내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계획을 갖고, 천천히 길을 잘 닦아 나갈 수 있는 정치 세력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공감대를 차근차근 형성해 나가면서 반대파를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 말이죠.

이런 '완벽한' 정치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아는 민주 공화국의 주권자들에 의해서 키워질 뿐입니다. 이 책을 읽고 기본소득에 공감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정치 과정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오준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 (2017. 1. 2.)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 기본이 안 된 사회에 기본을 만드는 소득

오준호 지음, 개마고원(2017)


태그:#기본소득, #복지, #정치, #오준호,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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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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