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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이름과 내 이름,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적힌 작은 종이는 그것이 금박을 입힌 것이든 집에서 프린트해 자른 것이든 누구나 명함인 줄 압니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라고 소개하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기입, 사진가는 사진가라고 알리고 휴대전화 번호와 페이스북 주소를 적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작업에 관심 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뭐고, 전에는 어떤 걸 했고 등등을 명함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궁금하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거나 SNS 계정을 검색하면 되겠죠.

하지만 '내가 널 만났을 때', '그 순간에' 나에 대해 조금 더 알려주면 안 될까요?

 지금 하는 일뿐 아니라 꿈과 희망까지 적는 아코디언명함
 지금 하는 일뿐 아니라 꿈과 희망까지 적는 아코디언명함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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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사에 다니는 것이, 직업적인 타이틀이 내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라면 나의 다른 걸 보여주면 됩니다. 다니는 직장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있고, 내세울 학력은 없지만 내세우고 싶은 색깔은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면 됩니다.

앞뒤 2면이 아닌 10면에 취미를 적고, 좋아하는 책 속 구절을 적고, 두고두고 다시 보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텍스트만 있는 기존의 명함과 차별화합니다. 퇴직자도 명함이 필요합니다. 경제활동 없이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명함이 있어야죠.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이름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명함에는 왜 명사와 숫자만 있어야 하나요? 왜 명사구와 문장이 들어가면 안 되나요? 명함에는 왜 현재만 있어야 하죠? 과거와 미래가 함께 놀게 하면 어때요? 아코디언 명함은 질문하는 명함, 표현하는 명함입니다.

숱한 자기계발 리더들이 '글로 쓰면 이루어진다'고 하니 책상 앞이 아니라 항상 들고 다니는 명함에 바람과 꿈을 적습니다.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꼭꼭 마음속에 품고, 타인의 격려와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싶은 꿈은 정성스레 타이핑합니다.

지금 하는 일뿐만 아니라 한때 갈망했던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까지 적는 희망 명함이 아코디언 명함의 콘셉트입니다. 명함은 단면 혹은 양면이 일반적이지만 아코디언 명함은 앞뒤로 10면을 모두 채웁니다. 크기는 보통 명함과 같고 두께감은 조금 있겠네요. 아코디언, 혹은 병풍 형태로 면과 면의 구분을 두되 종국에는 접힘과 펼침으로 리듬을 타고 '하나의 명함'으로 인식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좀더 알려주자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좀더 알려주자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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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찍은 사진에 필자의 정체성 일부(소설가), 밥벌이를 위해 하는 일(문화예술교육), 경력(인천in기자/독립출판물/섬프로젝트 코디네이터), 홈페이지(마음만만 연구소), 끌리는 단어(여행자), 지향점(문학과 사진/인터뷰어) 등을 넣었습니다.

'소설가' 페이지에 있는 장편소설 '불완전한 여행자들의 거리'는 필자가 출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투고했다가 떨어진 작품입니다. 다음에는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한 줄 남겨두었어요.

아코디언 명함을 처음 만든 지난해 5월만 해도 '문화예술교육'의 다섯 가지 세부항목 중 2개는 언제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문학과 사진' 페이지의 '카드 에세이로 떠나는 인천 섬 여행'도 모 지원사업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상태였지만 나중에 다른 기회가 생겨 프로젝트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전 우주가 돕는다는 말에는 약간의 희화와 농담이 섞여있지만 "닭이 알을 품고 있지만 뭐 그리 따뜻하겠는가. 그러나 늘 품고 있기 때문에 알이 부화되는 것이다"는 주자의 말처럼 품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루어졌어요.

 아코디언명함(앞)
 아코디언명함(앞)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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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코디언명함(뒤)
 아코디언명함(뒤)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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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명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공개해볼까요.

