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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교통 오타쿠',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가 연재합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교통, 그리고 대중교통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합니다. 가려운 부분은 시원하게 긁어주고, 속터지는 부분은 가차없이 분노하는, 그런 칼럼도 써내려갑니다. 여기는 <박장식의 환승센터>입니다. 이번 차례에는 14년 만에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온 2003년의 그 참사, 그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할 1995년의 참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구 중앙로역 방화 참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기자 말

현재는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는 대구 지하철 1호선.
 현재는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는 대구 지하철 1호선.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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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이 같은 범죄에 완전히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당국은 뭐 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다중이용시설의 안전을 철저하게 점검해 줄 것을 촉구합니다. - 2003년 2월 18일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 클로징"

대구광역시의 가장 붐비는 거리 '동성로'를 관통하는 지하철 1호선. '밸런타인데이'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던 이날, 명덕역의 안심행 열차에 웬 남자가 말통을 들고 올라탔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막 들어오려던 참에, 경로석에서 일어난 그 남자는 말통 속에 있던 석유를 뿌리더니 불을 붙였다. 자신의 신변을 비관한 그 남자는 목숨을 끊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불이 붙는 것을 보고 무서워 도망쳤다.

잘 훈련된 공작원도, '스파이'도 아니었다. 한 명의 신변비관자가 지른 불은 대곡역으로 향하던 다른 열차에도 옮겨붙었다. 잘못된 매뉴얼을 사용한 기관사와, 운행 중단 조치를 취하지 않은 관제사령실의 오판으로 인해 열차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인해 192명이 사망하고, 150여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전형적인 '인재'이자, '시스템이 사람을 죽인 사례'였다.

희생된 192명 모두에게 사연이 있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서울 나가는 기차를 타려던 사람, 서울대에 합격한 후 '마지막 대구에서의 한 주'을 보내려던 사람, 오전 미팅을 위해 준비하던 사람, 새학기를 맞아 딸의 가방, 새 옷을 사 가던 엄마, 오래간만에 딸을 만나러 가던 아빠까지. 이런 사연을 간직한, 지하철에 탄 192명이 숨진 것이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 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14년째가 된다. 14주기를 맞아 대구 지하철 사고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본다. 대구 지하철 사고는 끔찍한 사고였지만  많은 교훈을 남기고 도시철도 운영사업자/시민의 인식을 모두 변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고, 더욱이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대구 지하철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추모공간에 보존된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의 흔적.
 추모공간에 보존된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의 흔적.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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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원인은 '잘못된 난연 시공', '잘못된 매뉴얼'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빚어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미숙한 초기 대응으로 무려 192명이나 목숨을 잃는 엄청난 재앙이 됐습니다. 일주일 뒤, 우울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대통령 취임식.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와 개혁'을 내걸며 힘찬 출발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 2003년을 정리한 SBS 박병일 기자 멘트"

대한민국에서 여지껏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철도 사고가 없었다. 심지어 1968년 경의선/경원선 일대에서 일어났던 북한의 철도 테러 때도 이보다는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다. 한 신변비관자가 '같이 죽자고 지른' 불에 192명이 사망한 사고는 아래 언급하는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관리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주유소가 석유관리법을 어겼다. 석유관리법에는 석유용 말통에 넣지 않는다면 따로 용기에 석유를 팔지 못 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의자는 세차용 자동차 샴푸통에 석유를 넣어갔다. 이를 본 이들은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단순히 '락스통'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그 플라스틱 통이 '재앙'을 낳은 셈이었다.

