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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 스틸컷
 SBS 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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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처럼 많이 알려진 인물도 없고, 사임당만큼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없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한 마디 문장이야말로 신사임당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신사임당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어릴 적부터 교과서와 위인전을 통해 조선시대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를 길러낸 현모양처로 그녀의 이름을 접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걸출한 남성 위인들과의 경쟁을 뚫고 5만원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등극하면서 이제 그녀는 우리들의 지갑 속에서 늘 함께 하고 있다. 아마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을 꼽아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십중팔구 사임당의 이름이 두 번째 안에는 등장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정작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율곡 이이의 어머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현모양처' 등 어릴 적 위인전에서 접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만을 사전처럼 읊어내고 말 게 뻔하다.

그래서 사임당의 삶은 더욱 애처로운 면이 있다. 그녀도 자신만의 삶이 있던 한 사람이었을텐데, 후대 사람들이 기억한다는 모습이 기껏해야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라는 사실은 못내 서글프기까지 하다.

왜곡된 사임당의 이미지, 그 진실은

그런 점에서 최근 문화계를 중심으로 불어오는 '사임당 열풍'은 무척이나 반갑다. 한류스타 이영애가 13년 만의 브라운관 복귀작으로 <사임당-빛의 일기>를 택하면서 덩달아 사임당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방영에 발맞춰 서점가에도 사임당과 관련된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고 있음이 그를 증명한다.

한 언론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월 이후 지금까지 출간된 사임당 관련 서적만 25권에 이른다고 한다. 이틀에 한 권 꼴로 출간된 셈이다. 쏟아지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과연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독자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출간된 <정본소설 사임당>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정본소설 사임당> 책 표지
 <정본소설 사임당> 책 표지
ⓒ 노란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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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定本)이란 여러 이본 등을 비교·검토하여 후속 연구나 인용을 하는 데 있어 가장 믿을 수 있는 표준이 되는 책을 말한다.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보다는 <난중일기>, <백범일지>와 같이 여러 해석이 난무하는 고전 사료의 해설서에 주로 붙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소설 앞에 과감하게 정본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그만큼 사임당의 삶을 실제에 가깝게 고증해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실제로 작가는 2년 여에 걸친 자료 조사와 집필을 통해 사임당에 덧씌워진 왜곡된 이미지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진실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고자 했다.

사임당은 조선시대 여성 중 비교적 기록이 풍부한 편에 속한다. 아들이었던 율곡 이이가 어머니에 대한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사임당의 이미지가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후대인들이 사임당의 실제 삶을 고증하기보다는 시대마다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녀의 삶을 조명해왔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나라의 사정이 위급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또 그 시대마다 모든 여성이 본받아야 할 군국의 어머니로, 해방 후 독재시절엔 세상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는 유순한 자식들을 길러내며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로, 그리고 입시지옥 속에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한 교육의 어머니로 변해 왔다. 그러다보니 화장품과 막걸리와 학원과 의류 패션에 이르기까지 불법도박장과 유흥업소 말고는 사임당의 이름이 안 붙은 곳이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 p.10

'자식교육에 성공한 어머니' vs '혁명적 예술가'

오늘날 그녀에게 씌워진 대표적인 이미지는 '자식교육에 성공한 어머니' 상이다. 물론 사임당의 셋째 아들 율곡은 훗날 조선의 선비들이 추앙하는 유학자로 거듭났다. 아들을 훌륭한 학자로 키워냈으니 자식교육에 성공했다는 세간의 평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역사적 근거를 들어 그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사임당은 율곡이 과거에 급제하기도 전에 이미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눈을 감을 때 열여섯 살짜리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줄 알고 미리 자식교육에 성공한 부모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독자들에게 되묻는다.

반대로 최근 드라마나 소설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임당의 모습은 기존에 알려진 현모양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자유연애를 꿈꾸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야만 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혁명가적 이미지가 그렇다.

작가는 이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남녀가 7살만 돼도 한 자리에 앉을 수 없던 시대에 자유연애를 꿈꾼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역사왜곡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기존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재해석을 시도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사임당 캐릭터에는 여성의 주체적 삶을 추구하는 시대적 요구는 담아냈을지언정, 실제 사임당의 삶을 왜곡했다는 비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 역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소설가지만 어디까지나 정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실제 사임당의 삶을 고증하는 데 더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기록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 간의 대화 장면을 묘사할 때만 그의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율곡의 어머니'가 아닌 '그림에 뛰어난 신씨'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신사임당 표준 영정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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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사임당이지만 작중 화자는 그녀의 막내아들 이우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마치 내레이션 원고를 읽어내려가듯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온 삶을 읊조린다. 그러나 담담함 속에는 어머니의 삶을 부정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 한스러움이 묻어나온다. 그는 어머니에게 덧씌워진 세상의 편견을 반박하며 적극적으로 그녀를 변호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오히려 사임당에 대한 얘기보다는 사임당을 둘러싼 주변 인물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서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사임당의 삶을 사실적으로 고증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탓이다.

사임당이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가계도와 함께 당대 여성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작가는 사임당 가문의 분재기(分財記: 재산의 상속과 분배에 관한 기록)와 당대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들을 인용해가며 사임당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해내고자 했다.

