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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조금 남아 있는 저녁(17일)에 아내가 어디 좀 가잔다. 손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 달랑 들고 말이다. 아내를 따라 나섰다. 이제 생각났다. 울 마을 기차화통형님(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붙여준 별명) 밭에 나는 냉이 캐러 가자는 것. 이런 때는 검은 비닐봉지는 필수다. 보안유지가 생명이니까. 하하하.

아내와 함께 목표지를 향했다. 그 형님 집이 마을 길가에 있다. 그 집도 지났다. 그런데 웬 걸. 그 형님이 옆집을 다녀오다가 길거리에서 나랑 눈이 마주쳤다. '에이! 이걸 두고 가는 날이 장날?'

"형님, 안녕하세요?"

얼른 인사를 하니 형님 왈.

"어디 가?"

헉! 저 양반이 지금 관심법(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하나. 생전 저렇게 묻지도 않은 양반이 오늘따라 저러시네. 난 순간 얼음이 되어 말도 못하고, 손으로 '저기 간다'고 가리켰다.

"그려, 잘 갔다 와."

형님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우리 부부는 도망치듯 형님의 시선을 빠져나간다.

사실, 겨울 동안 쉬는 밭이고, 그 밭에서 냉이 좀 캐겠다고 하면, 쾌히 승낙할 형님이시다. 하지만, 아내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왠지 몰래 캐야할 것만 같았다.

아내가 마을 길가와 가까운 마을형님 밭에서 냉이를 캐고 있다. 나는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냉이를 털어 봉지에 담았다.
▲ 겨울냉이 캐기 아내가 마을 길가와 가까운 마을형님 밭에서 냉이를 캐고 있다. 나는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냉이를 털어 봉지에 담았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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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형님의 밭은 마을 길가 위쪽에 있어 눈에도 잘 띈다. 우리 부부는 그냥 태연한 척 길을 가다가, 잽싸게 그 밭으로 올라간다. 이때, 걷는 자세는 물론 최대한 낮춰야 한다. 혹시나 형님이 보시고, '허허허' 웃으실까 봐서다.

겨우 형님 밭에 다다랐다. 길가와 가까워서 보안유지가 어려운 곳이다. 더군다나 그 형님은 마을 아주머니와 길거리서 이야기 중이라 아직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말캉 수구리"

경상도 진주가 고향인 아내가 말한다. 명령대로 '수구렸다'.

오늘따라 저 양반이 길거리서 말도 많네. 형님의 시선과 우리의 위치가 눈에 밟히는 각도인지 가늠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아, 드디어 형님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다. 아내가 지시를 한다.

"내가 냉이를 캐고, 당신은 흙을 털어 주워 담으셔."

헉,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딱, 한석봉 어머니의 응용 멘트다.

아내는 잽싸게 냉이를 캔다. 아직 겨울이라 냉이가 캐지지도 않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아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듯하다. 조그만 냉이를 잘도 찾아낸다. 눈과 손이 빠른 아내는 냉이를 순식간에 캔다.

난 아내의 지시대로 그 뒤를 따라다니며, 냉이를 탈탈 털어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다. 그때도, 혹시 형님이 또 나오실까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물론 다른 마을 분들이 지나가도 미안한 일이니, 마을길을 경계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눈은 부지런히 냉이를 보지만, 또 다른 마음의 눈은 사방을 봐야 하는 초능력을 우리 부부는 발휘한다.

캐다보니 보인다. 겨울을 견딘 냉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잎은 그리 크지 않지만 뿌리는 야무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울 마을 뒷동산에서 모진 겨울바람을 다 맞으면서, 이어온 생명이니.

아내와 나는 초인적인 팀워크를 발휘해 겨울 냉이를 캐고 주워 담았다. 그러기를 30여 분. 아내가 또 지시한다.

"이제 그만 철수~~~"

아내의 지시가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건 나다.

사실 그 형님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 게 아니라, 저녁이 다되어가고 겨울바람도 쌩쌩 불어 빨리 끝났으면 했다. 냉이를 30분을 캘지, 1시간을 캘지 모르는 '시다바리' 입장에선 막막했다. 어린아이처럼 자꾸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볼 수도 없고. 암튼 참으로 다행이다. 금방 끝나서.

그러고 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겨울저녁 무렵에, 아내는 앞에서 남편은 뒤에서 냉이를 캐고 있는 모습이 참 가관이지 싶다.

아내와 내가 30여분 캔 냉이가 제법 한 소쿠리다. 이렇게 되기까지 냉이는 참 잔손질이 많이 간다.
▲ 냉이 한소쿠리 아내와 내가 30여분 캔 냉이가 제법 한 소쿠리다. 이렇게 되기까지 냉이는 참 잔손질이 많이 간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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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보! 이 냉이 왜 캐는겨?"

나의 과감한 질문에 아내는 친절하게 답해온다.

"아, 그거 내일 대구 갈 때 가져 갈겨."

그랬다. 아내는 오랜 만에 가는 대구 처남 집에 빈손으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게다. 무엇을 사서 가져가는 것보다 시골에서만 나는 것을 가져가려 했던 것. 아내의 진심을 알고 나니 조금 전 '007 작전'의 보람이 두 배로 밀려온다.

아직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경계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냉이가 수북한 검은 비닐봉지에 호미를 담는다. 우리는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산책이나 하고 왔듯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길을 걸어간다.

만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형님이 그 집에서 툭 튀어나와,

"어디 갔다 온 겨. 금방 갔다 오네. 손에 든 건 뭐여?"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손에 든 건 뭐냐며 보자는 날엔, 우린 정말 '엿' 된다. 보자고 한 형님도 미안해지고, 우리도 미안해진다. 서로가 사는 길이 아니라 서로가 죽는(?) 길이다.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 없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최악의 상황이라 하겠지.

다행히 형님은 나오지 않았다. 무사히 미션을 수행한 우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깥 수도에 앉았다. 냉이를 씻고 또 씻었다. 씻은 냉이를 거실로 가져가,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다듬었다. 다듬고 나서 또 씻었다. 냉이를 캐 본 사람은 다 안다. 냉이를 캐는 순간부터 얼마나 잔손질이 많이 가는 지를.

이렇게 정성들인 냉이 덕분에, 내일 처남 집에 가서 행복하게 맛있을 예정이다. 이런 게 시골 사는 재미 아니겠는가. 하하하.


태그:#냉이, #시골, #송상호, #더불어의집, #더아모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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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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