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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수감중인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18일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이날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과 이승구 삼성 미래전략실 상무가 이 부회장을 면회했다.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수감중인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18일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이날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과 이승구 삼성 미래전략실 상무가 이 부회장을 면회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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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금쪽같은 국민연금을 농락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뭔가 그동안 막혔던 것이 뻥 뚫린 기분이 들었네요. 구속영장이 기각된 지난 번에는 어찌나 스트레스 받았던지...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나니, 언론에서도 앞다투어 한끼에 1400원짜리 식사니, 혼자서 먹은 밥그릇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구치소 독방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더군요. 그래서 저도 제 수감 경험을 통해서 조금 보태볼까 합니다.

저는 서울구치소를 막 서대문에서 의왕으로 옮기고 얼마 후인 1988년 6월에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전 서울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는데, 19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통령 선거, 그리고 구로구청 항쟁, 1988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 등(집시법 위반)으로 수배가 되었다가 시위 현장에서 연행되어 구속됐습니다.

연행된 후 장안실업 주식회사(종로구 옥인동)라고 가짜 이름을 붙인 서울 시경 대공분실에서 48시간 연속 밤샘 조사를 받은 후, 구속 영장이 청구되어 경찰서에서 열흘간 지내다가 서울구치소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물론 학생운동을 시작하며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낯설고 위압적인 환경에 처음엔 조금 주눅이 들더군요. 들어갈 때 목욕하고 신체검사하고 나눠주는 수의와 약간의 사물을 받은 후 처음에는 혼거방에 들어갔습니다.

혼거방은 일반 재소자들이 함께 쓰는 곳인데 당시 사기, 절도, 폭력, 소매치기 등으로 구속된 재소자들과 함께 열흘간 지내다가 독방으로 옮겼습니다.

감옥 안의 감옥, 독방을 두려워 하던 사람들

1987년~1988년 당시 재소자들 중에는 시위하다 온 학생들이 무척 많았는데 나름대로 일반 재소자들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가면 흔하게 하는 신고식도 아주 간단히 자기 소개만 하고 끝내는 정도였습니다. 처음에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일반 재소자들에 비하면 무척 배려받은 것이지요.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으로 이어진 당시 시국에서 일반 재소자들은 시위하다 온 학생들을 '민주 학생 혹은 독립군'이라 칭했습니다.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대신 해준 용감한 학생으로 여기고, 학생들 때문에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다며 인정해줬습니다.

아무튼 그리 어렵지 않게 혼거방 생활을 하다가 독방으로 가게 되니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반 재소자들 같은 경우에는 독방을 가는 것을 좀 두려워합니다. 하루 종일 혼자 갇혀있다는 것은 감옥 안의 감옥 같은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밖에 있을 때 못 읽었던 장편소설들을 실컷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 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대하장편소설들이었는데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이병주의 <지리산>,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김인숙의 <79-80 겨울에서 봄사이> 등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감옥 안에서 사전으로 영어 공부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영어공부를 해볼까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더군요. 사형선고를 받고 언제 집행될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사전으로 영어공부를 했다는 김대중 대통령은 정말 정신력이 대단한 분입니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전 서울시장 염보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영수 특검사무실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이 확정된 후 첫 조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영수 특검사무실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이 확정된 후 첫 조사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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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보수적이란 감옥의 특성상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울구치소의 남자 수형 공간은 1동에서 15동까지 모두 15개 사동이 있었습니다. 각 동은 상층, 중층, 하층 등 3개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층이 1층, 중층이 2층, 상층이 3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층에는 1번방에서 12번까지 모두 12개의 방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1번방, 2번방, 3번방은 독방이고 4번방부터 12번방까지는 혼거방입니다. 혼거방은 보통 적게는 6명, 많게는 10명까지 생활합니다.

각 층의 독방은 평수가 1평 반 정도되었는데 당시 제가 수감생활할 때 함께 있었던 자들 중에는 횡령 혐의로 구속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전 서울시장 염보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 중에는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지금은 민주당 원내대표인 우상호 의원이 있었고, 당시 재야운동을 하던 이부영 전 의원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있었습니다.

염보현 전 시장은 각 층에 속한 독방에 있었는데, 전경환은 그 때 서울구치소의 5동 중층 한 동을 전부 다 썼습니다. 1번방~12번방까지 싹 다 비우고 혼자 쓴 거죠.

그때는 사형수, 무기수, 거물급 비리 관련자들, 시국사범중 주동자급 학생들, 재야인사들, 노동자들이 주로 독방에 들어갔습니다. 주로 집시법이나 국보법으로 들어온 경우죠.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 김동술을 만나다

서울구치소는 주로 미결수들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형수와 무기수들은 형이 확정된 기결수이면서 독방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시국사범들은 미결수인 상태에서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지냈다는 점이 다릅니다. 저는 14동 중층 2번방에서 지냈습니다. 보안사범을 상징하는 빨간색 명찰로 수번 107번이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 때 3번방에는 국보법으로 들어온 인천에서 노동운동하다 오신분이 계셨고, 1번방에는 처가 식구들을 살인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에 하층 1번방에는 당시에 무척 유명했던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이었던 김동술이 있었습니다.

사형수들은 갇혀있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재소자들이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일반 재소자들이 떠들다가도 사형수들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치면 웬만하면 조용히 해줍니다.