사임당이 태어났던 조선 중기 무렵은 가부장적 질서가 아직은 불완전한 시기였다. 지금이야 제사를 여자가 지낸다고 하면 펄쩍 뛸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집안의 모든 제사는 아들딸 구분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안의 재산을 나누는 것 역시 성별의 구분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균등한 상속이 이뤄졌다. 오히려 일찌감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형제에게 다른 형제들의 몫까지 더 얹어줄 정도로 합리적인 전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임당 집안의 열린 가풍 역시 그녀가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바탕이 돼주었다. 여자라고 해서 학문을 익히는 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외조부 이사온은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낸 사임당에게 시(詩)·서(書)·화(畵)를 직접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산수화와 화초 그림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사임당은 세상 밖으로 나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사임당은 당대에는 뛰어난 여류화가로 인정받았다.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가 아닌 '그림에 뛰어난 신씨'로 그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임당의 그림을 보고 남긴 당대 문인들의 평가만 보더라도 사임당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산수화를 잘 그리는 사람으로 지금 동양 신씨가 있는데,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화와 산수화는 아주 절묘하여 그림을 평하는 사람들마다 안견 다음 간다고 하였다. 아, 어찌 부녀자의 필치라고 해서 가벼이 여길 수 있으며, 또 어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어숙권, <패관잡기>

신사임당의 초충도 (草蟲圖) - <가지와 방아개비>
 신사임당의 초충도 (草蟲圖) - <가지와 방아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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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은 어떻게 율곡의 어머니가 되었나

그러나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임당은 더 이상 그 스스로의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 중심에 서인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송시열이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임당의 고손자 이동명과 송시열의 일화는 사임당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어떻게 변질되어가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동명이 고조할머니인 사임당의 그림에 발문(跋文: 책 끝에 기록하는 본문의 대강이나 발간 경위)을 적어달라며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의 일이다.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생각해보건대 신부인이 어진 덕으로 대현 율곡 선생을 낳으신 것은 송나라 후부인이 정호, 정이 두 분을 낳으신 것에 비할만한 일이라네. 후부인의 행장에 쓰여있기를 '부인은 부녀자로서 문장이나 필찰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매우 옳지 않게 생각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신부인의 의견도 그와 같았을 것이네."

송시열이 언급한 후부인은 유학자 정호·정이 형제의 어머니로, 일찍이 부녀자들이 글을 남기는 것을 매우 그릇된 일로 여겼다고 한다. 가부장적 질서를 부르짖던 송시열에게 후부인은 모든 여인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남겼던 사임당이 곱게 보일 리가 있었겠는가.

작가는 이우의 입을 빌려 "송시열은 나의 어머니가 '후부인처럼 집안에서 바느질이나 하고 자수 정도나 하면 좋았을텐데' 하는 못마땅함이 있었을 것"이라며 씁쓸하고 서운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결국 송시열을 필두로 한 당대 양반들에게는 율곡의 탄생만이 사임당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송시열에게는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의 결론은 율곡 형님입니다. 어머니가 사임당이라는 당호를 쓰고, 그림에 당호를 새긴 낙관을 써도 송시열에게 어머니는 화가 사임당이 아니라 '증좌찬성 이공의 부인'일 뿐이고,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 같지 않은 난초 그림 역시 어머니의 작품으로 뛰어난 것이 아니라 율곡 형님의 탄생을 우주의 참 조화로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보조물일 뿐입니다." - p.390

사임당, 그녀의 이름을 되찾아주어야 하는 까닭

소설은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은 사임당의 씁쓸한 최후를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작가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임당에게 올바른 이름과 삶을 되찾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은 그 의지의 실천인 셈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 세상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받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 그리고, 예술가 사임당의 자리로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옵니다." - p.416

소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사임당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서막에 불과했다. 한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녀는 그녀의 이미지를 필요로 했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소환'을 당해야만 했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남편과 가정에 충실한 현모양처상을 제시했다. 사임당은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의 초등학교마다 사임당의 동상을 세워 어린 여학생들에게 현모양처가 될 것을 강요했다. 기품 있는 한복을 차려입고 자애로운 미소를 띤 영부인 육영수는 사임당의 현신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사임당은 내조에 헌신하는 현모양처로 완벽하게 둔갑했다.

그래서 2007년 한국은행이 5만원권 화폐 인물로 사임당을 선정했을 때, 오히려 진보적 여성운동가들은 사임당이 '구시대적 현모양처'라는 이유로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임당의 이미지가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임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손쉽게 난도질 당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추숭이 이뤄진 이순신과 안중근 같은 남성 위인들의 경우 오히려 영웅적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사임당의 경우 그 자신의 존재는 여전히 가려진 채, 오직 현숙한 부녀자의 이미지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에게 올바른 이름을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정본소설 사임당>, 이순원 저, 노란잠수함, 2017.1.20, 16,000원.



사임당 - 정본소설

이순원 지음, 노란잠수함(2017)


태그:#신사임당, #사임당, #이영애, #5만원,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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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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