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수정 : 2월 28일 오전 10시 10분]

진관사를 나와 북한산 둘레길 제9구간 마실길로 접어듭니다. 진관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사슴집(음식점) 앞에서 삼천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 창릉천으로 흘러갑니다. 과거에는 이 하천을 기준으로 진관내리와 외리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즉 진관사를 등지고 하천 좌측, 지금의 한옥마을을 비롯한 기자촌, 하나고등학교가 있는 이말산 지역은 진관외리에 해당하고, 우측의 진관사, 삼천사 및 3호선 지축역 일대는 진관내리에 속했습니다.


진관사에서 둘레길을 따라 삼천사 쪽으로 이동하다보면 사슴집을 지나 원효조경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터로 추정되는 석물들이 보였다고 한다.
▲ 신혈사 터 진관사에서 둘레길을 따라 삼천사 쪽으로 이동하다보면 사슴집을 지나 원효조경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터로 추정되는 석물들이 보였다고 한다.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사슴집을 지나 원효조경 삼거리에서 삼천사 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얼마 전 이곳 돼지집에 들렀을 때 주인할머니로부터 들은 바로는, 지금의 원효조경 자리는 예전 신혈사 터였으며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주춧돌을 비롯한 여러 석재들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웬 돼지집이냐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돼지집은 삼천사 입구에 있는 음식점 이름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진관내리 토박이로 누구보다 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계실 할머니의 말마따나 신혈사가 지금의 원효조경 자리에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고려 현종의 왕사이자 현화사 주지를 역임했던 대지국사 법경이 머물렀다는 삼천사는 과연 어디에 위치했을까요. 처음부터 현재의 자리에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이와 관련한 중요한 뉴스 한 가지를 공개할까 합니다. 이것은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뉴스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지금껏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걸 특종이라고 해야 하나요? 특종이 아니라면 하는 수 없지만 기자 특유의 예민한 후각으로 미루어볼 때 뭔가 냄새가 나는 건 분명합니다.

때는 196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진관내리에 살던 윤경민씨가 집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청동범종, 청동정병, 청동대부발 등의 불교 유물이 발견되었고 이는 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국고에 귀속되었습니다.

높이 29.8cm, 몸통지름 19.4cm의 고려시대 동종으로 다른 명칭은 '진관사명동중(津寬寺銘銅鐘)'이다.
▲ 진관사동종 높이 29.8cm, 몸통지름 19.4cm의 고려시대 동종으로 다른 명칭은 '진관사명동중(津寬寺銘銅鐘)'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이 때 발견된 동종은 크기가 약 30㎝ 정도로 당시 조사단의 표현을 빌면, "전체의 비례가 쾌적하고 종신(鐘身)의 곡선 흐름이 아름다운 완미한 범종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종은 현재 '동제범종'이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물론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 종이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종으로 둔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도 아닌데 삼천사지에서 출토된 동종이라고 소개되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요.

원인은 이 동종의 발견과정이나 발견시기, 장소 등이 정확히 공개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이런 예는 또 있습니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인 진관사 동종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데 이 역시 그 발견과정이나 발견시기, 장소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진관사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박물관 측에 따르면 이 동종은 1908년에 입수한 전세품이라고 합니다. 이 동종 표면에는 용출사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려시대 사찰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진관사동종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을 소개합니다.


[原銘]
戊戌年 十一月日, 三角山龍出寺, 小鐘造入, 重九斤棟梁學柱

[追刻銘]
小鐘施主, 比丘景雲堂海印伏爲。亡父甲子生寧越嚴天孫, 亡母壬戌生全州全氏。
淸信女壬戌生崔氏銀錢華伏爲。亡父慶州崔氏, 亡母金海金氏。
淸信女庚子生尙宮徐氏眞靈華, 移安于津寬寺。

[원명] 무술년 11월 일 삼각산 용출사에서 작은 종을 만들었다. 무게는 9근이 들어갔다. 동량은 학주이다.

[추각명] 작은 종의 시주.
비구 경운당 해인 복위. 망부 갑자생 영월 엄천손, 망모 임술생 전주 전씨.
청신녀 임술생 최씨 은전화 복위. 망부 경주 최씨. 망모 김해 김씨
청신녀 상궁 서씨 진영화가 진관사로 옮겨 봉안함.


종에는 각각 다른 시기에 새긴 두 개의 명(銘)이 있는데 처음 새긴 명에는 종을 만든 시기와 장소 무게 등이 기록되어 있고, 두 번 째 명에는 시주자와 그들의 망부, 망모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주자가 주로 궁녀들임을 알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새긴, 진관사로 옮겨 봉안한다는 문구입니다. 최초 만들어진 곳은 삼각산 용출사이나 어떤 사정으로 인해 종을 진관사로 옮겼다는 뜻이니, 그렇다면 이 동종이 발견된 곳만 알 수 있다면 고려시대 진관사 위치를 알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정확한 경위를 알 수 없습니다.


