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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이 죽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가 지난 11일자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보호소 시설은 변한 게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변한 게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그간 가까이서 지켜봤던 피해자들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 기자 말

이주노동자 연쇄 자살 징조는 2003년 11월 11일에 나타났다.
 이주노동자 연쇄 자살 징조는 2003년 11월 11일에 나타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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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충격적인 자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비슷한 형식의 자살이 늘어난다. 일명 베르테르 효과다. 특별히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하면 앞서 자살한 사람의 선택을 따라 하는 모방 자살은 이주노동자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 연쇄 자살 징조는 2003년 11월 11일에 나타났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다라카(32)씨가 당일 오후 8시 45분쯤 지하철 8호선의 한 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다. 고인은 사고 직후 곧바로 성남중앙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시신이 영안실에 안치되고 얼마 안 있어 성남에서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던 지인이 소식을 전해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다라카가 자살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유품과 자살 동기를 살필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빨리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부랴부랴 스리랑카인 두 명과 함께 경기 광주 초월에 있는 천막공장으로 향했다. 다라카가 살았던 아래층이 없는 2층 컨테이너 숙소는 온기라곤 느낄 수 없었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서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고 휑한 느낌이 더해졌다.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이라곤 방바닥과 손이 닿는 곳마다 한두 장씩 널려 있는 선불제 전화카드가 전부였다. 수십 장이 넘는 전화카드는 그가 얼마나 자주 고향에 전화했는지 가늠하게 했다.

동행했던 스리랑카인은 언제나 유쾌했고 사람들을 잘 챙겨줬던 다라카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그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라카는 장성 출신의 아버지를 두었지만 군인의 길을 마다했다. 스리랑카 인기 스포츠인 크리켓 선수로 5년을 활동했던 다라카는 아버지 후광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싶어 했다. 크리켓 선수 생활을 마쳤을 때 아버지가 억지로 군에 집어넣었지만, 그는 아버지 몰래 한국으로 향했다. 이주노동이 탈영이 된 셈이었다. 그때 나이가 25살이었다.

한국에서 그는 운동선수 특유의 성실함으로 사장에게 늘 인정을 받았다. 그 덕택에 회사에서는 그가 추천한 스리랑카 사람들로 직원이 채워졌다.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했던 다라카는 월급의 70~80퍼센트를 부모에게 송금했다. 가끔 주말에 즐기는 크리켓은 유일한 취미이자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숙소에서 다라카의 죽음을 예견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살 원인은 금세 확인되었다. 다라카의 매형과 직장 동료들 그리고 회사 사장은 그간 사정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다라카는 자살하기 전날까지 천막공장에서만 4년 넘게 별문제 없이 일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 선별적 합법화 정책을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당시 정부는 4년 미만 체류자에 대해서는 고용주의 확인을 거쳐 취업을 허락해 줬다. 반면, 4년 이상 체류자는 출국하지 않을 경우 11월 16일부터 강력한 단속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선별적 합법화 조치로 다라카가 일하던 천막공장에서는 두 명의 스리랑카인만이 체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동료 스리랑카인들을 가르치며 가장 오래 일했던 다라카는 합법체류 신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낙담했다. 사장은 다라카에게 "단속이야 늘 있는 일이고, 한두 달만 지나면 예전 같아질 테니까 피했다 오라"며 상여금을 주고 휴직을 권했다. 하지만 정부가 일제 단속을 천명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하던 다라카는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주노동자들은 왜 베르테르 효과를 겪었나

외국인 불법 고용 경고문
▲ 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 불법 고용 경고문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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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카의 유품을 정리할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이거 사람들 죽어나가는 신호 아닌지 모르겠다."

그 누구도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라카의 자살은 예견된 사고였다. 그러나 다라카 이후 피할 수 있었던 자살들을 예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라카 이후 피할 수 있었던 자살들은 줄을 이었다. 다라카에 이어 방글라데시 출신 비꾸는 공장에서 자살했고,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우즈베키스탄 브르혼은 공장 화장실에서 자살했다.

2003년 11월부터 12월까지 이주노동자 자살 소식은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계속해서 들려왔다. 물론 2004년에도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이 강화되자 직장을 잃고 두려움과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11월
스리랑카인: 치란 다라카
방글라데시인: 네팔 비꾸
러시아인: 안드레이아
우즈베키스탄인: 브르혼


12월
우즈베키스탄인: 카미
방글라데시인: 자카리아
중국동포: 강태걸
나이지리아인: 메케


빈소가 차려진 후, 영정 앞에 다라카 숙소에서 가져온 다 쓴 전화카드와 편지 두 통, 급여명세서를 올려놓았다. 그의 매형은 다라카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다는 핑계로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 것을 늘 후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토록 지독하게 송금했고, 송금한 날이면 전화로 부모님께 늘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다라카의 매형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술에 의지하며 빈소를 지켰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서로 의지하며 멋지게 성공해서 돌아가자고 다짐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소식을 듣고 조문을 온 스리랑카인들은 크리켓 선수였던 다라카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편, 사고 다음날 영정 앞에서 천막공장 사장은 눈물로 호소했다.

"다라카 덕택에 지금까지 회사를 키워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다라카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한두 달 숨어 있으라고만 안 했어도…. 다라카는 숙련된 기술자였고, 한국말도 잘했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은 다 나가라 하는 거죠? 한국에 오래 있었다고 다 죄인인가요? 죽어라 일만 하고, 한국 사람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불편한가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했다는 자책감이 저를 평생 불편하게 할 겁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천막공장 사장 말처럼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지난 2004년 고용허가제 시행 이후 지금까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는, 불법 체류라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다. 시행 초기 정부는 미등록자 선별적 합법화 조치로 28만 명이던 미등록자를 12만 명으로 줄였다. 그 이후 단속과 강제추방으로 4만 명까지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올해도 5천 명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정부 의도와는 달리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도 20만 명에 가까운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단속 과정의 인권침해 규탄 기자회견-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 이주노동자 기자회견 단속 과정의 인권침해 규탄 기자회견-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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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카의 빈소를 찾은 이주노동자들은 너나없이 '다라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며 입을 모았었다. 스리랑카만이 아니라 네팔, 방글라데시, 중국, 인도네시아 각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슬픔을 같이 했다. 그들은 다라카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까 봐 무섭다며 슬픔을 함께 했다. 뭔가 이루고 싶었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현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공사 현장 또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런 마당에 체류자격도 없는 이주노동자 죽음에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 이도 있다. 세월호 어린 학생들이 죽음도 교통사고 사망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억울한 죽음이라고 호소해 봐야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길을 가다 차에 치인 개를 보면서도 눈물 흘리는 이들이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무덤덤하다. 나의 죽음이 될 뻔한 죽음을 목격했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오늘도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고, 남의 죽음을 멀리서서 방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이어집니다 :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④] 이주노동자 보호라고요?



태그:#베르테르 효과, #이주노동자, #출입국, #미등록이주노동자, #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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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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