아이디어가 좋다 / 보통 명함은 며칠 갖고 다니다가 버리기 일쑤인데 이건 못 버리겠다 / 특허 내라 / 재미있다 / 사진이 너무 좋다 / 예쁘다 / 멋지다 / 흑백이 더 좋다 / 미색이 더 좋다 / 백색이 깔끔하다 / 얇은 게 좋다 / 두꺼운 게 더 좋다 / 아코디언 명함 만들기 강좌를 개설해라 / 직접 만드는 거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주문 제작 사업을 해라

다른 의견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뉴플러스 미색 100g으로 인쇄했더니) 너무 얇다 vs (모조 백색 150g으로 했더니) 너무 두껍다 / 미색이 좋다 vs 백색이 좋다 / 흑백 아닌 컬러였더라면 / 페더값으로 사진의 테두리를 흐리게 하는 것은 유행이 지났다 / 10면은 너무 많은 것 같다 / 첫 페이지 사진이 '너무' 문학적이다 / 글씨가 너무 작다 / 폰트의 가독성이 떨어진다 / 글씨가 많이 있는 것보다 '마음만만 연구소' 페이지처럼 가운데 한 줄만 있는 게 좋다 / 왜 해외 사진인가? 국내에도 좋은 곳이 많다

긍정과 부정 모두 아코디언 명함의 형식과 내용을 화제로 한 데서 나온 의견이었습니다.

아코디언 명함은 형식적인 인사를 위한 '비즈니스 카드'가 아니라 좀 더 친밀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명함을 건넸을 때 "퍽 재미있는 사람이군"이라고 말하는 유언, 무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때마다 '한 건 했다'는 기분이었어요. 아무렴 심심한 인간보다 재미있는 인간으로 평가받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사진과 글이 결합된 5단 이미지명함
 사진과 글이 결합된 5단 이미지명함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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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명함을 알리고 싶어서 인천의 요일가게_다 괜찮아, 전북 완주군 씨앗문화예술협동조합에서 몇 차례 특강을 했는데 퇴직용 명함, 리플릿 대용 명함, 인생 2막을 위한 명함 등 다양한 아코디언 명함이 나왔습니다.

소OO님은 30년 이상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의 경력과 정보를 앞면에, 퇴직 후 하고 싶은 사진 관련 정보를 뒷면에 적었습니다. 사진에 관심이 많고, 노년의 업으로 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 QR 코드를 넣어 그간의 작업을 볼 수 있게 했죠. 10면 중 한 면은 백지로 비워 '받는 사람을 위한' 메모지로 남겼습니다.

씨앗문화예술협동조합 '모여라 땡땡땡' 주최로 진행한 특강은 1박 2일의 제작기간이 소요됐습니다. 아코디언 명함은 기계적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이 담겨있는 정성 명함입니다. 오래 두고 쓰고, 불특정 타인에게 나를 알리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툭 적은 것으로 단시간에 마무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요.

첫 날 기본 틀을 잡고, 문구를 적었어요. 사진을 고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중요한 것은 밤새 머릿속에서 묵히고 되새기는 거예요. 이만하면 됐는지, 자신의 삶과 이상이 잘 표현됐는지 질문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어떤 이미지로, 어떤 글자 모양으로 자신을 소개할지 거듭된 고민이 필요해요.

소OO님은 함께 사진 활동을 하면서 몇 년간 알고 지냈는데도 그분이 점술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어요. 귀농 3년차인 최OO님은 특강 날 처음 만났는데 '시골에서 살기', '밥 지어 먹기' 같은 문구 때문에 그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낯섦과 친밀감의 재미를 선사하는 명함, 조금 더 타인에게 귀 기울이게 하는 명함, 아코디언 명함이 매혹적인 이유입니다. 이미지로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은 심히 안타깝네요.

가마쿠라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지에 갔다. 무척 큰 공원묘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영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속에서 조용한 둘레 길을 따라 공원 끝까지 갔다. 가와바타 가족의 묘지 앞에 섰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디테일을 하나 발견했다. 내 주위 모든 묘비 옆에 석제 명함 상자가 있었다.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올 때 자기 명함을 건네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디테일은 삶과 죽음을 단번에 친밀하게 만든다. 명함 상자의 존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계속 내왕하는 비밀스러운 권리를 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위화,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함을 건네받은 뒤 휴대전화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버립니다. 종이명함이 사무적이고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자판을 두드려 문자와 숫자를 입력할 필요도 없이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자동으로 정보가 입력되는 명함관리 앱도 보편화됐습니다.

시대의 흐름도 좋고, 기술의 발전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승 사람이 저승 사람에게 건네는 명함이 '아름다운 디테일'이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수준의 '아름다운 스타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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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인천in' 기자로 일했고, 글과 사진을 결합한 카드소설, 카드에세이, 카드인터뷰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돌고 돌고 돌아, 또 다시 숨어있기 좋은 방을 물색합니다. 한 뼘의 햇볕이라도 좋아요. 한 줄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방엔 아무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