특명, 진관내리 윤경민씨를 찾아라!

윤경민씨 찾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진관내리는 진관내동이 되었다가 지금은 진관동으로 통합된 상태이고 또 은평뉴타운 개발로 지형이 많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도 대부분 고향을 떠난 상태이기 때문에 50년 전 진관내리 윤경민씨 집을 찾는다는 것은 약간 과장하면 한강에서 바늘 찾기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법, 물어물어 돼지집 할머니를 알게 되었고, 할머니를 통해 '오마이갓', 윤경민씨가 아직 생존해 있고 삼천사골 입구에서 삼천장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신다는 첩보 아닌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동종발견자인 윤경민 옹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 삼천장 동종발견자인 윤경민 옹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설레는 마음으로 삼천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 계곡 한 편에 삼천집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요즘에는 등산객들이 주로 구파발이나 연신내 쪽에서 뒤풀이들을 하기 때문에 장사가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건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이 엄동설한에 웬 나그네냐는 듯한 눈빛의 주인아주머니가 빼꼼히 문을 열고 내다보시는데 식사하러 온 게 아니고 50년 전의 동종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니 그래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반갑게 윤경민 할아버지가 계신 내실로 안내해줍니다.

윤경민 할아버지 부부가 진관사동종 발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팔순의 나이에도 50년 전의 일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 윤경민 옹 부부 윤경민 할아버지 부부가 진관사동종 발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팔순의 나이에도 50년 전의 일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삼천장에서 만난 윤경민 할아버지는 올해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입니다. 하마터면 영영 묻혀버릴 뻔한 동종 발굴 비사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합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동종인 줄 모르고 무슨 투구인 줄 알았다는 얘기며, 지역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직접 기증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 범종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금속탐지기를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든 일 등등 한 번 풀어헤친 이야기보따리는 끝날 줄 모릅니다.

이야기 중간에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동종 사진을 보여주니 단박에 알아보고 1971년 당시 국립박물관장 명의로 된 매장문화재 국고귀속 공문과 동종 카피사진을 펼쳐놓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내놓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대지국사탑비 발견 일화 등을 듣다보니 어느덧 시각이 네 시를 훌쩍 넘고 말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할아버지 내외분과 헤어져 대지국사탑비 터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섭니다. 삼천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이삼백 미터 쯤 올라가자 너른 공터가 나오는데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법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꽤 규모가 큰 절의 입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위로 올라가니 미타교 다리 못 미처 차도와 등산로가 만나는 지점 좌측으로 밧줄이 쳐진 공터가 보이는데, 곧 윤경민 할아버지가 말한 동종 발견지입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발견지 근처, 진짜 진관사는 어디인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이곳에 꽤 큰 규모의 집을 지었는데 무허가건축물 일제정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삼천장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발견지 근처를 서성거리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봅니다.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진관사는 삼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라고 한 기록이 있고 또 신혈사 터로 추정되는 곳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곳이 고려 때 진관사 터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의 진관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조 이성계가 수륙사를 새로 조성하면서 이룩된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자세한 내막은 전문가들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고 미타교를 건너 삼천사로 향합니다. 삼천사는 동국여지승람과 신경준의 삼각산기 등에는 '三川寺'로, 그리고 성능의 북한지와 이덕무의 유북한기 등에는 '三千寺'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지국사탑비 터에서 발견된 비편에 '三川寺'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이름은 '三川寺'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산 계곡 중에 유난히 물이 많은 골짜기라서 三川이라는 이름을 붙였음직한데, 三千寺는 고려 때 이곳에 삼천 명의 승려가 거처하였으며 그리하여 골짜기 이름을 삼천승동(三千僧洞)으로 불렀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삼천사 석탑을 지나 미로처럼 좁은 등산로를 따라가니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보물 657호 삼천사 마애불이 보입니다. 좁은 골짜기에 위치한 곳이라서 그런지 풍경소리가 유난히 큰데 신발 벗고 두 손 모아 공손히 마애불을 참배합니다.

보물 제657호.  편편한 바위 면에 얕게 부조되어 있으며 융기선을 따라 금분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 보물 제657호. 편편한 바위 면에 얕게 부조되어 있으며 융기선을 따라 금분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 휑한 바람의 골짜기를 마애불 홀로 지키며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민초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소원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니 그 가없는 공덕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삼천사는 신라 때 원효화상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는 승려가 삼천 명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었는데 조선 중종 2년(1530)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 삼천사에 고려 때 사람 이영간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는 기록 외에 1745년 북한지 이후로는 폐사로 기록되고 있으니 어찌된 까닭일까요?