이제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에 대한 동정심이랄까, 안쓰러움이랄까, 자기들보다 뭔가 더 큰 사건을 저지른 재소자에 대한 좀 복잡한 감정으로 사형수를 대하는 것이지요.

하루 24시간 중 30분씩 운동시간이 있는데 혼거방 일반 재소자들은 혼거방 재소자들끼리 운동을 합니다. 그리 넓지 않은 운동장에 1층에 있는 혼거방 재소자들 10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운동을 하는데, 공간이 넓지 않으니 30분간 걸으며 햇볕 쬐다 들어가는 게 거의 전부입니다.

독방을 쓰는 사형수, 무기수, 시국사범 등은 보통 혼자 운동을 하는데 종종 다른 독방을 쓰는 사람과 함께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저보다 4살 많은 김동술과 몇 차례 만나서 함께 운동도 하고 얘기도 나누기도 했었죠.

함께 운동할 때 김동술은 목포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서 제 모교(세종대)가 있던 서울 화양리에서 자취하며 지냈던 얘기도 하곤 했습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입장이라, 언제 사형이 집행되어 죽을지 모르는지라 밖의 시국에 늘 신경을 쓰곤 했습니다. 저한테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나, 만날 때마다 물어보던 것이 기억납니다.

구치소 안에서 책을 나눠보는 방법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모습.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모습.
ⓒ 황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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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다수 사형수들은 88서울올림픽을 맞아 대통령 특사로 무기수로 감형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었죠. 하지만 88올림픽 특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김동술의 사형집행은 1989년 8월에 이뤄졌습니다.

김동술의 사형이 집행된 뒤, 형장으로 끌려가던 김동술이 "이 개xx들. 얌전히 지내면 무기로 감형시켜준다고 하더니 다 사기친 거였어.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나중에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함께 운동하며 얘기 나눌 때는 그냥 덩치 좋은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사형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왠지 마음이 좀 허탈하더군요.

독방수들끼리는 서로 책도 나눠봅니다. '소지'라고 해서 사동 안을 돌아다니며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는 수인이 있는데, 소지에게 부탁을 하면 책 나눠보기가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긴 끈에다 책을 묶어서 아래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주면 받아가지고 자기가 갖고 있는 책을 끈으로 묶어서 올려줍니다.

원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감옥 안에는 끈을 반입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옷을 구입했을 때 포장비닐을 이용해서 만듭니다. 러닝 비닐봉지 몇 장이면 5미터 정도 되는 노끈은 쉽게 만들지요. 속옷 포장비닐을 실을 이용해서 최대한 탱탱하게 한 후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정확히 잘라내서 노끈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이야, 기술 대단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밥알을 으깨어 주사위나 윷같은 놀잇감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벽에 못 없이도 옷걸이를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은 30년이나 지났지만 1988년 당시에는 서울구치소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감옥 내에 수돗물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화장실도 수세식이었죠. 당시 가까운 곳에 있는 영등포구치소, 성동구치소만 해도 푸세식이었는데 말이지요.

대신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아침, 점심, 저녁 딱 30분씩만 물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그 물로 씻고 머리감고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샤워실을 이용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온수는 아침 저녁으로 1리터 정도씩 보급해주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보내는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은 신념과 걱정의 싸움이곤 했는데,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차곤 합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기쁨은 어머님과 여친이 면회를 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옥바라지를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요. 당시 시국 사범은 가족, 친족 면회만 되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여자친구가 면회를 못 왔는데 나중에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사촌 여동생의 주민증을 가지고 어머님과 함께 면회를 온 것이지요. 하루 종일  어머님과 여자친구의 면회 시간이 많이 기다려졌습니다.

수없는 단식투쟁, 그것으로 쟁취해낸 결과물

당시엔 감옥 내에서 TV 시청은 엄두도 못 냈고, 신문도 반입할 수 없었습니다. 라디오는 편집된 내용으로 하루 4시간 정도 틀어주곤 했습니다.

30년 전엔 그랬던 서울구치소였는데 지금은 감옥 안에서 티비도 보고, 신문도 본다고 하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감옥이 좋아지게 된 것은 재소자들의 소내 민주화 투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바로 시위하다 들어온 우리 학생들, 재야인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안에서 싸움을 하면 일반 재소자들은 함께 투쟁은 못해도 응원을 해주고, 구치소 밖에서 민가협 활동을 하시던 우리 어머님들도 함께 싸워주셨습니다. 그 투쟁이 전국의 다른 구치소, 교도소로 파급되어 함께 전국에서 소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단식투쟁을 하고, 싸우고 해서 결국 쟁취해낸 결과들이 지금의 신문 반입 허용, TV 시청 가능 등의 결과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싸워 이뤄낸 결과물을 김기춘 같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던 자들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이 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정당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민주주의 어쩌구 저쩌구'하는 얘기를 듣고 나서 생각나는 것이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단 한 방울의 피와 땀과 눈물도 흘리지 않은 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피흘리고 싸워나간 사람들의 결실을 따먹는 아이러니한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떠들던 최순실. 정말 화가 납니다.

철옹성 같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어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득 옛 생각이 나서 서울 구치소 독방 생활을 회고해봤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늘의유머에도 게재됐습니다.



태그:#서울구치소, #이재용, #서울구치소 독방, #최순실,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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