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그을리 사랑> 포스터

영화 <그을리 사랑> 포스터 ⓒ 김인철


요즘 가장 핫한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드니 빌뇌브의 문제작 <그을린 사랑>을 봤다. 그가 최근에 연출했던 영화 <컨택트>가 SF의 전형성을 따르지 않으면서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 무자비하고 폭력적일 것이라는 외계인에 관한 편견을 깨뜨려 버린 점, 그리고 전 지구적 재난 상태에서 보이는 인간의 심리적 공황과 갈등 등을 기존의 영화문법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여주었기에 그의 전작들에도 관심이 갔다. <그을린 사랑>. 2010년 개봉작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행운이 개봉 후  7년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적 서사시의 현대식 재현

이 영화는 윤리적인 논쟁을 부른다. 대부분의 논쟁적인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는 새롭다기 보다는 무엇인가에 빚을 지고 있다. 감독은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를 가져왔다. "1+1은 2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다. 유치원생도 콧방귀를 뀌며 대답할 수식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 삶에서 상식, 혹은 진리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평면적 수식이 아닌 입체적 삶이라는 공식에서 1+1은 2가 아니라 1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묻는다.

영화는 캐나다에 살던 주인공 나왈이 숨을 거둔 후 쌍둥이 남매에게 남긴 유언으로 시작된다. 남매는 유언장을 통해 이제껏 존재를 알지 못했던 형과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과 아빠를 찾아서 전달해야 한다. 어머니가 원했던 '속죄?'의 장례식은 남매가 그 일을 마친 후 치를 수 있다.

하지만 쌍둥이 오빠인 시몽은 이를 거부한다. 그는 어머니의 유언과는 상관없이 장례를 치르자고 한다. 하지만 동생 잔느는 오빠와 생각이 다르다.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가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과 오빠가 마주하게 될 비극에 점점 가까워진다. 감독은 이 과정을 쌍둥이 남매의 '현재'와 어머니의 '과거'를 교차 편집하며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그을린 사랑, 그 참혹한 비극의 시작

영화의 도입부는 무척 강렬하다. 화면에는 내전중인 레바논의 황량한 풍경이 보인다. 서서히 줌아웃되는 카메라. 화면은 건물 안에서 전사로 길러지는 소년들이 전사들에게 머리를 깎이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카메라는 머리를 깎이는 한 소년의 눈을 천천히 줌인하며 들어간다. 소년의 눈빛엔 공포, 두려움, 증오가 서려있다. 그 어둡지만 강렬한 눈빛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해준다.

 영화 <그을린 사랑>의 도입부. 한 소년이 전사가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있는 장면이다.

영화 <그을린 사랑>의 도입부. 한 소년이 전사가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있는 장면이다. ⓒ 김인철


바레인의 기독교계 집안에서 태어난 주인공 나왈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남자 와합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나왈의 오빠들은 그녀가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나왈과 함께 도망을 가려던 와합을 총으로 무참히 살해하고 동생마저 '명예살인'이라는 명분으로 처단하려고 한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나왈은 그러나 이미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나왈이 아이를 낳자 할머니는 훗날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발뒤꿈치에 점 세개를 표시하고 고아원으로 보낸다. 이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테베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가 비극적인 신탁을 받았다는 이유로 발이 묶인 채 이웃나라인 코린토스에 버려지는 것과 유사하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된 비극

이 영화에서 가족간의 비극은 단순히 가족에서 끝나지 않는다. 감독은 종교, 종파, 민족간의 비극으로 확장시킨다. 나왈의 비극적인 인생은 1975년 바레인에서 벌어진 내전과 궤를 같이 한다. 바레인은 종교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자이크된 국가다. 그 안에서 무슬림과 기독교간의 분쟁은 마치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벌어진다. 나왈은 아이를 낳은 후 할머니와의 약속대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지만 학교는 무슬림의 공격을 받는다. 나왈은 아이를 찾기 위해 남부 기독교 마을에 있는 고아원 크파르훗을 향한다. 하지만 그 고아원도 기독교 국민당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다.