그 다음 문제는 부실한 내연재였다. 폴리우레탄, 의자 시트의 천, 그리고 광고판에 이르기까지 열차 안의 집기들이 '탈 수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정비를 할 때 가연재인 왁스를 쓴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차 내 대책은 '소화기 한 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비상코크'가 전부였다. 열차에 탑승했던 당시 철도청 직원이 비상코크로 문을 열어 다행히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 없었다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또 비상상황 시 매뉴얼이 '참담한' 수준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열차 안이 녹아내리는 '용광로'가 될 때까지, 열차 관제실은 연기로 인해 CCTV를 확인하지 못했고 상황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차를 다시 살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 확인된다. 더욱이 사고 직후 사고를 은폐키 위해 열차를 물청소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고 이후의 문제는 '소방본부의 패닉', '그리고 하위직으로의 "독박"'이었다. 소방본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동했다. 분진 마스크, 방독면, 방제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3200명의 소방관과 84대의 소방차를 갖고도 '얼음' 상태였으니 말이다. 사실 한 번도 지하에서 이렇게 큰 화재가 발생한 적이 없었기에, 대비를 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하위직으로의 독박'은 매뉴얼이나 자체적인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삼지 않고, 사고 때 '매뉴얼대로 대처한' 기관사 등 말단이 사고의 책임을 뒤집어썼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매뉴얼을 바꾸기보다는 가장 먼저 실무자를 '징역'보냄으로써 책임을 물은 것은 이번 사고를 통해 볼 수 있었던 가장 '끔찍한' 문제점이었다. 앞으로 이런 사고가 벌어지면 또 말단의 실무자에게 먼저 큰 책임을 물으니 말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되었다면,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어쩌면 192명의 인명을 잃는 일 자체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이런 사건을 막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모든 문제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의 모습.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의 모습.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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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바꿈으로서 지킨 약속, 하지만 불안전한 면도

"오늘은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사 2년, 그 동안에 여러 안전문제점들이 지금은 완벽하게 보완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 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보고입니다. -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2005년 2월 18일 방송 멘트."

다행히도 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상기한 많은 문제점이 해결되었기 때문. 사고의 가장 큰 문제였던 석유 관리의 문제점이 제기됨으로써, 다시금 강한 단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는 그간 고쳐지지 않았던 지하철 난연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잦았던 열차의 '래핑'이 사라졌고, 의자 시트와 페인트까지, 모든 면에서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지하철에서 큰 화재가 난 사례는 불연재로 교체하기 전 7호선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한 명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이다. 또 매뉴얼도 속속 바뀌었다. 화재와 관련된 매뉴얼이 주로 '손'을 보게 되었다. 화재와 관련된 매뉴얼이 바뀌게 되었고, 잘 작동되지 않았던 비상코크도 좌석 밑으로 매설되거나 안전한 공간 안에 매설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소방서와 공조해 지하철역에서의 화재 예방교육이 실시되고, 화재 대피훈련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전국 지하철에서 '화재 시에는 비상 코크를 열고 문을 열어 대피하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대구 지하철 사고는 많은 변화를 남겼던 셈이지만, '하위직에게만 모든 책임을 넘기는' 사회 풍조만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점이 문제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앙로역 한켠에 다시금 만들어놓은 추모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이전에 일어났던 사고'를 추모한다는 것이니만큼 사고가 일어났던 그 공간에 추모공간을 조성한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다른 대책에 비해 배워야 할 점이다.

'잊고 있던 제2의 세월호'...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되어야만 합니까? -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1995년 4월 28일 오프닝 멘트."

그리고 우리가 거의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1995년 4월 2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폭발사고다. 당시 백화점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하던 중, 시공업체에서 가스관을 건드려 가스가 뭉친 상태에서 그대로 아침에 폭발해 101명 사망, 202명이 부상당했다.

더욱이 이 사고 피해자에 영남중학교 학생 42명과, 교사 1명이 포함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공사장에서의 지하 배관 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 가스 누출이 확인된 이후에도 안일하게 대처하였던 것 등 엄기영 앵커의 말에 따라 '후진국형 참사'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세월호 참사'의 원조판이 바로 이 사고였다.

