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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려면 그것이 성스러운 예배라 할지라도 속된 실무가 따른다.
 사람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려면 그것이 성스러운 예배라 할지라도 속된 실무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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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작지만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해야할 일이 많다. 사람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려면 그것이 성스러운 예배라 할지라도 고된 실무가 따른다. 고로 매주 그 일들을 도맡아서 할 사람이 필요하다. 식사 준비, 설거지, 주보 제작, 말씀 봉독, 교인 출석 체크, 예배 순서 조율 등.

수많은 일 가운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식사 준비이다.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다시피 나의 문제의식은 '왜 여성 신자들만이 식사준비를 하는가'이다. 여성 신자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내가 속한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교회도 예외가 아닌 초교파적 현상이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식구'라는 말에 포함된 한국적인 정서와 함께 빵을 떼고 한 몸을 이룬다는 기독교적인 가치를 잘 담아내는 의식임은 분명하다. 아주 단순하게 자매형제들과 함께 더불어 먹는 것은 좋은 것이니 교회에서 식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식사 준비 과정 속의 가려진 노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

주일 점심,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기 위한 조건들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이 요리하고 조리하는 단순한(하지만 결코 단순치 않다)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절에 맞추어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냉장고 속 어느 재료를 빨리 해치워야 하는지, 그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지, 어떤 양념들이 필요한지, 어떻게 재료를 손질할 것인지, 어디서 식자재를 사올 것인지, 이번 주에는 과연 교인들이 얼마나 올지, 그에 맞춰 몇 인분을 준비해야 할지, 쌀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수많은 고민과 선택이 따르는 과정이다.

식사를 준비하였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반찬을 적당히 나누어 그릇에 담고, 식탁으로 나르고, 식사 후에 잔반을 위한 통을 마련하고, 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하고, 식탁을 닦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요리하느라 곳곳에 튄 얼룩을 청소하고, 주방을 정돈하고... 해야 할 일의 나열을 보면(미처 나열하지 못한 것까지 상상해보길 권한다) 무시 못 할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성이 잘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요리를 한다?

여성다움이 되어버린 요리,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위치, 요리를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부정적 피드백이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여성들을 주방으로 몰고 있다.
 여성다움이 되어버린 요리,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위치, 요리를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부정적 피드백이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여성들을 주방으로 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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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여성들이 요리를 잘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서로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나누어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니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저마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이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현상적으로 여성들이 각처에서 요리하기 때문에 '잘'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여성들이 요리를 잘하는 것이 맞는지, 왜 여성들이 요리를 잘하게 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여성다움이 되어버린 요리,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위치, 요리를 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부정적 피드백이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여성들을 주방으로 몰고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말했듯,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특정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굉장히 기괴한 일이다. '여자니까 요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흑인이기 때문에 목화솜을 따야 한다'는 말도 성립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흑인이라서 목화를 따야한다는 주장만큼이나 기괴한 것이 여성이라서 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빗대야 이상함을 알게 될 정도로 우리는 '여성이 밥을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에 남성 신자들이 설거지도 '돕지' 않냐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설거지는 아주 목적이 뚜렷하고 별생각 없이도 할 수 있다. 물론 설거지의 단순함이 중요한 건 아니다. 작은 따옴표 안에 충분히 강조했듯, 설거지를 여성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한쪽이 다른 한편을 '돕는다'라는 말은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평등의 감각을 훈련해야 할 곳에서 조직적으로 여성의 노동에 기대는 것이 정의로운가? 그것을 신앙인의 당연한 순종, 희생으로 포장하는 것은 정당한가? 누군가 한편이 거들지 않고 모두가 함께 짊어지는 상상은 불가능한가? (혹은 다 같이 하지 않기로 결정하든지...)

교회에 오지만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여성들

누구는 같은 공간에서 말씀을 듣고, 다른 누군가는 식사 준비를 한다.
 누구는 같은 공간에서 말씀을 듣고, 다른 누군가는 식사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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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준비는 언제 이루어지는가?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예배를 시작하는 오전 11시 이전부터 음식 냄새가 분주히 올라온다. 당연히 식사 당번인 여성 신자들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잠깐 올라왔다가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누구는 같은 공간에서 말씀을 듣고, 다른 누군가는 식사 준비를 한다.

이쯤에서 복음서의 한 일화가 떠오른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여정 중에 마르다의 집에 초대된다. 마르다가 손님맞이 준비로 마음이 분주한 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태평하게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 아마 씩씩거리며 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도 가만히 말씀만 듣지 말고 나를 돕도록 명해달라'고 한다(여기서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며 쉽사리 조소를 날리지 말길 바란다).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라며 다독이며 말한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손님맞이와 식사준비라는 공통점을 들어 예화를 어긋나게 인용했을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한국 교회의 주일 풍경에서 여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고 마리아처럼 좋은 몫만 택하여 말씀을 듣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친교로 다져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모두가 경험할 수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에 여성, 특히 중년의 여성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어선 안 된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은 선언적 구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좀처럼 손해보지 않으려하는 여자들?

누군가는 이런 나의 문제제기에 그냥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면 될 것을 가지고 계산적으로 따진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기꺼운 마음을 요구할 수 있는 당신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기쁜 마음과 그리스도의 희생의 마음으로 당신이 직접 이 일을 해보는 건 어떤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말씀을 바싹 갖다 대어 본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이와 중에 이런 말씀이 떠오른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하지만 이 말씀들이 양비론처럼 같은 무게로 다가가선 안 된다. 누구나 성찰의 기회에 마음을 활짝 열어두지만 엄연한 현실과 그 현실의 오랜 퇴적물을 지우거나 흐려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어떤 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여 명백히 부정의한 현실을 매끈한 '평화'로 포장하지 말자. 오늘부터 "잘 먹었습니다"라는 감사 인사만으로 부정의를 덮어두지 말자. 오히려 활짝 드러내어 빛을 쬐어 보자. 그 빛을 어떻게 쪼일 수 있을지 앞으로 함께 고민해보자.



태그:#교회, #여성,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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