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은반 위의 두 번의 쿼드러플 전쟁은 도무지 승부의 추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손에 땀을 쥐었고 평창을 예고하며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지난 16~19일 강원도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17 국제빙상연맹(ISU)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선 기대를 모은 대로 남자 싱글의 대접전이 펼쳐졌다. 그 결과는 미국의 17살 점프 신동으로 불리는 네이센 첸이 주인공에 올랐다.

네이선 첸,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알렸다

 네이선 첸의 연기 모습

네이선 첸의 연기 모습 ⓒ 국제빙상연맹


네이선 첸의 입지는 올 시즌을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져 가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열렸던 그랑프리 파이널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확인해준 대목이었다. 당시 그는 쇼트프로그램에서 5위에 그쳤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무서운 뒷심으로 결국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그의 저력은 한국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번 대회에서의 그의 모습은 당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 4대륙에서의 네이든 챈은 그야말로 새로운 남자피겨의 황제를 알리는 느낌이자 동시에 엄청난 스타가 탄생할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과 같았다. 쇼트프로그램에서 경쟁자들보다 한발 앞서 4그룹에 출전한 그는 쿼드러플 러츠 콤비네이션, 쿼드러플 플립 등 출전 선수 중 가장 고난이도의 점프구성을 보란 듯이 해내며 선두로 나섰다.

프리스케이팅에서의 그의 순서는 소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남자피겨계의 인기스타 하뉴 유즈루의 바로 뒤. 하뉴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범했던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하고 분전을 펼쳤고 결국 한 차례의 점프만 놓친 채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시즌 베스트 성적을 냈다. 그의 뒷심은 장내에 일본 팬들을 들끓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분위기는 하뉴에게로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네이선 첸은 보란 듯이 응수하며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첸은 프리스케이팅에서 무려 5번의 쿼드러플 점프를 수행했고, 조금씩의 불안정함은 있었지만 회전 부족이나 넘어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후반의 트리플 악셀 점프에서 도약의 힘이 부족해 회전이 풀린 것이 아쉬웠다. 하뉴의 바로 뒤이자 그것도 가장 마지막에 출전해 상당한 압박감을 받을 뻔했지만 17살의 소년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네이든은 하뉴의 매서운 추격을 뿌리치고 금메달을 확정 지으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하뉴 유즈루의 경기 모습

하뉴 유즈루의 경기 모습 ⓒ 국제빙상연맹 ISU


하뉴-우노-패트릭-진보양, 종잡을 수 없는 빅5경쟁

남자 싱글은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로 꼽혔다.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하비에르 페르난데즈(스페인)을 제외한 남자피겨의 최강자들이 모두 출전했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예상대로 엄청난 접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쿼드러플 점프가 있었다.

올림픽 챔피언인 하뉴는 쿼드러플 루프 점프를 앞세우며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콤비네이션 점프를 2회전으로 처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만회하고자 하는 모습에선 매서운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그랑프리 등 이미 거의 모든 국제대회를 휩쓴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커리어에서 부족했던 4대륙 선수권의 챔피언의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결국 미국의 신예에게 밀리며 뜻을 이루진 못했다. 평창에서 2연패를 달성하겠다는 그의 앞에 등장한 네이선 첸은 가장 무서운 경쟁자 중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

하뉴의 뒤를 이어 일본의 2인자로 꼽히는 우노 쇼마는 이번 대회를 통해 재발견된 느낌이다. 하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쿼드러플 플립 점프를 앞세워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거의 실수 없는 연기를 선보였다. 158cm의 단신이라는 점을 음악의 곡 해석과 연기력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했고 이번에 선보인 그의 연기는 이전에 비해 한층 발전한 모습이었다. 첸과 하뉴에 이어 최종 3위에 오른 그는 평창에서의 다크호스로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소치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패트릭 챈(캐나다) 역시 어린 후배들에 맞서 다소 밀리는 듯했지만 탁월한 스케이팅 기술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다만 평창에서도 그가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4회전 점프에 대한 안정을 하루 속히 찾아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쿼드러플 토룹 점프에서 크게 넘어지며 일찌감치 메달 경쟁에서 멀어졌다.

