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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면 그 어디에나 꼭 있어야 했던 곳, 동네 구멍가게다.

이제는 대형마트와 편의점들로부터 등 떠밀려 웬만한 골목길을 다 뒤져봐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상회에서 슈퍼로, 나무문을 섀시로 바꿔도 기업의 골목상권 잠식은 막을 수 없었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2리(암하리 윗뜸마을) 성당 옆 골목길을 따라가면 거기 반세기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곳 남지 않은 구멍가게가 있다. 도르레가 달린 황토색 페인트칠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당신의 추억 속에 불이 켜진다.

암하리 홍동상회 전경.
 암하리 홍동상회 전경.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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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동네 꼬맹이들에게 천국이었다. 가게문 앞에는 여름이면 '아이스케키통(하드통)'이, 겨울이면 허기진 배를 쥐어뜯을 정도로 유혹적인 무럭무럭 김이 나는 호빵통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는 배겨날 길이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또 어떤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알록달록한 맛의 향연이 나무진열대 위에 널려 있었다. 눈깔사탕, 십리사탕, 라면땅, 자야, 누가, 쫀디기…. 그 앞에서 침을 안넘길 장사는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종이판대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풍선뽑기에서 딱지, 구슬, 장난감총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놀거리가 그득했다. 꼬맹이들은 한 쪽 손등으로는 코를 문질러 닦고 한 손으로는 호랑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가게를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엄마한테 들키면 "요녀석! 풀방구리 쥐드나들 듯한다"는 꾸중과 함께 등짝을 얻어 맞기 일쑤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도 구멍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두부와 콩나물이며 간단한 찬거리가 있고 성냥, 양초, 당원, 소금 같은 생필품을 사기도 하며, 덤으로 동네 소문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은 가끔씩 들러 술과 담배 정도 사는, 그래서 담뱃가게로도 불렸다.

그렇게 동네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마을 어귀와 골목길 모퉁이를 지켰던 우리 동네 구멍가게의 추억, 정말로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나던 시절이었다.

2017년 예산군 암하리 윗뜸, 그시절 그 골목길이 있고, 구멍가게도 아직 문을 열고 있는데 그렇게 많았던 꼬맹이들은 보이지 않고 아주머니들은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다.

오래 전에 허름한 간판마저 떼어버린 홍동상회는 이제 동네 어르신들이 간간이 드나드는 담뱃가게로 겨우 숨을 쉬고 있다. 홍동상회 주인 장상순(71)씨가 예산군 암하리로 들어온 것은 35년 전이다. 지금 자리의 간판도 없던 구멍가게를 인수해 뿌리를 내렸다.

충남 홍성군 홍동이 고향인 장씨는 나이 서른에 예산군으로 제금을 나서 첫 사업으로 구멍가게를 시작, 40여년 동안 구멍가게 세 곳을 운영했으니 소상공인의 산증인이다.

홍동상회 주인 장상순씨가 옛날을 회상하며 그 시절 얘기를 하고 있다.
 홍동상회 주인 장상순씨가 옛날을 회상하며 그 시절 얘기를 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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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100만 원을 손에 쥐어주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어."

장씨가 미간을 모으며 옛 일을 더듬는다.

"홍성 상설시장 안에 가게터가 나왔는데 내가 예산가서 구멍가게나 열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처음 시작할 때 작게 하면 평생 고만한 것 밖에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되더라고."

장씨가 예산군으로 제금나서 처음 가게를 연 곳은 대동병원 아래 옛 새마을금고(예산침례교회 옆) 자리였는데 1년 정도하다 접고, 옛 예산양조장(효림요양병원 옆) 앞에 홍동상회 간판을 걸었다. 사실 처음부터 간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음료수를 많이 파니까 나중에 코카콜라 회사에서 걸어준 것이다.

"가게 뒤가 금남·삼흥·천안여객 차고지였는데, 그땐 그런데를 도마리라고 했어. 주변엔 운전기사들이 자는 하숙집도 있었고, 학생들도 많이 드나들어 그냥저냥 장사가 됐지. 소주 1병에 100원, 환희담배 한갑이 50원 하던 시절이여.

언젠가 한 번은 배경덕(전 예산읍장)씨가 가게로 들어 왔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그분 고향이 홍동 문당리여서 홍동상회란 간판을 보니 반가워 들어왔다고 하대. 또 거기서 장사를 할 땐 버스기사들 하고 장기도 참 많이 뒀는데…. 내 장기 실력이 소문나서 기사들이 차 대자마자 일번 우리 가게로 머리를 디밀곤 했으니까. 농협 상무도 일찍 퇴근할 땐 들러서 한판두고 갔지."

허름한 간판마저 떼버렸지만... "가게 지켜야지"

가게안 진열대에 국수, 보리차, 밀가루 등 간단한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가게안 진열대에 국수, 보리차, 밀가루 등 간단한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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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장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5년 정도 있다가 지금 뿌리박고 있는 예산군 암하리로 들어온다.