나왈은 고아원의 아이들이 데레사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던 중 버스에서 기독교 민병대를 만난다. 민병대는 지난번 무슬림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승객들 대부분이 무슬림인 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후 불태워 버린다. 나왈은 숨기고 있던 십자가를 내보이며 그 불타는 지옥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버스 총격에서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한 무슬림의 여자아이를 살려 보려고 자신의 품에 끌어 안지만 결국 엄마를 외치며 다시 불타는 버스를 향해 달려가던 그 아이는 민병대의 총에 죽고 만다.

 무슬림이 탄 버스를 공격하는 기독교 민병대원들. 주인공은 이 끔찍한 경험을 통해 기존의 신념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

무슬림이 탄 버스를 공격하는 기독교 민병대원들. 주인공은 이 끔찍한 경험을 통해 기존의 신념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 ⓒ 김인철


나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무슬림 남자를 사랑했고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타고 있던 버스의 승객들을 기독교 민병대가 학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이 초월하고자 했던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낀다. 그런 상실감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하고 학살의 책임이 있는 기독교 국민당의 수장을 암살할 결심을 한다. 수장의 집에 가정부로 잠입한 나왈은 수장을 암살한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 갇힌 채 '노래하는 여인'으로 알려지며 15년을 복역 하고 출소한다. 그녀는 감옥에서 낳은 쌍둥이 남매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한다.

한편 기독교 민병대의 공격으로 파괴된 고아원에 남아있던 니하드와 아이들은 무슬림 반군 지도자인 샴세딘에 의해 난민도시인 데레사로 가게 된다. 니하드는 얼굴 한번 본 적없는 엄마가 그리웠다. 엄마가 어디서나 자신을 볼수 있도록 순교자가 되겠다던 니하드는 샴세딘의 반대로 순교자 대신 무슬림 내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가 된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 민병대와의 교전 중 붙잡혀 이름을 '5월의 니하드'에서 '아부타렉'으로 바꾸고 악명높은 고문기술자로 길러진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잔느는 어머니의 흔적을 추적하며 그녀가 평생동안 말할 수 없었던 '비밀'에 점점 가까워진다. 오빠 시몽도 잔느의 전화를 받고 결국 바레인으로 향한다.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형을 찾는다. 참혹한 진실을 먼저 알아버린 시몽은  "1+1=2가 될수 있을까?"라고 잔느에게 조용히 묻는다. 잔느는 처음엔 시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끔찍한 진실의 문앞에 서버린 잔느의 리얼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개인의 비극은 가족에서, 민족으로, 그리고 국가로 확대된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들의 비극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나왈의 잘못도, 와합의 잘못도, 니하드와 시몽과 잔느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개인을, 집단을, 민족을 비극으로 몰아 넣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극은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아니 끝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것은 나왈과 쌍둥이 남매가 끝까지 지켰던 '약속'이다. 나왈이 직면해야 했던, 비극의 시작과 끝이었을, 두개의 시간. 즉. 그녀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웠을 두번째 탄생의 순간이 아닌, 사랑으로 충만했던 첫번째 탄생의 순간을 더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듯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을 나왈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되는 끔찍한 그들 가정사의 비극을 끝낼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영화 <그을린 사랑>이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왕>과 가장 다른 점이다.

 어머니의 묘비 앞에 선 아들

어머니의 묘비 앞에 선 아들 ⓒ 김인철


이 영화는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속 주인공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전 국민이 겪어야 하는 총체적인 비극으로 진행중이다. 결국 우리가 통째로 겪어야 하는 이 비극도 따져보면 박근혜라는 개인의 비극적인 가정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비극은 개인에서, 민족, 국가로 확대된다. 영화는 나왈의 용서와 사랑으로 비극을 끝냈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이 국가적 비극을 잘 끝낼 수 있을까? 결단을 요구하기엔, 비극의 시작과 끝이었을, 그들의 양심은 너무 가볍고, 그들의 죄는 너무 무겁고, 그들의 당당한 얼굴은 너무 뻔뻔하다.

끝으로 "시간이 없어서 그리스 비극을 볼 수 없다면 이 영화를 보라"던 어느 평론가의 말이 영화를 보는 내내 '무언가에 그을린 듯한 감정'으로 가득했던 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인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할 예정입니다.
드니빌뢰브 영화 그을린 사랑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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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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