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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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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허 장군님이 태어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마을과 조금 떨어진 원평동 장터마을 출신입니다. 허 장군님께서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듯이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금오산인으로 고려시대 길재(吉再), 조선시대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그밖에도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金宗直) ‧ 정붕(鄭鵬) ‧ 박영(朴英) 등 숱한 지조 높은 선비들의 충절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일러주셨습니다.

아마 장군님께서도 어린 시절 집안 어른으로부터 그러한 선비들의 행적을 많이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고장이 왜 근현대사에서는 충절의 인물이 없는지 한동안 절망 속에 지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 후손 이항증(李恒曾) 선생과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후손 김중생(金中生) 선생의 안내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許亨植)' 장군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하얼빈 거주 동포 사학자 서명훈(徐明勛) 선생으로부터 장군의 행적을 소개받는데, 동행한 이항증 선생이 저에게 말씀했습니다.

"허형식 열사는 구미 금오산사람이에요."
"네에?"

저는 그 말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른 듯 전율했고, 동시에 가슴 벅차게 뭉클했습니다. 그제야 고향 출신의 항일 명문 임은 허씨 왕산(旺山) 집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동포 작가 김우종 선생으로부터 허형식 장군의 살신성인 희생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구미 금오산 전경
 구미 금오산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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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일제가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항일반만운동을 잠재우고자 1936년부터 '만주국 치안숙정계획'을 만들어 그들 관동군을 40만에서 76만으로 대폭 증강시켜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에서는 피해를 줄이고자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을 소련으로 월경 대피케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북만의 전구(戰區)와 그곳 백성들을 지키고자 끝까지 소련으로 월경치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외세에 영합치 않으려는, "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자존심이었습니다.

1942년 8월 3일 새벽, 허 장군님은 진운상 경위원(경호원)과 함께 소부대활동 현지지도 중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 군경 토벌대와 교전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신은 부하를 살리고 항일회원 비밀문건을 적에게 넘기지 않고자 토벌대의 총탄을 벌집처럼 맞고 희생했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김우종 선생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애써 찾던 작중 인물을 마침내 찾은 환희에 젖었습니다. 마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그런 황홀경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가 장군님을 만나기 위해 수륙만리 먼 길을 왔다는 어떤 소명의식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다른 고장사람들에게 고향 구미가 5.16 군사 쿠데타 후 벚꽃이 만발한 고장으로 잘못 알려진 데 대하여 매우 침통하게 지내던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2000년 여름, 저는 혼자 북만주로 달려가서 헤이룽장성 경안현 청봉령 어귀에 있는 장군의 희생지 기념비에 한 다발 들꽃을 바쳤습니다. 그때 그곳 당사 관계자들과 주민들이 저를 허 장군 고향에서 온 빈객이라고 매우 환대해 주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더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허 장군님 영령은 저에 대한 반가움이 그분들보다 훨씬 더 컸으리라 믿습니다. 마치 장군께서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 금오산(金烏山)을 보는 듯….

허형식 희생지 주민들의 환송
 허형식 희생지 주민들의 환송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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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양심에 허기지다 

귀국 후 현지에서 구한 사진을 액자에 담아 오늘까지 제 서가에 세워놓았습니다. 저는 날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대여섯 차례 허형식 장군님을 주인공으로 작품화하려고 기필했으나 번번이 탈고치 못한 채 세월만 허송했습니다.

그렇게 된 연유를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저의 게으름에다가 독립운동사에 대한 무지요,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라는 공간에 대한 공부와 내공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어느 새 제 나이 일흔을 넘겨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기에 2015년 연말부터 오대산 월정사 명상관에 머물면서 독한 마음으로 집필했습니다.

지난여름, 비로소 16년 만에 탈고하여 연말에 출판한 작품이 이번에 출간한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입니다. 탈고 후 다시 읽어보아도 '대붕(大鵬)을 그리려다가 연작(燕雀)을 그린 꼴'로 매우 미흡하지만, 그동안 역사에 파묻힌 장군님을 그래도 일단 세상 밖으로 꺼낸다는 소명감에 용기백배하여 출판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그새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태까지 우리 백성들은 줄곧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로 매우 지치고, 정의와 양심에 허기져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조선의 무명옷처럼 순결한 허 장군님의 올곧은, 그러면서도 불꽃같은 장렬한 생애를 오롯이 그려 보았습니다. 이번 <허형식 장군> 작품이 그동안 가짜들에게 지치고 정의에 허기진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한 모금 생명수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주고 삶의 활력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경안현에 있는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
 중국 헤이룽장성 경안현에 있는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
ⓒ 장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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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수호신

아울러 이 작품이 남과 북의 백성들에게 일제강점기 때의 한 항일 영웅을 바로 아는데 징검다리 역할이라도 한다면 작가로서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역사에 묻힌 한 인물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도리라는 것을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거짓의 장막이 모두 걷히면 구미 금오산 기슭 채미정(採薇亭) 앞 어디쯤 허형식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리라 굳게 믿습니다. 저는 그날을 학수고대하면서 허형식 장군 영전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을 감히 바칩니다.

허형식 장군이시여!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눈 감으시옵소서. 아울러 조국과 이 겨레의 수호신으로 굽어 살펴 주옵소서.

2017년 새봄 고국에서 박도 올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259번째 '100년 편지'입니다.



태그:#허형식,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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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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