원래 있던 김사필(목포가 고향)씨 가게를 1600만 원에 샀다. 당시엔 큰 돈이다. 800만 원은 현찰을 쥐고 있었고, 나머지는 빌렸는데 2년 안에 다 갚았단다.

가게터가 겨우 30㎡에 2층 다락방까지 건평이 16㎡이니 가게 크기가 3평 남짓한 그야말로 구멍가게였다. 암하리 위뜸에만 초입에 있는 복심상회를 비롯해 구멍가게가 3곳이나 있었는데도 장사는 잘됐다.

"한 번은 가게와 붙은 뒷집 사는 새댁이 '동전통에 돈 넣는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데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버냐'며 동전통을 열어 보기까지 했다니까. 또 우체국 직원이 와서 동전을 가져 가기도 했어. 여름엔 드라이아이스로 얼리는 하드통에 아이스케키와 쭈쭈바 같은 걸 넣고 팔았는데 자전거로 500개를 실어와 하루만에 다 팔 때도 있었고. 겨울엔 호빵장사가 잘 됐어. 호빵통에 연탄불 갈아가면서 한 번에 10짝 떼서 팔기도 했어. 콩나물도 많게는 두 통씩 나갔고. 그 땐 신문지에 싸서 팔었는데 신문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

여름철엔 성당 담벼락 밑에 수박도 받아놓고 팔았어. 우리 가게엔 특히 꼬맹이들이 많이 왔는데 애들이 사지는 않고 물건만 만지작거려도 내가 혼내키지 않으니까 그랬던 것 같아. 가끔 다 큰 사람들이 와서 '어릴적 아저씨 가게에서 과자, 사탕 훔쳐 먹었다'고 고백하기도 하는데 서로 허허 웃고 말지. 참말 10원짜리, 100원짜리 많이도 주워 담았지. 어쨌든 장사는 팔면 남게 돼 있어."

오래된 담배간판. 수집가들이 찾아와 팔라고 조른단다.
 오래된 담배간판. 수집가들이 찾아와 팔라고 조른단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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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다. 환희와 청자를 비롯해 그동안 70종류의 담배가 나왔고, 72번째가 요즘 팔리는 시가 레브렛이라고 한다. 담배소매업 허가번호 2번을 가지고 있다는 그는 평생 양담배는 취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요즘은 학생들에게 술, 담배 못 팔지 않남. 학생들이 담배를 못 사니까 우르르 몰려와서 이것저것 사면서 내가 정신 없을 때 가끔씩 담배를 슬쩍해 가네. 한 번은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아들이 이 가게에서 담배를 훔쳤다는데 대신 사과드린다'며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담뱃값의 열곱을 내놓드라고. 산교육이지."

소주와 맥주도 많이 팔았다. 소주는 4홉짜리에 최고 30도 짜리가 있었고, 맥주는 640㎖짜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스티로폼 상자 안에 맥주를 넣고 백열전구로 냉기를 없앤다. 맥주가 너무 차가우면 어른들이 마시기 좋지 않아서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스티로폼 상자 안에 맥주를 넣고 백열전구로 냉기를 없앤다. 맥주가 너무 차가우면 어른들이 마시기 좋지 않아서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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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홍동상회엔 바닥까지 꽉꽉 들어찼던 알록달록한 과자도, 호빵도, 콩나물통도 보이지 않는다. 헐렁한 선반엔 라면과 국수 등 생필품 몇가지가 우두커니 자리를 잡고 나무문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도 가게안 쪽방 가장 가까운 곳 담배진열장은 꽉 채워져 있고, 출입문 앞 스티로폼 상자안엔 백열전구 열기를 이용해 냉기를 없엔 맥주병들이 오래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대형마트들이 들어서면서 좋은 시절이 끝났다지만 "그래도 이 가게터에서 벌어 자식 원없이 가르쳤고, 아파트도 한 채 분양받았으니 그냥저냥 잘 살았다"며 웃는다.

"딸 셋을 낳아 대학졸업에 해외어학연수까지 가르치는데 14년이 걸렸어. 우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당대에서 무식이 끊어졌지. 첫째는 간호대학 나와 수간호사로 있고, 둘째는 곧바로 직장 잡았고, 막내는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데 다들 속 안 썩이고 공부 잘 했지."

암하리에 그렇게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거처를 옮겼고 또 돌아가시고 해서 이제 옛날분들은 얼마남지 않았다.

언제까지 가게문을 열 계획이냐고 물으니 "아파트로 들어가면 금방 죽을 것 같아! 몸이 움직일 때까지는 가게 지켜야지"하고 쓸쓸한 웃음을 짓는다.

오래된 주판.
 오래된 주판.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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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하드통을 앞세우고 바람벽엔 네모진 담배간판과 작은 우체통 그리고 나무상자 속의 공중전화….

그 많던 구멍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성인이 돼 찾아온 고향, 구멍가게가 사라진 골목에서 무연히 서 있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 었으니.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구멍가게, #담뱃가게, #추억, #홍동상회,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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