이 와중에도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고 숨진 위인, 버스 내의 승객을 모두 구한 버스기사까지, 엄청난 '위력'을 보여준 의인이 찬사받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언론이 당시 자유민주당의 눈치를 보느라 사건 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세월호 참사 때 인터넷이 언론의 역할을 많이 했다면, 당시에는 PC통신이 정보의 창구 역할을 했다.

문제는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 이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고 후에도 방재대책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고, 공사장에서의 안전불감증 역시 해소되지 않았다. 동탄 메타폴리스 참사, 그리고 고양종합터미널 참사 등 '후진국형 참사'는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엄청난 청소년들이 사망한 '세월호 참사'까지. 상인동의 참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교훈'이 없었다.

지난 2015년 개통한 대구 지하철 3호선.
 지난 2015년 개통한 대구 지하철 3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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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장 안전한' 대구도시철도, 지역 랜드마크 '모노레일'까지 개통

"'하늘열차'의 개통을 알리는 축포가 터졌습니다. 지난 2009년 첫 삽을 뜬지 6년 만에 대구에 새로운 대중교통수단이 첫걸음을 뗀 겁니다. - TBC 이세영 기자 멘트."

대구지하철 참사로 인해 한때 대구시내 구간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더욱이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겨나 시민들이 지하철 이용을 기피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고 직전 하루에 2만5000여명이 탑승했던 중앙로역의 탑승객 수가 사고 이후 1만7000여명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가장 안전한 도시철도 중 하나로 대구 도시철도가 꼽히고 있다. 1호선, 2호선에 이어 최근에는 대구 칠곡과 서문시장, 황금동을 잇는 모노레일 3호선이 개통되어 있다. 오늘날 대구 도시철도는 가장 안전한 철도노선으로 거듭났다. 1호선부터 3호선까지 큰 문제 없이 안전하게 다닐 뿐만 아니라, 3호선은 모노레일임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운행되고 있는 상태.

대구 지하철 참사 없이 '안전한 도시철도'로 운행되는 것이 훨씬 기쁘고 좋았으련만, 그래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커녕 소 잃고 외양간을 방치한 더 많은 사례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던 사례가 아니었을까.

추모벽에 적힌 192명의 이름들. 이 중 6명의 이름은 코드로밖에 적혀있지 않다.
 추모벽에 적힌 192명의 이름들. 이 중 6명의 이름은 코드로밖에 적혀있지 않다.
ⓒ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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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시 기억하라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일부 유족과 부상자들은 당시 악몽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는 등 고통의 터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무연고자 6명은 공원묘지에 가매장 된 채 10년째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고자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관련 법률에 따라 오는 6월이면 화장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2013년 2월 5일 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멘트."

우리는 다시 여섯 개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D08-ca01, K42, K14, K35, K05, A24-ca08. 이들은 바로 대구 지하철 사고 희생자이다. 문제는 이들의 DNA 샘플을 채취할 수 없거나, 가족이 없는데다가 신원을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8년이 지난 지금도 코드번호로 불린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든 정보를 알 수 없다. 심지어 나이와 성별도 알 수 없는 사례도 있다. 이번 사고로 인한 희생자 중 가장 안타까운 사례이다. 더욱이, 매년 이들의 행방 문제를 두고 관계기관과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는 매년 무연고자에게도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때는 '아무런 관심' 없이 화장당할 뻔했던 적도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나마 더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부상자들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악몽 때문에 대중교통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PSTD로 인해 '죽은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나은' 상황에 시달리고 있다. 후두에 생긴 병으로 인해 병원에 다녀오면서도 아직도 나은 보상안이 나오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기도 한다. 그에 반해 부상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대책이 잘 마련되어있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오는 2017년 11월은 대구 지하철 개통 20주년이다. 이들의 상처까지 완전히 치유될 수 있어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완전히 치유되고, 현재 진행형이 아닌 '완료형'의 참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태그:#교통, #대구 지하철 참사, #대구광역시,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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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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