그 거대한 사찰이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


"옛날에 삼천사에 빈대가 많아서 스님들이 견디지 못하고 불상이며 종이며 향로를 비롯한 금은보화를 우물에 집어넣고 폐쇄하였는데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우물을 찾아 헤맸으나 지금껏 아무도 찾지 못했다."


빈대 때문에 절을 폐사했다는 다소 황당하기도 하면서, 또, "그 불상하고 금은보화 찾기만 하면 로또가 따로 읎는 겨~" 하고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삼천사 아랫말에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처럼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됐는지, 아니면 속된 말로 빈대 붙는 승려가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지금은 옛 삼천사 건물터로 여겨지는 폐사지들만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능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삼천사 마애불을 지나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약 삼십여 분을 올라가자 마침내 대지국사탑비 터 팻말이 보입니다. 등산로를 벗어나 화살표를 따라가니 여기저기 석물들이 흩어져 있고 이윽고 거대한 석축이 나타납니다.

옛 영광 뒤로 하고 우거진 잡초 속에 몸울 숨긴 귀부

증취봉 아래 햇살이 따사로운 곳에 대지국사탑비 터가 있다. 비신은 산사태로 흘러내린 바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고 현재는 귀부와 이수 그리고 대지국사 법경의 부도비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 삼천사 대지국사탑비 터 증취봉 아래 햇살이 따사로운 곳에 대지국사탑비 터가 있다. 비신은 산사태로 흘러내린 바위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고 현재는 귀부와 이수 그리고 대지국사 법경의 부도비 기단석 등이 남아 있다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석축 위로 올라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육중한 체구의 거북, 머리를 동쪽 방향으로 두고 위풍당당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곧 대지국사탑비의 귀부(龜趺)입니다. 이 대지국사탑비는 발견 당시 거북의 머리 부분만 살짝 땅위로 드러나 있었고 몸체는 대부분 흙 속에 묻혔으며, 더구나 몸체를 덮친 거대한 암석으로 인해 비석은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습니다.

일찍이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를 조사하려 했으나 폭우로 인해 실패하였고 그 이후 1964년 1월에서야 국립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최초의 학술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64년 1월 16일 동아일보는 5면 거의 전체를 할애하여 대지국사비 발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1월 8일, 10일, 21일 등 세 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하여 74개의 비석 조각을 발굴하였으며 여기에 쓰인 514자의 글자를 통해 이 비석이 고려 현종 때 삼천사 주지로 개경 현화사 주지와 왕사를 역임한 대지국사 법경의 탑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 독자의 제보를 받고 이를 국립박물관에 조사 의뢰해 대지국사비를 발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삼천장 윤경민 할아버지의 증언은 약간 다릅니다. 윤경민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진관내리에 거주하던 승려 염창권이 산에 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상해서 돌부리 주변을 파보니 거북이 머리 같은 게 나왔고, 이튿날 일꾼을 데리고 가서 주변을 파헤쳐보니 귀부가 나와서 이를 신문사에 제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대지국사비 발굴 기록을 보면 동아일보 보도 전인 1963년 9월에 진홍섭, 정영호 교수 등이 이곳을 답사하여 지상에 노출된 귀부를 확인하였다고 하니 윤경민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승려 염창권이 최초의 발견자는 아닌 듯합니다. 다만 염창권이 귀부 주변을 파헤치다가 비석의 파편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각설하고, 수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진행한 대지국사탑비 터는 현재 귀부와 이수(螭首) 부도지대석 만이 그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본래는 귀부 좌측의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전과 우전 그리고 남행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옛 영광을 뒤로한 채 우거진 잡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귀부 앞에 서서 공손히 참배하고 나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몇 백 년의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지상으로 나온 거북은 다시 또 어디로 가려는지 망연히 동쪽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저 멀리 산 아래는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립니다.

아직 깨우쳐야 할 중생이 많아서일까요? 거북은 피곤함도 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 같습니다. 나도 거북을 작별하고 스러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총총 인간세상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문득 홍일동의 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싸구려 술 한 잔에도 마음 즐겁고 匏飮信可樂
달팽이의 집이라도 거리낄 것 없으니 蝸室聊自適
죽으면 초목과 함께 썩고 말 것을 草木與同腐
무엇하러 한평생 허둥대며 살려하는가? 一生何役役
                           -홍일동의 시 '팔음체를 모방하여 강중에게 보내다' 중에서 -

북한산인문기행 3차 답사 안내
일시 : 2017. 2. 18(토). 10:00 ~ 16:00
장소 : 진관사 및 삼천사 일원
경로 : 연신내역-불광중(둘레길)-진관사-삼천사-대지국사터-하나고정류장-연신내역(해산)
신청 : hyunhaedang@gmail.com
인원 : 10명(신청순서대로 마감합니다)
비용 : 없음
준비 : 중식




태그:#북한산인문기행, #현해당, #진관사, #삼천사, #진관사동종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