중국의 신예이자 4회전 점프의 경쟁에 불을 지핀 진보양(중국) 역시 톱 5안에 들며 무시 못 할 상대다. 지난해 쿼드러플 러츠 점프를 경기에 들고나오며 화제를 모은 그는 세계선수권 동메달까지 거머쥘 정도로 급부상한 선수다. 하지만 올 시즌 다소 키가 자라면서 점프에 난조를 보였고 이번 대회에서도 그 불안함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또한, 다소 부족한 스케이팅 스킬과 요소 연결 부분 역시 개선해야 할 점으로 꼽힌다.

이들 이외에도 미국의 2인자 제이슨 브라운(캐나다), 우즈베키스탄의 미샤 지 등 수 많은 남자피겨 선수들은 한국에 찾아와 잊지 못할 볼거리를 선사했다. 남자피겨의 톱5 경쟁은 여자 피겨와는 다르게 기술의 난이도가 앞 그룹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대부분 쇼트프로그램에서 쿼드러플 점프 2개를 기본으로 소화하고, 프리스케이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5위안에 드는 선수들은 4회전 점프를 무려 5개가량을 시도해 기술점수에서만 이미 100점을 훌쩍 넘겼다. 그야말로 '쿼드러플 전쟁'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 남자피겨, 평창 위해 4회전이 절실

 김진서의 연기 모습

김진서의 연기 모습 ⓒ 박영진


이런 경쟁 속에 한국 남자피겨는 아쉬움과 희망을 모두 엿봤다. 96년생 동갑내기 김진서(한국체대)와 이준형(단국대)은 모두 이번 대회에서 부진했다. 이준형은 최근까지 계속해서 허리디스크의 고통에 시달리며 훈련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김진서는 상당히 아쉬움을 남겼다. 2주 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그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실수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침착한 경기 운영으로 150점대를 돌파했고, 총점 220.22점의 비공인 최고기록까지 남겼다. 또한, 오는 3월 평창 올림픽 쿼터를 정하는 세계선수권에도 출전할 예정이었기에, 김진서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모두 점프에서 심한 난조를 보였다.

형들의 아쉬움 속에 이시형(판곡고)이란 별도 확인했다. 처음으로 4대륙 대회에 출전한 그는 지난달 종합선수권에서 3위에 입상해 국가대표가 된 어린 선수다. 아직 국제대회 경험이 적지만 이시형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줬다. 3회전 점프로 구성한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보여줬고 결국 개인기록을 20점 이상 크게 경신하며 200점대에 근접했다.

아직 한국 남자피겨는 세계 정상과의 격차가 크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쇼트와 프리를 통틀어 5~7개가 가량의 4회전 점프를 구사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1개만을 실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이마저도 성공률이 좋지 않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차준환(휘문중)의 경우 4회전 점프를 빠르게 익히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평창에 나서기 위해선 오는 3월 세계선수권에서 김진서의 선전이 필수적이다. 세계선수권에서 정하는 올림픽 티켓 수는 싱글 종목은 24장. 이 안에 해당하기 위해선 김진서가 일단 쇼트프로그램 24위 이내에 들어 프리스케이팅에 일단 나서야만 한다. 또한, 상황에 따라 올림픽 출전권이 20위를 전후로 배분이 끝날 수도 있기에,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최대한 순위를 끌어 올려야 한다. 현 기량으로 봤을 때 김진서의 현실적인 목표는 20위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한 달간의 시간 동안 김진서가 얼마나 점프를 안정화 시키는지가 평창행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창에서의 성공을 위해선 남은 1년간 4회전 점프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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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스케이팅 4대륙피겨선수권 평창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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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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